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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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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어린 양 방패 없으면 당하는 맹공격_태승철

by 태승철 · 24-01-01 10:14 · 601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어린 양 방패 없으면 당하는 맹공격>의 줄거리 :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의 내용은 어린 양이 인을 하나씩 뗄 때마다 펼쳐집니다. 앞에 나오는 네 개의 인은 네 생물과 맞물려 벌어지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붙잡지 않아서 방패가 없는 자들에게 속수무책의 상태에서 퍼부어지는 맹렬한 무차별적인 공격이 묘사됩니다. 어린 양을 등지고 산다는 일이 어떤 참담함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일인지가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어린 양 방패 없으면 당하는 맹공격

 

(요한계시록 6:1~8)

 

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방패가 되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차별적인 맹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2023년 마지막 날입니다. 돌아보건대 우리는 이 땅에서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중 어느 정도를 이루며 살았을까요?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에는 나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이루어질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족의 평생 일도 기록되어 있으며, 제가 사는 강릉 시민 모두의 평생 일도 기록되어 있으며, 대한민국과 일본과 북한과 중국과 바다 건너 미국과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에 이르기까지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생에 일어나야 할 모든 일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상 80억 인구 중에 2023년을 살면서 하나님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대로 산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없었던 이유는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내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자 가장 소중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을 향한 찬양을 끊임없이 하지 않았기에 두루마리에 기록된 일들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린 양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중심축이십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찬양이 중단되는 순간 어린 양을 등지게 되고, 하나님께서 두루마리에 기록하신 내용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과 나라와 민족의 모든 일들을 두루마리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일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날마다 어린 양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중심축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와 관련된 내용이 소개됩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두루마리에는 나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80억 인구와 200개가 넘는 나라와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내용을 계시록에 다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중심축이신 어린 양 예수님을 기준으로 할 때, 세상에는 예수님을 향해 있는 자와 예수님을 등지고 있는 자가 함께 살아갑니다. 본문은 그중에서 개인과 민족과 나라와 역사의 중심축이신 어린 양 예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개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종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살아가는 처지가 다를 수는 있지만 어린 양을 등지고 있다면 공통적 특징을 드러내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특이한 모습이 묘사됩니다. 일곱 인 중 네 번째 인까지를 떼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네 생물이 순서대로 등장하며 말 탄 자들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을 떼는 모습이 기록된 1~2절을 보면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탄 자들은 네 생물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자 같은 모습의 생물이 흰 말을 탄 자를 불러냈다는 것은, 사자처럼 살지 못한 자들에게 공격이 가해짐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 예수님을 쉼 없이 찬양함으로써 마음이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를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자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마음이 궁극적인 좋으심의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세상적인 좋음에 대해서 굴복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는 돈이나 건강을 최고로 좋은 가치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자 같은 사람은 돈이나 건강이 있든 없든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좋음이 없는 자와 같은 티를 내지 않습니다. 돈이나 건강에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사자처럼 당당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한편 어린 양을 등질 때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끊임없이 이 세상 것을 향하여 좋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실제로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린 양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흰 말을 탄 자에게 화살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흰 말을 탄 자가 면류관을 받고 싸운다는 것은 승리가 보장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흰 말을 탄 자의 승리란 어린 양을 등지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로 궁극적인 좋음을 가질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또 활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활은 화살로 한 사람을 겨냥해서 쏘는 도구입니다. 하나의 화살은 한 사람을 맞출 뿐입니다. 이는 곧 사람의 좋음이 하나의 대상을 향할 수밖에 없음을 상징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독하게도 자녀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독하게도 손주들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독하게도 돈을 좋아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지독하게도 예배당 건축을 좋아합니다. 흰 말을 탄 자의 화살이 꽂혔기 때문입니다.

흰 말을 탄 자는 어린 양을 등지고 있는 자들이 궁극적인 좋음이신 하나님께 절대로 돌아설 수 없도록 이 세상의 어떤 일에 마음이 꽂히게 합니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듯이, 흰 말을 탄 자의 화살이 꽂히면 세상의 가치가 마음에 꽂히게 됩니다. 마음에 자녀가 꽂히고, 돈이 꽂히고, 건강이 꽂히고, 승진 등이 꽂힙니다. 어린 양을 등진 상태에서는 궁극적인 좋음이신 하나님을 절대로 향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어린 양을 그토록 싫어하고 거부하고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는 절대로 좋음이 될 수 없는 세상 것들을 궁극적 좋음으로 착각하며 그것에 꽂혀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좋음이 없으니 평생 공허하게 살게 됩니다. 이것은 어린 양을 등지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어린 양이 방패가 되어주시지 않는다면 마음이 세상의 무언가에 꽂히게 됩니다. 절대로 좋음일 수도 없고, 만족일 수도 없는 것들에 꽂혀서 끌려다니게 됩니다. 어린 양을 등졌다면 반드시 이 세상의 가짜 좋음이 마음에 꽂힙니다. 이것은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을 좋아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흰 말을 탄 자가 그 사람의 마음에 돈이라는 화살을 꽂을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흰 말을 탄 자의 승리란 어린 양을 등진 모든 사람이 절대로 만족할 수 없고 절대로 좋음을 찾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을 떼는 모습이 기록된 3~4절을 보면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우리는 둘째 생물이 송아지로 묘사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생물이 붉은 말을 탄 자를 불러들입니다. 붉은 말을 탄 자는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소는 순종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코뚜레를 꿰어 줄을 매면 주인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여 따릅니다. 우리가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어린 양을 향하여 쉼 없는 찬양을 할 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인생 최고의 사건으로 삼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뉴스에서 무슨 사건을 듣든지, 설령 지구가 두 쪽이 나더라도 어린 양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며 마음에서 끊임없이 찬양할 때 이 땅에서의 삶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소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어린 양을 등진 자들에게서는 붉은 말을 탄 자가 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자기를 굽히지 않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내 주장, 내 바람, 내 생각, 내 계획, 내 뜻이 붉은 빛으로 활성화되어 활활 타오릅니다. 내 주장을 불태우는 사람들끼리 만날 때는 절대로 화평할 수 없습니다.

