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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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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부에 들어서자마자 일어나는 일_태승철

by 태승철 · 24-01-06 07:04 · 644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음부에 들어서자마자 일어나는 일>의 줄거리 :

일곱 인으로 봉인된 하나님의 오른 손에 들린 두루마리 역사의 중심축이신 어린 양을 등진 채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죽으면 안 됩니다. 육체가 죽는 것 그 자체는 사실 실제로 죽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 다음부터 그 마음이 음부로 들어서자마자 닥칠 일이 너무나 끔찍합니다. 죽으면 정말 큰 일 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가능한 오래오래 살 것을 권고 드립니다.

 

 

음부에 들어서자마자 일어나는 일

 

(요한계시록 6:12~17)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시록이 기록된 시대로부터 약 2,0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역사의 중심축이신 어린 양 예수님을 등지고 살다가 육체가 죽은 자들은 음부로 들어갑니다. 본문에는 이러한 자들이 음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2~14절을 보면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언뜻 보면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재림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재림 전에 어린 양을 등지고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지금 살고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상관없이 음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본문은 그렇게 음부로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본문을 본격적으로 이해하기에 앞서 꼭 기억을 되살려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성령의 감동을 받음과, 육체의 감동을 받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마음을 중심으로 놓고 육체의 감동을 따라 사는 것이란, 마음이 육체 안에 머무는 상태에서 육체를 통해 만날 수 있는 대상들에게 닿고 반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는 것이란 마음이 성령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성령을 통하여 접하게 되는 대상들에게 닿고 반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어린 양을 향하여 찬양하며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 육체를 통해 만나는 대상들에 마음이 닿아서 반응하는 육체의 감동이 일어날 때마다, 자기 자신을 어린 양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임당하도록 내어놓습니다. 한편 어린 양을 향하여 찬양하지 않고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마음이 육체에 갇혀서 육체로 만나는 대상들에게 마음이 닿고 반응하는 육체의 감동을 그대로 묵인합니다. 마음이 무방비 상태에서 육체를 통해 만나는 세상의 대상들에 닿고 세상의 대상들이 스며들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감동을 따라 산 사람들은 육체가 죽은 후에 음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린 양을 등진 채 육체의 감동을 따라 평생을 살다가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자마자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육체의 감동을 따라 사는 자들의 특징은 마음이 육체를 통해 만나는 대상들에 닿아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고자 합니다. 마음은 진짜 나입니다. 이 나는 있으려고 해서 있게 된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나의 마음은 늘 존재의 근거를 다른 것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느끼며 찾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나인성 과부는 외아들의 존재감이 자기 존재의 근거였습니다. 최고로 우선적인 존재감이 내 존재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좋음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비어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공허함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희망하고 욕구합니다.

마음이 육체 안에 갇힌 상태에서는 육체로 만나는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욕구합니다. 그런데 육체가 죽으면 이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세상은 그대로 있지만 마음은 세상을 접촉할 수 있는 접촉점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12~14절에 기록된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고, 달은 피같이 되고, 별들이 땅에 떨어지고, 하늘은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산과 섬이 옮겨지는 다양한 양상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같은 상황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그대로 있지만 내 마음에서는 그동안 육체를 통해 접했던 세상을 더는 접할 수 없습니다. 음부에 들어가자마자 어떤 대상에 대해서 있음을 느끼지 못해 자기 존재의 근거를 붙잡을 수 없게 됩니다. 마치 바닥이 없는 깊은 구렁텅이로 한없이 빠져드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음을 욕구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은 육체로 만나는 세상의 대상으로부터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채우고자 욕구했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없어지자 더는 마음이 세상에 닿을 수 없기에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힌두교도나 불교도나 이슬람교도나 어린 양을 등지고 살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육체가 죽어 마음이 음부에 들어가자마자 육체로 만나던 세상은 없어집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존재감의 느낌을 통해 내 존재를 확보하려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욕구하여 채움으로써 공허함을 채우고자 합니다. 음부에서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떠올려 봅니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는 거지 나사로를 바라봅니다. 음부에 들어간 사람들은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마음이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욕구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음부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숨습니다. 사람에게는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감의 대상이 필요하고 채움을 위한 좋음의 대상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보자마자 피하게 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수풀 뒤에 숨었던 것처럼 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경악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감동을 따라 평생을 산 사람의 마음은 새카맣게 더러운 상태입니다. 빛이시고 영이신 하나님만이 들어오셔야 될 마음이 물질세계에 있는 세상 것들에 닿음으로써, 세상이 스며들어와 덕지덕지 붙어서 새카매질 정도로 더럽고 부패하고 썩어서 문드러져 악취가 나는 상태입니다. 육체로 덮여있을 때는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세수를 하거나 목욕을 하고 거울을 보면 나름대로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생을 육체가 진짜 자기인 줄로만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껍질이 벗겨지듯이 육체를 벗고 보니 진짜 내 모습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27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어린 양을 등지고 하나님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에 대해 로마서 313절에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마음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상태입니다. 육체의 껍질이 벗겨지고 드러난 영인 내 마음은 새까맣게 더럽혀져 있고 부패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상태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음부에 들어간 상태에서도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느껴서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때 보이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보석빛의 총합과 같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음부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받아들여서 존재의 근거로 삼거나, 하나님의 좋음을 받아들여서 채울 수 있도록 가까이 접근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보면서 자기에 대하여 느끼는 수치심이란, 마치 대낮에 명동 한복판에서 발가벗긴 채 기둥에 묶여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보다 몇백 배는 더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5~16절을 보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어린 양에게서 나오는 진노가 언급됩니다. 그러나 그 좋으신 하나님의 얼굴에서 진노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진노는 자기 자신을 향한 감정입니다.

