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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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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 향한 찬양과 기도가 인생 열쇠_태승철

by 태승철 · 23-12-30 09:50 · 312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어린 양 향한 찬양과 기도가 인생 열쇠>의 줄거리 :

일찍이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이 온 세상을 이끄시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 섭리의 중심축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어린 양 예수님을 향하여 쉬지 않고 찬양하며 기도하면서 교회를 사는 모든 성도가 다 자기 몸을 중심축으로 하여 맺어진 관계 영역의 중심축이 됩니다. 어린 양 예수님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이 내 안으로도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 향한 찬양과 기도가 인생 열쇠

 

(요한계시록 5:8~14)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지금 여러분의 삶이 큰 문제없이 흘러간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이 세상에 스며들고, 세상이 내 마음에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환경적 문제가 없는 그 상태를 문제로 여길 수 있는 시각이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이 세상에 물들겠구나. 마음이 세상에 스며들면 하나님의 영롱한 보좌의 빛이 내 안에 들어오는 대신에, 세상의 축축한 물감이 들어와서 마음은 시커멓게 되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여러분의 삶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면 새삼스럽게 문제의식을 챙길 필요가 없이 문제의식은 주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안정된 상태에서 마음이 세상에 스며들고 세상에 취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 눈에 띄게 삶의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는 모든 순간에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가 있습니다. 그 마스터키는 바로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을 향하여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어린 양을 향한 찬양과 기도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돈 문제가 생겼다면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어린 양을 향하여 찬양과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 문제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문제에 해당됩니다. 말씀드렸듯이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마음이 세상에 스며드는 진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순간에 어린 양을 향하여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 양을 향한 찬양과 기도는 인생의 열쇠가 됩니다. 인생의 평강을 저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하늘의 의미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어린 양을 향하여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그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8절을 보면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이 보좌 앞으로 가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는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거문고로 노래하고, 금 대접을 가지고 성도들의 기도인 향을 올립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네 생물은 내 마음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상징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보좌 우편에 이를 때는 보좌에 가장 근접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보며 거룩하심으로 표현되는 궁극적 좋음을 노래하게 됩니다. 그 궁극적인 좋음이 나의 좋음이 되었고, 그 좋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경사스러움을 노래하는 자들이 네 생물입니다. 이처럼 네 생물은 예수님이 독생자이신 것처럼 내게도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다움이 벌어지는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의 마음이 아들다움의 모습을 유지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십사 장로는 온 세상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직접 뽑아서 선택한 사람들이며, 또한 마찬가지로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과 유일한 좋음의 대상과 유일한 주체성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네 생물이 하나님의 아들다움을 묘사했다면, 이십사 장로는 흰 옷을 입고 면류관을 썼다는 의미대로 하나님의 선민다움에 대한 묘사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자들은 네 생물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다움을 드러내게 되고, 이십사 장로와 같이 하나님의 선민다움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성도이고 날마다 교회를 사는 교인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어린 양을 향하여 거문고로 노래합니다. 여기서 어린 양을 향한 거문고 찬양이란 예배당에서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각종 악기로 하는 찬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돈을 최고로 좋아하는 사람은 입만 열면 돈 이야기를 합니다. 또 자녀가 소중한 부모는 입만 열면 자녀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찬양은 곡조를 따라 불러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제일 좋아하는 것을 입에 달고 사는 상태가 찬양입니다.

이로부터 어린 양을 향한 거문고 찬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몸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소중한 일이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사건을 가장 위대하고 소중한 일로 여겨서 입만 열면 어린 양 이야기만 하는 상태가 바로 어린 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돈 돈 하고,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입만 열면 대통령 대통령 하는 것처럼, 입만 열면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어린 양을 향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의식에서 놓거나 끄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항상 유지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지금 내 몸이 처한 환경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로 상징되는 아들다운 아들이자 선민다운 선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금 대접에 향을 담았다는 것은 구약시대 성전의 분향단을 연상시킵니다. 분향단의 연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기도를 상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린 양을 향한 기도 또한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존재감을 느껴야만 하고, 채움을 위하여 욕구해야만 하며, 주체성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 어린 양과 더불어 연합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금 대접에 담긴 향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도하며 삽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어린 양을 향한 기도가 금 대접에 담긴 향으로 상징되는 이유는, 어린 양을 향한 기도만이 하나님을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좋음만이 내 마음을 채워주시고, 이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체성이 되심을 잊지 않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기도이며 가장 좋아하시는 기도입니다. 오직 어린 양을 통해서만 이 기도가 가능하기에 금 대접에 담긴 향으로 상징된 것입니다.

 

이어서 9~10절을 보면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을 바라보며 하는 노래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입니다.

