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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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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이마에 인 쳐진 십사만 사천 교회_태승철

by 태승철 · 24-01-08 07:00 ·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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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마에 인 쳐진 십사만 사천 교회>의 줄거리 :

여섯 번째 인까지 떼신 뒤에 일곱 번째 인을 떼시기 전에 마치 삽화처럼 등장하는 계시가 등장합니다. 네 번에 걸쳐 드러난 재앙과 무관하게 흰옷을 입게 된 교인 전체가 이루는 우주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주적인 단 하나뿐인 교회를 마치 한 장의 그림을 그려 멋진 액자에 담은 듯합니다. 그리고 이마에 인침을 받은 자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그 교회가 성립하게 된 실질적인 내막을 공개하십니다.

 

 

이마에 인 쳐진 십사만 사천 교회

 

(요한계시록 7:1~12)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본문 1~4절에서는 열두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씩 총 십사만 사천 명이 인침을 받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 지파에 속한 사람이 모두 인침을 받는 것이 아닌 일만 이천 명씩만 인침을 받는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어서 9~12절은 하나님의 교회이자 예수님의 교회를 한 폭의 그림처럼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본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9~12절까지 내용은 이 시간에 다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만 앞서 언급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와 연결을 지을 수밖에 없기에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여겨 쉬지 않고 새 노래로 찬양하며, 어린 양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바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의미대로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에 응답하여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 어린 양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머무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숫자가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9절을 보면 같은 사람들에 대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고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의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표현의 차이가 생겨난 것일까요?

교회는 계시록 21~22장에 기록된 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살 사람들입니다. 다만 새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등장할 것이기에 아직 7장에서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상황은 아닙니다. 7장에서 표현되는 교회란 현존하는 교회입니다. ‘셀 수 없는 큰 무리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아벨이 제사를 드린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 예수님에게 이르렀고, 예수님 이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들의 시대를 지나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로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살게 될 모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 중에서 이마에 인침을 받는 사람들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셀 수 없는 큰 무리인 교회입니다. 단순히 오늘날 존재하는 교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아담의 타락 이후 아벨의 제사로부터 교회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아벨의 계열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중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의도적으로 하나의 설교처럼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을 거쳐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새 노래로 찬양하기를 쉬지 않고, 어린 양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여 금 대접의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리는 모든 사람이 바로 교회에 포함되는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 재림 때에 마지막으로 인침을 받는 사람까지를 포함한 한 덩어리입니다.

 

다시 9절을 보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무리에는 아벨도 있고, 에녹도 있고, 노아도 있고, 아브라함도 있으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있으며, 어거스틴 같은 교부들도 있으며, 우리도 있으며, 현시대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10절을 보면 큰 무리가 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향하여 새 노래로 찬양하는 자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4절의 말씀을 보면 교회가 성립하게 된 내막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어느 시대를 사는지, 과거에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앞으로 어느 시대에 살 것인지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태어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인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무척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사는 모습을 한참 관찰하시다가 이 사람은 인을 칠만하다.’라고 생각하셔서 이마에 인을 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인침 받을 사람을 정해두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흰 옷의 승리를 이루고 종려나무의 승리를 바탕으로 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들이 교회에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교회에는 부흥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이마에 인침을 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들을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의식이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붙잡고,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이 세상 것들에 마음이 닿지 않게 한 자들에게는 흰 옷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흰 옷을 입은 자들은 어린 양과 함께 부활 승천의 길을 따라, 이 세상 것에 마음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이자 마지막 상대자로 대합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 마음이 세상에 스며들어서 시커멓게 더러워지고 악취가 나는 상태임을 발견한 자들입니다. 육체가 죽고 나서는 이미 늦습니다. 살아있을 때 자신의 더러움을 싫어할 수 있어야 십자가에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주홍 같은 죄악은 흰 눈처럼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흰 옷이 상징하는 내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보혈로 씻김 받아 깨끗해진 내 마음이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를 늘 기억함을 통하여 세상과 닿지 않게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어린 양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만을 닿게 합니다. 이처럼 흰 옷은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이 세상을 이긴 표시입니다. 세상의 있음을 이겨서 하나님의 있음만을 의식하고, 세상의 좋음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는 상태를 유지한 승리의 표시인 것입니다.