흔히 세 사람만 모이면 싸움이 난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어린 양을 등진 자들의 마음에 칼을 쥐여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칼은 바로 내 주장이고 내 판단입니다. 판단(判斷)이라는 단어의 판가름할 판()은 칼로 절반을 자르는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내가 판단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모든 것을 칼로 잘라 두 쪽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내 판단이 확고한 상태에서 화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칼을 쥐여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여 너 없으면 못 산다고 여겨 결혼했으면서 이혼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 그렇게 배우자에 대한 불만이 생기고 싸움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어린 양을 등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기운으로 상징되는 붉은 말을 탄 자가 칼을 쥐여주고 있습니다. 어린 양을 향하는 사람은 스데반 집사님처럼 설령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화평과 평강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을 등지고 있는 한 화평은 없습니다. 내 주장과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계획과 내 뜻이 붉게 빛나며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들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기름을 붓는 것처럼 더 활활 타올라 분노합니다. 이것이 어린 양을 등지고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칼의 효과입니다.

큰 칼은 살인을 위한 도구입니다. 내 주장이 활활 타오르는 사람들끼리 만나 갈등할 때는 저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음에서 살인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등진다면 예수님이라는 중심축을 잃은 효과가 내 생각과 내 주장을 붙잡게 됩니다. 그럴 때 내 생각과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있음을 제거하는 살인이 실제로 벌어지는 현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8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내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살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 양을 등진 자들은 마음에서 끊임없이 살인하며 인생을 채워갑니다. 큰 칼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어린 양을 향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제거해 버림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을 등진 자들에게서는 주인의 뜻을 받드는 소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내 주장을 불태우며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마음에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내 어린 양을 향할 수 없고 주인의 말을 따라 살 수 없게 만드는 죽음입니다.

 

세 번째 인을 떼는 모습이 기록된 5~6절을 보면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인격성을 상징합니다. 셋째 생물은 검은 말을 탄 자를 불러냅니다. 검은 말을 탄 자는 손에 저울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저울은 어린 양을 등진 모든 사람의 마음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 밀가루 1리터의 무게는 800g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것에 한 데나리온이라는 가치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근로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우리 사회를 기준으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평균 20만 원이라고 해보면 고작 밀가루 800g20만 원에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밀 한 되에 한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평균 가격의 12~16배나 되는 비싼 가격으로써 엄청난 기근의 상황을 가리킵니다.

어린 양을 등진 자는 마음속이 견딜 수 없는 가뭄으로 인한 기근으로 꽉 차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등지면 재벌 회장이나 사장님도 마음이 기근으로 충만합니다. 대학 총장님도 마음이 기근으로 충만합니다. 판검사나 변호사도 마음이 기근으로 충만합니다. 이렇게 기근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흔히 정의는 올바른 저울로 상징됩니다. 기근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있어서 타인을 대할 때의 정의는 항상 부당합니다. ‘내가 너에게 밀가루 800g을 줄 테니, 너는 나에게 20만 원을 내놓아라.’라고 하는 부당함을 정의라고 말하는 상태입니다. 어린 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의 마음은 기근으로 충만합니다. 이 무지막지한 기근으로 인한 마음의 굶주림은 사람을 사기꾼, 약탈자, 착취자, 포학자로 만듭니다. 어린 양을 등짐으로써 마음이 하늘로 올라감이 중단되고 하나님을 가지는 역사가 중단된다면 이러한 모습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성향을 교양으로 숨기고, 내 이익을 위하여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정의가 없기에 사람과의 관계에도 풍요로움이 없습니다.

