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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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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에 들어가는 자들의 십자가 원한_태승철

by 태승철 · 24-01-04 08:53 · 588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낙원에 들어가는 자들의 십자가 원한>의 줄거리 :

어린 양 예수님이 두루마리의 다섯 번째 인을 떼시는데 일어나는 일은 한 마디로 '원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어린 양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죽임당한 자들의 원한입니다. 이들의 원한은 그 실체가 무엇일까요? 이들의 원한은 십자가 생활화에 연관된 원한입니다. 이 원한을 접하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십자가가 천국에서는 전혀 필요 없다는 사실입니다.

 

 

낙원에 들어가는 자들의 십자가 원한

 

(요한계시록 6:9~11)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2024년 새해에 함께 하는 오늘의 번제 첫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봅니다. 본문은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내용이지만 바로 이해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원한을 갖는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원한에 십자가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인과 여섯 번째 인은 사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인을 떼실 때에 청황색 말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었습니다. 사망은 음부를 이끌고 와서 어린 양을 새 노래로 쉼 없이 찬양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을 음부에 가두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섯 번째 인을 떼실 때에 일어나는 일은 이 음부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심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편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에 일어나는 일이란 이와는 반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양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한 상태로 하나님을 향한 금 대접의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낙원에 들어갈 때 낙원 입구에 서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대화의 내용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원한입니다.

참 이상하게 들립니다만 낙원에 들어가는 자들의 원한이란 낙원에 들어가면서 갖게 된 것입니다. 낙원은 천국행이 확정된 사람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낙원에 있는 사람들은 재림의 때에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심판대에 서게 되면 이제 천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보증을 받은 사람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는 것일까요?

 

앞서 우리는 네 생물과 연관하여 네 번의 인을 떼시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자, , 사람, 독수리의 묘사는 이 땅에 있는 동물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린 양 예수님과 연합하여 찬양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모습의 네 가지 측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섯 번째 인부터는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하며 살던 사람들이 낙원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를 마땅히 일어날 일들로서 묘사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얼른 보기에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9~10절을 보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였다는 이유에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탄원을 합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흔히 순교자로 해석합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박해를 받아 순교를 당했기에 억울한 피를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 해석은 세상 사람들이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와 저주에 장악된 생각과 상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 사람들이 으레 생각할 수 있는 길로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은 조심해야만 합니다. 상식선에서 성경을 해석한다면 성경의 내용은 완전히 변질되어 왜곡되고 뒤틀려버립니다.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하고 어린 양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향하는 금 대접의 기도를 쉬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는 순교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 일어나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본문을 단순히 순교자들의 원한이라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일어날 일들로써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하고 흰 옷을 입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잘 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좋으심이 내 것이 되었다는 경사스러움을 안고 사자처럼 당당하고, 소처럼 순종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독수리처럼 하늘을 품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순교를 당하지 않았기에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 이 사람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낙원에 들어가서 아무런 원한도 없는 것일까요? 순교를 당한 사람들만 따로 모여서 우리는 억울하게 죽었으니 이 원한을 갚아달라고 탄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본문을 보면 제단 아래에 있어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부터 오해가 시작됩니다. 제단이란 어린 양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어린 양이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언급되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린 양은 상번제로 예표 되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셨다는 언급까지 나왔기에 따로 십자가가 언급되지 않을지라도 여기서 제단이란 당연히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라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란 단순히 박해를 받아 순교를 당한 자들이 아닙니다. 순교라는 단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박해받아 순교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제단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하고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생을 날마다 어린 양과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은 순교를 당했거나 당하지 않았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4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곧 십자가 제단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순교를 당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순교 여부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의 증거를 따른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날마다 십자가 제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마태복음 2237~39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사랑은 저절로 하게 됩니다. 이웃사랑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동안에 사람을 만난다면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증거란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사건에 대한 증언입니다.