이어서 종려나무 가지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모습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마찬가지로 흰 옷을 입은 자들이 든 종려나무 가지는 왕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환영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영했던 나귀 새끼를 타고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죽임을 당함이야말로 왕으로서의 승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과 저주에 빠진 세상에서, 몸의 소중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관철해 나가심으로써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에 대한 환영이자 그 승리를 내 것으로 받아들임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를 내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흰 옷을 입는 승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나는 승리했다!’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든 것은 예수님의 승리를 받아들였기에 나는 승리할 수 있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든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1~4절에서는 이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와 승리의 토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받아들이고 환영할 수 있었던 내막이 등장합니다. 이 내막이 있었기에 우리는 십자가가 내 생애의 가장 귀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 내막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이마에 인을 치심입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카우보이들이 소유권을 표현하는 인장을 쇠로 만들어 불에 달궈서 말이나 소의 엉덩이에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없어지지 않는 자국을 만드는 것이 인을 치는 것입니다. 흔히 양심에 화인 받은 자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곧 마귀에게 인을 받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마에 인을 치신다는 것은 이와는 반대의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제 이마에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을 치신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이렇게 인침을 받은 자들만이 흰 옷이 상징하는 승리가 가능하고, 종려나무 가지가 상징하는 십자가 승리를 내 것으로 받아들임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침을 받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이마에 인침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종려나무 가지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치르신 전쟁의 승리를 내 것으로 환영합니다.’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생애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승리인 것을 알고 환영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하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에서의 흑자를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병을 앓던 사람이 낫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들이 느끼는 승리의 의미는 다릅니다. 승진이 안 돼도, 병이 들어도, 자녀들이 별 볼 일 없어도 실패라는 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만을 내 생애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승리로 여겨서, 십자가만을 의식하고 십자가만을 붙잡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고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마에 인을 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불도장을 받아서 하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갑니다. 돈 많이 버는 것을 승리라고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에 우리 또한 돈 많이 버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죄성을 가졌기에 육체 친화적이고 세상 친화적인 악을 뿜어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과거가 되어버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장 위대한 일이며 가장 위대한 승리로 붙잡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이유를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상식과 논리로는 그 어떤 측면에서도 십자가만을 위대한 승리로 여기고 십자가만을 붙잡으려 아우성을 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막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장을 만드셔서 우리 마음에 지워지지 않도록 인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성에 의해서 육체 친화적이고 세상 친화적인 죄악 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 된 모습이 드러날 때마다 그러한 나를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나의 죄성을 증오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분노하며 십자가를 향하고, 십자가만이 생명줄임을 알고 이를 악물고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마음에서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않은 모든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이를 악물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육체 친화적이고 세상 친화적인 죄성이 끊임없이 발현되는 나를 지독하게 미워하면서, 그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려 하지 않고 평생의 과업으로 삼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침이 없다면 목사라도 소용없습니다. 장로라도 소용없습니다. 교황이든 총회장이든 신학대학 총장이든 소용없습니다. 인침을 받은 자는 십자가를 붙잡을 것이고, 인침을 받지 않은 자는 십자가를 붙잡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십사만 사천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5~8절을 보면 각 지파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유다 지파 중에, 르우벤 지파 중에, 갓 지파 중에라는 식으로 지파 중에가 반복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에 속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러나 그 선민 중에 모두가 인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각 지파 중에서 인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으로 언급된 이후에 다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언급된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사만 사천이란 문자대로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숫자를 특정한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유대 사회에서는 일종의 통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3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가리키는 하늘의 완전 숫자로 쓰이고, 4는 이 땅의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땅의 완전 숫자로 쓰입니다. 사자, , 사람, 독수리라는 네 생물이 땅을 대표하는 생물로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34를 더한 7이 완전한 숫자로 여겨졌으며, 같은 방식으로 34을 곱한 12는 충만의 숫자로 여겨졌습니다. 144,000은 충만함을 가리키는 12의 제곱인 144에 다시 1,000을 곱한 숫자입니다. 10이라는 숫자 또한 충만함의 숫자라고 여겨졌는데 1,00010의 세제곱입니다. 따라서 144,000이란 단순히 144,000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충만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함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으로 충만하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인 아담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이미 인침 받을 사람들을 정해두셨습니다. 충만함이란 하나님의 인침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 중에서 한 명도 모자라지 않고 한 명도 넘치지 않게 흰 옷의 승리와, 종려나무 가지로 상징되는 승리를 한 몸에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아벨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태어나게 될 하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의 숫자는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십사만 사천이란 한 사람도 모자람이나 더함이 없는 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마에 인을 치신 사람들만이 교인이 되어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예정적 결정에 따라서 인침을 받은 자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교회는 부흥할 수도 없고 줄어들어서 없어질 수도 없습니다. 현상적으로는 특정 예배당의 신도가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 이전에 인을 치기로 작정하신 교인들의 숫자는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습니다. 인침을 받은 자들만이 어린 양의 십자가 승리를 환영합니다. 그리고 그 환영하는 승리를 토대로 자기만의 새끼 승리를 이룹니다. 이것이 흰 옷과 종려나무 가지로 표현된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요셉, 다윗과 같은 구약의 사람들은 예수님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인침을 받아서 어린 양의 승리를 환영하고, 그 승리의 힘으로 나의 승리를 이룬 자들이 교인이라면, 예수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어린 양의 승리를 환영할 수 있었을까요? 아벨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제사가 언급됩니다.