어린 양을 향한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그 마음이 어린 양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좋으심을 직면한 상태에서 그 좋으심을 흡수하고 받아들이며 소망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바람이 없어집니다. 어린 양을 향하고 있는 자에게 정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만나는 사람을 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또한 어린 양을 등지는 삶을 살았던 때에 이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밀가루 800g을 줄 테니, 너는 나에게 20만 원을 내놓아라.’라는 부당한 거래를 정의로 여기는 이상한 저울을 가지고 살았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항상 타인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은 밀가루 800g인데 바라는 것은 20만 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모든 사람에 대해서 불만과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 양을 등지고 있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닙니다. 검은 말을 탄 자가 기근으로 충만한 마음속에 저울을 주었기에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 저울은 약탈자의 저울이며, 강도의 저울이고, 사기꾼의 저울입니다. 이러한 저울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말은 새까만 거짓말입니다. 진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어린 양을 등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잘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인을 떼는 모습이 기록된 7~8절을 보면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생물은 독수리의 모습을 하였습니다. 이 생물이 청황색 말을 탄 자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사망입니다. 이 사망은 영혼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둘째 사망이 아닌 육체가 죽는 사망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사망 뒤에 음부가 그 뒤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음부로 직행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독수리가 의미하는 바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하늘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 하늘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어린 양 예수님을 향하여 찬양이 중단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사는 동안 가질 수 있는 것 중에 하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내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이고 궁극적으로 유일하게 큰 사건인 것을 찬양할 때 하늘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어린 양을 향하지 않고 하늘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산다는 것은 음부가 사냥을 하는 상황입니다. 육체가 죽자마자 음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음부의 반대는 낙원으로써 아직 천국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343절에서 십자가 한쪽 편에 있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가 죽은 뒤에 가는 낙원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잠을 자는 곳입니다. 4차원의 세계를 3차원의 언어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뒤의 상황이 다양하게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만 아버지의 품에서 잠자는 상태나 낙원은 동일하게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와 반대로 어린 양을 등짐으로써 하늘을 갖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는 사람은 곧바로 음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참고로 네 번째 인에 대한 이야기가 마쳐진 뒤의 이야기는 죽은 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네 생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네 생물은 땅에서 사는 하나님 아들들의 모습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네 생물이 불러낸 네 마리의 말을 탄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을 띠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에 임하는 일들입니다.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쉽게 오해됩니다. 땅의 짐승들로써 죽인다고 하니 그 자체로 어떤 형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사잣밥이 되어 죽었던 믿음의 선배들은 형벌을 받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검에 죽고, 흉년에 죽고,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인다는 내용은 단순히 형벌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사람이 죽게 되는 다양한 이유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었다는 부분입니다. 왜 하필이면 사분의 일일까요? 어린 양을 향하지 않는 모든 자는 육체가 죽자마자 음부의 사냥감이라도 된 듯이 음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잠들어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깨어나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음부는 지옥의 대합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옥의 대합실에 들어간 상태에서는 변개함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분께서 저에게 메일을 보내신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백 세까지 장수하시며 교인으로 평생을 사셨는데, 손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명목상의 교인으로만 사셨을 뿐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 삶을 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께서 재밌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할머니의 죽음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분은 할머니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고 돌아가셨음이 너무 두렵고 안타까우셨기에 할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이러한 질문을 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무서운 상황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보자면 어린 양을 향하지 못한다면 육체가 죽은 뒤에 음부가 곧바로 걷어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나 배우자가 어린 양을 향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는데 음부가 낚아채는 상황을 상상해 보신다면 끔찍할 것입니다. 예배당에 출석한다는 사람들 중에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어린 양을 향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생각해 보면 우리와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에서는 면죄부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산 자들이 면죄부를 사거나 헌금을 많이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가기 위해 연옥에 있던 영혼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어린 양을 향할 수 있는 기회는 몸이 죽기 전까지입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자녀이고 배우자이고 부모님일지라도 어린 양을 향하지 못한 채로 살았다면 죽자마자 곧바로 음부의 아가리에 삼켜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분의 일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참혹한 상황이 주어지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 생각해 봅니다. 사실 우리는 어린 양 예수님을 빼면 전부 음부로 들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청황색 말을 탄 자가 사분의 일의 권세를 받았다는 것은, 반대로 사람들이 음부로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마음 사분의 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넷이라면 그중에 셋은 사랑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어린 양 예수님을 향해 쉴 새 없는 찬양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으로 당신이 정해 놓으신 죽음 이전까지의 사람들을 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바로 이렇게 네 인을 떼는 것과 같은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흰 말을 탄 자, 붉은 말을 탄 자, 검은 말을 탄 자, 청황색 말을 탄 자는 어린 양을 등진 자들에 대한 공격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사분의 일 이외의 사분의 삼이 의미하듯이, 죽기 전까지 사람들의 마음이 어린 양으로 돌아서기를 바라심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2023년 마지막 날을 보냅니다. 어린 양을 향하여 얼마나 찬양이 쉬지 않고 살았는지 우리를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경험 속에서 어린 양을 등졌을 때 이 세 가지 공격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네 번째 공격이 일어나기 전에 온전히 어린 양을 향해서만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