음부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비로소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존재감과 욕구의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의 모습으로는 단 한 걸음도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 대해 좌절감과 수치심과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 모습이 어찌하여 이런 모양이 되었는가? 어떻게 이러한 모습으로 진짜 유일한 있음이시고 진짜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는가?’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너무너무 부끄럽고 화가 납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진노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자기의 수치심과 좌절감을 견딜 수 없어 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간혹 참으로 불행한 소식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결혼식 같은 행사 때문에 온 가족이 같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어린 양을 등지고 살던 사람들이었다면 죽는 순간에 예외 없이 동시에 음부의 로비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입니다. 이때 이들은 본문에 기록된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사실로써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육체를 벗었기에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자녀도 아닙니다. 모두 알 마음이 되어서 네 명이 마주하게 되었을 때 부모였던 자들은 자녀였던 자들의 새카만 더러움과 부패와 악취에 대해 기절초풍할 것입니다. 자녀였던 자들이 더럽고 악취 나는 상태로 다가오려고 해도 도망치려 할 것입니다. 실제로는 다가갈 일도 없을 것입니다. 자녀였던 자들 또한 새카맣게 더러워진 부모였던 자들의 마음을 보며 어쩌면 저렇게 더럽고 악취 나는 괴물일 수 있을까?’라고 하며 깜짝 놀랄 것입니다.

육체를 벗고 나면 부모도 아니고 자녀도 아닙니다. 껍데기 속에 담겨있던 알 마음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들이 동시에 죽어서 음부의 로비에 들어갔다면 내가 어떻게 저런 존재를 좋다고 마음에 받아들였을까?’라고 놀랄 것입니다. 생전에 그렇게 사랑하며 아까워하며 애지중지하며 애틋해하며 마음에 담았던 가족이지만, 실은 빛이시며 영이신 하나님만 들어오셔야 하는 마음에 씻을 수 없는 더러움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정신 차리라는 의도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남편과 내 아내가 소중할 수 있습니다. 내 자녀가 소중할 수 있습니다. 내 부모가 소중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를 대단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육체 안에 갇힌 마음은 육체의 감동을 따라 세상 것들에 닿아서 반응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세상 것들이 스며들어서 마음을 더럽힙니다. 이 상황은 육체의 껍데기가 벗겨지는 순간 수치심과 좌절감으로 변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진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게 아닙니다.