앞서 우리는 각 교회와 관련된 기이한 초상화의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계시되고 있는 마땅히 일어날 일들의 중심축인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상징됩니다. 어린 양은 바로 구약의 성막과 성전 시절에 번제단에서 날마다 상번제로 드려지던 어린 양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입니다. 아벨의 제사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모든 제사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앞당겨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제사가 다른 이방 종교의 제사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제사는 신에게 뇌물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 시작된 성경의 제사는 내 속에 스며든 죄성과 저주를 싫어함에 기초합니다. 제물과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동일시하여 죽이는 것이 구약 시대 제사의 의미입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죽음이 성령을 통하여 그 심정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구약 시대의 제사를 드릴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제사를 통해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성령을 통하여 앞당겨져 환영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를 죽이는 제사로 드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이미 죽은 사람들도 몸이 죽었지 영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앞서 우리는 여섯 번째 인을 떼실 때 음부에 들어가는 자들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현실인 악몽 속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인이 없어지지 않고 현실인 악몽 속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다면, 아벨은 제사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앞당겨 환영하여 승리한 자로서 낙원으로 표현된 하나님 품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 죽은 자들은 잠을 자고 있는 교인이며,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교인이며, 앞으로 태어날 교인들도 있습니다. 이 교인 전체가 하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아벨이라고 하는 까마득한 옛날로부터 시작하여 언제일지 모르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나타날 마지막으로 인침 받을 한 사람까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처럼 하나님의 정하심의 숫자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꽉 차는 상태를 십사만 사천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사만 사천은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신 예정의 완전함과 충만함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셀 수 없는 큰 무리란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모든 시대에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십자가 승리를 환영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만든 경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승리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오직 십자가의 승리만을 진정한 승리로 붙잡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힘입어 개인의 승리를 이루어 나가면서 교회를 삽니다.

본문은 여섯 번째 인까지 떼신 뒤에 일곱 번째 인을 떼시기 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마치 하나의 삽화를 집어넣듯이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개의 인을 떼실 때 네 개의 재앙이 임했습니다. 네 개의 재앙과 무관하게 승리한 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가 본문을 통해 드러납니다. 계시록이 일곱 교회를 향해 쓰였다는 것은 이 계시가 결국 교인들에게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고자 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종려나무 가지로 상징되는 어린 양의 승리를 받아들이고, 그 승리의 힘으로 개인적인 흰 옷의 승리를 이룬 자들입니다. 이렇게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지워지지 않을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것으로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벨과 에녹과 노아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의 사람들임에도 하나님의 인침을 받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던 당대의 사람들조차도 십자가로 이끌림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비롯하여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불치병을 고치셨지만, 결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어린 양 예수님께 오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가장 위대한 승리로 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역사를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조차도 정작 십자가가 아닌 이 세상의 승리를 향해서 뛰어갑니다. 좀 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승리, 좀 더 돈을 많이 버는 승리, 좀 더 높아지는 승리, 좀 더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승리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침을 받은 자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이신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십자가만을 승리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승리의 힘을 가지고 흰 옷을 입게 됩니다. 끊임없는 죄성이 활성화되는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원수로 여기며 넘어질지라도 일어나면서 기필코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인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자꾸 넘어져서 마음이 세상에 쏠릴 수 있고 세상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가 싫어서 다시 십자가를 붙잡고 일어섭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앞으로 나갑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온전히 갖기 위해 생애를 십자가에 던지기로 작정합니다. 그런 마음이 드신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불도장을 찍으셨기 때문이고, 여러분의 이마에 인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이마에 너는 내 것이다.’라고 인침 받으셨음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에 있어서 세상적인 이유나 근거는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을 치시고 십자가 사건을 최고의 승리로 여기게 해주셨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승리에 근거하여 내 승리를 얻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니 이 은혜를 어떻게 다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기에 오직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감사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