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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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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느끼는 수준 차를 좁히는 은혜_태승철

by 태승철 · 24-01-11 08:13 ·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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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환난을 느끼는 수준 차를 좁히는 은혜>의 줄거리 :

종려 가지 승리에 힘입고 흰옷의 승리를 이룬 사람들은 큰 환난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큰 환난이 무엇일까요? 어린 양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일어날 일 중에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일이 내게도 일어났습니까? 상실의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을 우리는 환난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혹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큰 환난을 환난으로 느낄 수조차 없는 수준은 혹시 아닐까요?

 

 

환난을 느끼는 수준 차를 좁히는 은혜

 

(요한계시록 7:13~17)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누구나 환난을 느낍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느끼는 환난의 수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수준의 차이를 좁혀야만 합니다. 본문을 통해 환난을 좁히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 기준이 무엇인가를 눈여겨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마에 인을 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 중에는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으로 이어지고, 예수님 시대와 중세 시대와 로마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자들 또한 하나님께서 이마에 인을 치신 사람이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태어날 사람들 중에서도 이마에 인을 치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인침 받은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 어린 양 앞에 서서 환영하는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흰 옷과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승리를 환영하고, 그 승리의 힘에 의지해서 자기 자신도 개인적으로 흰 옷의 승리를 이룬 자들입니다.

본문에는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이 사람의 내부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기에 어린 양 예수님의 승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 승리에 힘입어 자기도 승리할 수 있는지 묘사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큰 환난이 무엇인지에 대해 해석이 갈립니다. 이와 관련하여 16~17절을 보면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이 말씀을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고 심판 후에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인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상태를 말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큰 환난이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환난을 가리킨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무척 단편적입니다. 그렇다면 환난을 경험하지 않고 죽은 인침 받은 사람들은 환난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한다는 것일까요? 큰 환난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사도 요한이 보았던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든 자들 중에는 환난을 겪은 자들이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큰 환난이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모든 사람에게 시대를 초월하여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은 죽고 수천 년이 지났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죽음 이후에 영이 낙원에 들어가 잠을 자는 동안에는 시간과 공간 바깥에 나가 있기에 일분일초도 지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는 그들이 죽을 때의 그 의식 상태에서 깨어나 예수님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은 누구나 죽자마자 당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큰 환난 또한 수평적 시간에서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환난입니다. 아벨과 에녹과 아브라함은 오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우리는 오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제치고는 하나님을 만날 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환난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작은 환난 혹은 사소한 환난이나 적당한 환난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마에 인을 치신 사람들이 큰 환난에서 나온다는 것은 환난을 느끼는 수준에서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환난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환난이 반드시 무엇인가 소중하고 아깝고 귀중한 것을 상실하는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환난은 상실감을 느끼게 합니다. 문제는 도대체 무엇에 상실감을 느끼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환난의 크고 작음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환난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기에 그 환난에서 나오려고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환난이라고 느끼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의 개념 또한 이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결국 상실감을 가져다주는 환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상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구원받음입니다. 상실과 상실감은 다릅니다. 객관적 상실이 주관적 상실감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대수롭지 않다면 상실감도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 같은 경우에는 육체를 잃었으나 상실감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육체를 잃었음에도 상실감이 생기지 않듯이, 세상에서 육체를 통해 만나는 무엇을 잃더라도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구원받음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여전히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상실감을 느낀다면 그 구원은 가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받았는지 확신을 갖기에 앞서 구원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돈을 사기당했다고 해서 상실감에 사로잡힌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아프다고 건강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크게 느껴진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구원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상태입니다.

 