 

다만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도 원한에 대한 의문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받아들여서 내 사건으로 삼은 자들의 마음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증거를 따라 살던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해서 정말로 자기를 죽게 한 자들에 대한 원한을 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낙원에 들어가자마자 입구에서 하나님을 향해 원수를 갚아달라고 탄원을 할 수 있을까요?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시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을 돌로 내려치는 자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낙원에 들어가자, 마음을 바꿔 하나님께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 나를 돌로 친 자들에 대한 심판을 늦추실 것이며 원수를 갚아주시지 않으실 것입니까?’라고 말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계시록에서 칭찬을 받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86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순교했다고 해서 낙원 입구에서 자기를 죽인 자들을 심판하고 그들에 대한 원한을 갚아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하는 모습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석들이 이런 식의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본문을 이해하기에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상식을 따라 성경을 풀어냈을 뿐입니다.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순교라고 생각하여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받아서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하고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리며 산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낙원 입구에서 이런 탄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 말씀과 증거의 힘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저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나 폴리캅 같은 분들의 믿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억울한 일을 당하면 원한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여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하던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며 자기를 죽인 자들에 대한 원한을 갚아주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에 대한 일종의 모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굳이 이 말씀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원한이란 그런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는 탄원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하고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이야말로 생애에서 가장 위대하고 소중한 사건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환경과 삶의 조건 속에서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십자가 사건과 연합한 사람이라면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시급하고 중대한 사건은 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없다.’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하며 살았던 사람에게는 낙원에 들어가자마자 폭발하는 원한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날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를 어린 양의 죽음에 내어드림으로써 자기도 죽임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어린 양이 죽음을 당했기에 어린 양과 연합한 나도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울함의 이유입니다. 쉽게 말해 십자가 생활화가 원한의 이유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생애의 가장 소중하고 최고로 위대한 사건임을 인정하기에 십자가 생활화를 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생활화 속에 원한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한은 십자가 생활화를 왜 해야 하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 하는 이유는 육체로 사는 동안에 내 속에서 죄의 뿌리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내 속에 자리 잡은 죄와 저주의 뿌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를 쉬지 않고 찬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양의 십자가를 의식에서 놓치는 순간에 육체가 살아있는 한 내 속에서 멀쩡히 존재하는 죄와 저주의 뿌리로부터 죄악은 샘물처럼 솟아나 활성화됩니다. 그렇기에 죄악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어린 양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어린 양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나를 내어드림으로써 어린 양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단 아래에 있어라는 묘사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 양을 새 노래로 쉼 없이 찬양하며, 금 대접의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살던 사람들에게 쌓인 원한이란 바로 내 죄악에 대한 원한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한을 가져도 되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내 속에 있는 죄악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찢어 죽이고, 돌로 쳐서 죽이고, 사자 밥이 되게 해서 죽이고, 태워 죽일지라도 그것이 몸의 죽음이라면 원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죽여서 자기의 악함을 드러낸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두루마리에 쓰신 심판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한을 가져야 할 대상은 내 속에 담겨있는 죄와 저주의 뿌리입니다.

이 죄와 저주의 뿌리는 내 의식이 십자가를 놓치기만 하면 활성화됩니다. 나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 세상 피조물들의 좋음을 향하게 합니다. 흰 말 탄 자에 의하여 이 세상의 무엇인가에 꽂혀서 살게 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줄 모르게 합니다. 하늘을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며 살게 합니다. 그야말로 불상사를 가져다주기에 내 안에 있는 죄악은 원한의 대상입니다.

사람에게는 미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싫어하고 증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단 하나의 대상을 향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바로 내 속에 있는 죄와 저주입니다. 세상에는 미워할 수 있는 능력의 대상이 될 존재가 없습니다. 오직 내가 미워해야 하는 유일한 대상은 내 안에 있는 죄와 저주뿐입니다.

 

우리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십자가 생활화를 졸업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십자가 생활화를 졸업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십자가 생활화의 과정 속으로 입학을 못한 자도 있습니다. 혹은 십자가 생활화에 입학했지만 낙제하여 졸업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에 입학하지 못했거나 낙제한 모든 사람들은 음부로 가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볼 여섯 번째 인에서는 그들이 어떤 심정인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죽음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졸업할 때 드러나는 원한은 죄와 저주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하루라도 빨리 예수님의 재림이 임해서 죄와 저주의 뿌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놓칠까, 아버지를 잃을까, 아버지가 의식에서 사라질까, 아버지가 마음에서 무시될까 벌벌 떨며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하는 삶이 끝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대로 아버지를 잃어버릴 걱정 없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를 붙잡고 생활화하는 인생의 모든 순간에 쌓였던 원한입니다. 완전히 죄가 없는 상황에서 십자가를 붙잡지 않아도 아버지를 잃어버리지도 않고, 잊어버리지도 않으며 아버지를 가지고 사는 삶이 시작되기를 바라기에 죄와 저주에 대한 원한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서 활성화되는 죄악을 바라보며 그 죄를 죽이기 위하여 십자가를 붙잡고 생활화합니다. 죄와 저주의 뿌리는 육체가 살아있음으로써 없어지지 않고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 죄와 저주의 뿌리를 상관하지 않으며 언제나 살 수 있을까?’라는 심정이 우리의 원한의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원한에 사무친 소망을 갖고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계십니까? 이런 원한에 사무친 소망 속에서 어린 양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 죄와 저주 속에서도 하나님을 잃지 않게 해주는 어린 양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습니까?