재림 때가 되면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 이전에 이미 음부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은 어린 양의 진노로 여겨지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양이 진노해 봐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은 수정 같은 유리 바다도 보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죽임당함을 알게 됩니다. 어린 양과 함께 육체의 감동에 맡겨졌던 내가 날마다 죽어야 했던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날마다 어린 양과 함께 죽었다면 수정 같은 유리 바다에 알 마음이 들어가더라도 투명성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깨끗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양은 따로 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린 양을 보면서 치밀어 오르는 후회가 너무 커서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가 됩니다. 새카맣게 썩고 문드러져 악취가 나는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며 자기를 때려눕혀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 될 것입니다.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후회와 수치심과 좌절감이 자신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분노가 되어서 뒤덮게 됩니다. 17절을 보면 이러한 상태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을 향해 살던 사람과 어린 양을 등지고 살던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린 양을 향해 살던 사람은 육체에 감동되어 세상에 물든 세상 친화적인 죄성을 봅니다. 육체가 살아있을 때 자기의 괴물 됨을 증오합니다. 새카맣게 더러워지고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나는 자기의 마음이 너무너무 싫어서 자기에게 분노합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갈가리 찢어 죽이도록 내어준 사람들입니다. 이와 반대로 어린 양을 등진 사람들은 육체가 죽은 다음에야 자기를 증오하고 자기에게 분노합니다. 이 차이가 엄청납니다. 육체가 죽은 다음에 자기의 괴물 된 모습을 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자기를 채찍으로 치고, 창으로 찌르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사지를 못에 박듯이 증오하고 분노하면서 영원히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후렴구처럼 따라붙는 내용이 있습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는 말씀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를 갑니까? 누구에게 분노해서 이를 갑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입니다. 육체가 죽은 뒤에 드러나는 알 마음은 자살하듯이 자기를 죽일 수도 없습니다.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좋음인지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 조금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어린 양을 등졌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 양의 진노는 살아있는 동안 어린 양을 향해 살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입니다. 자기 자신이 격랑처럼 일어나는 분노이자 후회를 견딜 수 없음을 어린 양의 진노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15~16절을 보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빛이시고 영이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보게 되면서 갖게 되는 후회와 수치심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최고로 좋게 여길 일은 자기 자신을 갈가리 찢어 죽이는 것입니다. 바위가 깨어져서 쏟아져 깔려 죽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입니다.

 

앞서 계속해서 흰 옷이 언급되었고,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의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는 동안 육체에 감동되어 휩쓸려가는 자신의 괴물 된 모습을 싫어하여, 날마다 어린 양 죽음의 자리에 자기를 내어주며 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잠시동안 쉬라고 하십니다. 육체의 죽음이 잠자는 것으로 표현되는 상황입니다.

계시록은 우리에게서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계시한 책입니다. 그중에서도 본문에서는 어린 양을 등지고 육체에 감동되어 살다가, 세상이 스며들어서 새카맣게 더러워져 악취가 나는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일어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든 생판 남이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라고 언급된 바와 같이 예외가 없습니다. 어린 양을 등진 채 육체의 감동을 따라 사는 자기의 모습이 싫어서, 십자가에 도살당하도록 날마다 내어주는 삶을 살지 않은 모든 자들이 실제로 겪게 되고 만나게 되는 상황입니다.

어린 양을 향하고 살던 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이 주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잠시 동안 하나님 품에서 잠잘 것입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어린 양을 등지고 살던 자들은 자기의 알 마음의 상태가 새카맣게 더러워지고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져 시체 냄새가 나는 존재임을 깨닫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악몽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갈가리 찢어 죽이는 것이 가장 최고의 일인데 그나마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잠이 들면 어떤 잠을 잘지는 자명합니다. 악몽 속에서 이미 지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을 자다 가위눌려서 으악 소리를 지르며 온몸이 식은땀에 젖은 채로 잠에서 깨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음부에 들어서자마자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어린 양을 보면서, 좌절과 수치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를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갈가리 찢어서 죽이고 싶겠지만 그것은 살아서 할 일이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십자가를 보면서 했을 그 일을 죽어서 하게 되며, 이 모든 상황을 확인하며 예수님 재림 때까지 시간 밖으로 나가 잠들 것입니다. “악몽 같은 현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린 양을 등진 자들이 마주할 현실은 그 자체로 악몽입니다. 깨어나면 꿈으로 끝나기만을 소망하며 몸부림을 치지만 현실인 악몽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벌이라기보다는 육체의 감동을 따라 산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겠다고 만드신 영인 마음을 물질적인 세상 것으로 채우겠다고 시도하는 동안 스스로 더럽혔습니다. 스스로 썩게 했습니다. 스스로 악취가 나게 만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과 어린 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음을 느끼며 분노와 후회와 수치와 좌절을 느낄 것입니다. 이 분노와 후회와 수치와 좌절이라는 자기 증오의 격랑을 이기지 못하는 상태임을 스스로 알고서 잠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을 주셔서 수치와 좌절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좋으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십자가에 죽임당한 어린 양을 확인하고 나서 자기의 더럽고 악취가 나는 괴물 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극복할 수 없음에 대한 자기 분노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수치심은 곧 두려움으로 이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던 것과 같습니다. 극단의 수치심은 그 상황 자체가 극단의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벌을 주시기 때문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 양 십자가를 등지고 살았기 때문이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입니다. 내가 나를 향하여 진노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어린 양을 향해 죽기를 각오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음부의 로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해주시고, 육체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삶을 뚜렷이 보여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