환난에는 느끼는 수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환난을 두렵고 싫어하는 이유는 환난이 좋고 아깝고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좋고 아깝고 귀중한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서 환난을 느끼는 수준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두 살 아기들은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온갖 것에 흥미를 보입니다. 그러다가 아빠가 벗어 던진 양말을 집어 들고는 입에 넣으려고 합니다. 엄마가 얼른 와서 양말을 뺏으면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어댑니다. 마음에서 상실의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기에게는 손에 쥐고 있던 아빠의 양말을 뺏기는 것이 큰 환난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상실의 고통을 느끼는 상실감의 수준도 달라집니다. 청소년 시절에 느끼는 상실감이 다르고, 성인이 됐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 다릅니다. 청소년 시절에는 자기가 응원하는 프로 축구팀이 패배한 것에 상실감을 느낄 수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그 정도의 상실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대신 건강을 잃고, 명예를 잃고, 재산을 잃는 것을 상실감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환난으로 느끼는 상실감의 수준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큰 환난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인침 받은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환영하는 이유와 연관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좋은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게서 상실감을 제거하기 때문입니다. 인침 받음이란 하나님께서 이마에 너는 내 것이다.’라고 쓰신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인침 받은 사람들의 환난의 수준은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인침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어도 하나님 한 분만만은 잃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해서만 상실감을 느끼는 상태가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 증거입니다. 물론 우리는 죄 속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같은 이유에서 상실감을 느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건강과 관련된 일, 가족과 관련된 일, 회사의 적자 경영, 응원하는 축구팀의 패배 등과 같은 일들이 상실감의 이유로 작용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침을 받아 어린 양을 만나게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응원하는 축구팀이 졌지만, 어린 양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잃음에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사기당했어도 어린 양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는 아무 영향이 없음을 느낍니다. 또 건강에 문제가 생겼어도 어린 양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지금 죽는다고 해도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점점 더 세상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음입니다. 다만 우리가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이 과정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2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인침 받음이란 너는 내 것이다. 이제 너는 나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 양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갖고자 하는 동안 점점 더 하나님을 잃는 것에 대한 상실감도 커지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본래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있음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잃었다면 상실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잃었음에도 상실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잃어버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잃음이라는 환난을 느끼는 수준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볼 때 우리가 건강을 잃었다고 큰 상실감을 갖는 모습은 아기가 아빠의 양말을 입으로 빨다가 엄마에게 빼앗기자 상실감을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를 잘 아는 천사들이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잃었다고 울며 난리를 치는 모습이 전부 아기의 생떼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14절을 보면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어린 양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점점 더 하나님을 자각하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피는 죽음을 상징하기에 하나님을 잃은 나는 어린 양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잃었다는 상실감을 깨달은 자들은 어린 양의 피에 씻기를 생활화하게 됩니다. 이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계속해서 더러워진 마음을 어린 양 피에 씻으며 흰 옷을 입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때 하나님을 잃게 될까요? 우리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의 존재감의 느낌을 통해서 나의 근거를 확보하여 안심하고자 합니다. 근본적으로 나는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잃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존재감을 느끼는데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배우자의 존재감을 우선적으로 느낀다면 하나님을 잃는 것입니다. 직장에 출근한다고 해서 사장님의 존재감을 우선적으로 느낀다면 하나님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침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의 대상에 존재감을 먼저 느끼고자 하는 순간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배우자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는 아내도 있지만 하나님이 먼저 계신다.’라는 것을 느낍니다. 이로부터 아내의 있음을 먼저 느끼는 나는 십자가에서 어린 양과 함께 죽어야 한다.’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린 양의 피에 씻는 것입니다. 환난은 곧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환난보다 큰 환난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상실감이 크게 느껴지는 상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기에 십자가 사건이 구원이 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나를 어린 양의 피에 씻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럴 때 어디서 십억이 뚝 떨어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좋음을 욕구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본래 그 기능은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 기능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기능인 것입니다. 그런데 십억을 바라게 되었으니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황입니다. 인침 받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깜짝 놀라며 반성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뭘 바라고 있는가? 십억을 바라는 나는 어린 양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하며 십자가를 붙잡고 어린 양 피에 씻기를 반복할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마음은 점점 더 흰 옷의 색깔로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환난을 느끼는 수준이 달라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환난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상실의 고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고 10, 20, 3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돈 잃는 것이 상실감으로 느껴집니다. 건강 잃는 것이 상실감으로 느껴집니다. 취직 못 한 것이 상실감으로 느껴집니다. 이처럼 여전히 이 세상 것들을 잃는 것이 상실감으로 느껴집니다. 이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인침 받은 사람이 아니거나, 인을 치셨음에도 십자가 생활화의 말씀을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을 잃어버림에 대한 상실감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을 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우리는 각 지파 중에 일만 이천 명씩 십사만 사천 명이 인침을 받았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열두 지파에 속한 모든 사람이 인침을 받았던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독교 종교인 전부가 인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 중에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인침 받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인침 받은 증거는 상실감을 느끼는 수준이 바뀜으로 나타납니다. 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잃음 외에 다른 것에 대해 잃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죽어가는 중에도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상실감의 기준이 바뀐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님의 기준을 본받아 우리도 환난과 상실감을 느끼는 수준의 차이를 좁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고, 하나님을 상실함에 대한 상태에서는 자각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린 양 피의 씻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상실감을 느끼려는 마음을 어린 양 피에 씻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속될 때 마음은 흰 옷을 입게 되고 마침내 투명하게 빛나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상실감의 기준을 끌고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어린 양의 피에 씻음이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 피에 씻음이란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전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은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전을 예배당 건물이라 생각하지만, 성전에서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열왕기상 8장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한 다음에 연설하고 기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이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성전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름을 둘 곳이고,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성전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김이란 예배당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체성이심을 기억하면 시장에 있는 내 몸이 성전이 됩니다. 직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으심이고, 유일한 주체성이심을 기억하면 직장에 있는 내 몸이 성전이 됩니다.