천국에서는 십자가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보배 되시는 하나님을 절대로 잃지 않아야 되기 때문에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낙원에 들어가는 자들은 이렇게 자기 속에 있었던 죄와 저주에 대한 원한을 토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11절을 보면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원한을 토로하는 자들에게 내 품에 안겨 잠시 동안 쉬어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들 중에는 이미 낙원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저주를 제어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만을 목적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사람들을 품에 안으시고자 하십니다. 그때까지는 땅에 살던 모든 자들을 심판하는 재림은 임하지 않습니다. 낙원에 들어간 자들은 그동안 하나님 품에 안겨 잠을 자며 쉬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심판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고, 그때는 그렇게 소원하던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만으로 사는 날이 곧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흰 두루마기는 내 속에서 끊임없이 들썩거리는 죄악의 힘을 십자가로 이기면서, 이 세상이 마음에 스며들지 못하게 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하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잠시 동안 쉬고 있으라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 어린 양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를 있는 힘을 다해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써먹을 때마다 반드시 내 속에 있는 죄와 저주에 대한 원한을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죄와 저주는 아버지를 잊게 합니다. 아버지의 좋음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합니다. 피조물의 좋음을 좇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내 속에 있는 죄와 저주에 대한 원한을 쌓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죄악의 뿌리가 담겨 있는 육체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고 내가 소원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한은 이 소원이 지연되고 있음에 대한 원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육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입니다. 육체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죄와 저주에 대해서 십자가를 붙잡는 싸움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좋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는 죄악 때문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입술이 부르텄습니다. 화면에 나올 때마다 굉장히 신경에 거슬렸는데 연고를 발랐더니 서너 번 만에 싹 나았습니다. 연고는 고맙지만 입술이 터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가장 고마운 사건입니다. 우리의 죄와 저주의 뿌리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와 저주의 뿌리를 담고 있는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인 십자가가 전혀 필요 없는 삶에 대한 소원이 우리의 원한이 되어야만 합니다.

죄와 저주는 우리의 원한이 되어야 하는 아픔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라는 연고가 필요합니다. 입술이 터질 때 연고를 바르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사용할 때마다 죄와 저주의 뿌리가 사라진 신령한 몸을 입고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한 소망이 원한으로 자리 잡을 만큼 강렬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강렬한 자들이 바로 어린 양을 쉼 없이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가 너무나 고마운 이유는 내 죄와 저주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끊임없이 어린 양과 함께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삶에 대해서 원한을 가져야만 합니다. 십자가 없이도 아버지를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삶을 하루빨리 살기를 원하는 소망으로부터 죄와 저주에 대한 원한이 생겨납니다. 이 소망이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마다 쌓이고 쌓여서 낙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 앞에서 펑펑 울며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나 이제 십자가가 필요한 인생을 졸업합니다. 이제 아버지를 잃지 않고 사는 삶이 하루빨리 오기만을 바랍니다. 평생 십자가 붙잡고 내 안에 있는 죄악과 싸우는 삶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은혜로 십자가를 붙잡고 내 속에 있는 죄악을 이기는 삶을 살았고 흰 두루마기를 보증으로 주시오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로 사는 생애 동안에 십자가 없이도 아버지를 잃지 않는 삶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던 자들만이 아버지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쌓인 원한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와 저주의 힘이 뿌리를 둔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만큼 고마운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붙잡을 때마다 죄악과 저주와 싸우는 일 없이도 아버지를 잃지 않는 삶을 그리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의 원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