섬김으로 번역된 헬라어 라트뤼오(λατρεω)는 고용된 종을 의미하는 라트리스(λτρις)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이란 유일한 있음이시며,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체성이신 하나님의 이름에 내 마음이 고용된 노예처럼 얽매인 상태를 말합니다. 노예가 어디에 있든지 주인에게서 풀려날 수 없듯이, 시장에 있든 직장에 있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욕구합니다. 내 주체성을 죽이고 하나님의 주체성만 인정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욕구하고, 주체성을 작동시키면서 노예로 살아갑니다. 돈의 존재감을 빨아들이면 돈의 좋음을 욕구하게 되고 돈의 주체성에 휘둘리게 되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있음과 좋음을 빨아들이는 부모는 자녀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바라는 욕구는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잃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으로 고용된 노예입니다. 하나님을 좋음만을 욕구하는 것으로 고용된 노예입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해 드리는 것으로 고용된 노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 위에 장막을 펴신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린 양의 죽음을 생활화하며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을 인정하는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나를 한 지붕 아래 살 수 있는 식구로 여기시며 장막을 펴서 나와 같이 사시게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나를 배우자와 같은 동반자로 여기심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이 16~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림이란 곧 바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뭐가 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지 않습니다. 목마르지도 않는다고 하셨듯이 세상을 향한 갈증이 생기지 않습니다.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는다고 하셨듯이 이 세상 일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실 때의 상황을 연상시킵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 대한 바람이나 갈증이 없고, 세상으로 인한 상함도 생기지 않는 이유는 상실감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을 상실감으로 느낀다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하는 모든 것들이 위기이자 환난으로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삶이 순탄하든지 역경이든지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하는 상황이라면 내게 환난입니다.

반면 아직도 돈을 잃어버림이 환난이고, 건강을 잃어버림이 환난이고, 성공을 잃어버림이 환난이고, 자녀가 일류대학에 못 들어가는 상태가 환난이라고 느껴진다면 구원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인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말씀을 듣고 이제 정신 좀 차려야겠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이마에 인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17절을 보면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상실감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눈물이 나는 이유는 소중하고 아깝고 귀중한 것을 상실하는 슬픔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에 샤워하기를 생활화하면 마음은 점점 더 하나님만을 유일한 상실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내게 상실감을 주는 유일한 대상이 되실 때,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울 일이 없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후에 새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큰 환난에서 빠져나온 자들의 눈물을 씻어주심이란 바로 우리가 사는 중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해서만 상실감을 느끼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에서도 상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일로 인해 울 일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날마다 어린 양의 피에 샤워하기를 생활화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다른 것의 존재감을 느끼고 다른 것을 욕구하는 모습, 나의 주체성을 부인하지 않고 주장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죽이는 것이 어린 양의 피에 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어린 양의 피에 씻기를 생활화하면 하나님만이 상실감의 대상이 되십니다. 심지어 몸이 죽임을 당해도 상실감을 느끼지 않고 항상 기뻐할 수 있기에 눈물을 씻어 주시는 일이 일어난다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만나는 일 때문에 운다면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암에 걸리면 그 순간은 절망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린 양의 피로 눈물을 닦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암에 걸린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이셨다. 나는 바로 이러하신 하나님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내 몸이 아까워서 십자가를 놓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께서 내 마음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생명이란 내 마음에 채움을 주는 기쁨입니다. 기쁨이 샘솟기에 생명수 샘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기쁨이 솟아오르는 샘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 마음을 보좌로 끌고 가셔서 하나님을 갖게 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암에 걸렸더라도 마냥 걱정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어린 양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생명수를 마심으로 기뻐하는 것이 몸에 좋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상식 수준에서 긍정적 마음을 갖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계산을 해봐도 암에 걸린 몸을 마음으로 붙잡고 엉엉 우는 것은 바보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는데, 암 걸려 죽는 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암 걸린 것이 뭐 그리 억울하고 아깝다고 우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암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일 때문에 울 일이 생기거든 이것은 절대 울 일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야단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왜 웁니까? 하나님을 가지면 된 것입니다. 몸 잃어버리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린 양의 피에 샤워하기를 생활화하면서 환난을 느끼는 수준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스데반 집사님처럼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일이 있어도 상실감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상실하지 않기 위하여 고용된 노예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욕구하며, 내 주체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주체성을 인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마에 인침 받은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데반 집사님을 기준으로 볼 때 환난을 느끼는 수준의 차이가 점점 더 좁혀져서 일치하는 은혜 중의 가장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