이 노래가 새 노래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린 양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루신 연쇄 과정은 언제나 지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 예수님에 대한 노래는 이미 일어난 일 속에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지금의 사건입니다. 지금 처음으로 일어난 것 같이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십자가를 의식하고 바라보는 그 순간마다 마치 처음처럼 십자가 사건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 시간적으로 완료된 사건이지만 나와의 관계에서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언제나 지금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다. 나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이 세상에 대해 번제물처럼 각이 떠진 채로 십자가 번제단에서 죽은 자다.’라고 생각할 때 예수님과 연합하는 일은 언제나 지금 일어나는 일이 되기에 새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이어서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거문고로 어린 양을 찬양하며, 어린 양을 향해 금 대접의 기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독생자의 자리까지 와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다움과 선민다움이 이루어질 때, 이 땅에서는 어린 양 예수님께서 나라와 민족과 문화와 언어에 상관치 않으시고 사람들을 끌어내어 아버지께 드리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향하여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뜻을 가지고 계획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신의 뜻과 계획을 전적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 열매를 따 먹지 않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관계를 통로로 삼아 당신의 주권을 펼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고 죄로 타락에 찌들게 되었고 자기 뜻을 관철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까지 동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으나, 스스로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동원하고 앞세워서라도 그 뜻을 관철하려는 이상한 행태를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내동댕이치고 자기 뜻을 이루려는 사람들로 꽉 찬 상태에서 하늘에 계시던 독생자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로부터 어린 양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와 연관하여 예수님께서는 각 나라와 민족과 문화의 차이를 불문하고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심으로써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두루마리 속에는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뜻과 계획은 어린 양 예수님 안으로 다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어린 양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에 연합하고, 부활하심에 연합하고, 승천하심으로 보좌 우편까지 연합하게 됩니다. 이처럼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은 마음이 어린 양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독대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라로 삼으셨음이란 내 삶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쏟아져 들어왔던 두루마리에는 나와 관련된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몸으로 살 때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중심으로 해서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는 제 몸을 중심으로 한 관계가 있고, 아내에게는 본인의 몸을 중심으로 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몸으로 맺어진 관계의 중심에 서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과 나를 동일시하는 자는 새 노래로 어린 양의 십자가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향한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럴 때 어린 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던 내 몸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에 해당되는 두루마리의 내용은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나라로 삼으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어린 양을 향한 찬양과 기도가 우리 인생의 열쇠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녀의 문제가 생겼든, 직장의 문제가 생겼든 마음의 평강을 깨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 내가 따로 문제의 해결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 문제들의 해결 또한 두루마리에 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를 만날 때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두루마리에 쓰신 내용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두루마리의 내용들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어린 양을 향해 거문고 찬양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어린 양과 연합한 자로서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두루마리에 쓰신 내용이 내려오면 됩니다. 그런데 두루마리의 모든 내용은 이미 어린 양이신 예수님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어린 양을 믿는 사람들이 그 두루마리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새 노래로 어린 양을 노래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어린 양 안에서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만의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만으로 채워져서 만족하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만을 인정하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붙잡고 씨름한다는 것은 내가 주권자로서 두루마리에 따로 기록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동원해서라도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자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붙잡는 것 자체가 아버지의 주권자 되심을 등지는 타락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문제가 생겨서 감당이 안 된다고 느껴질 때도 이미 아버지가 두루마리에 쓰신 것을 떠올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내용이 이루어지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두루마리에 쓰신 온 세상 80억 사람들에 관한 내용은 예수님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흐르는 예수님이라는 파이프에 내가 연결될 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이 어린 양을 향한 새 노래와 금 대접의 기도입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들이 돈 노래를 부르고, 자녀가 최고인 부모들이 자녀 노래를 부르고, 승진 좋아하는 사람들이 회사의 모든 일의 동기를 승진으로 삼듯이, 우리는 오직 어린 양이 죽임 당한 십자가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죽음에 연합함으로써 하늘에 올라가 직면하게 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기를 원하는 아들다운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상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감지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전지전능하심으로 쓰신 두루마리의 내용들이 비로소 내게도 임하게 됩니다.

나는 내 몸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중심에 있습니다. 온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주권적 섭리의 중심축이신 예수님께 연결된 새끼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새끼 중심축으로 할 일이란 내 몸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영역 전체에 아버지께서 두루마리에 쓰신 내용들이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전화나 메일로 상담을 요청하십니다. 상담을 원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완전히 문제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문제에 정복당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문제에 정복당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고 객관화 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상담을 하실 때 제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실제로 문제는 마음 상태입니다. ‘제 마음이 이런 문제에 휩싸여 있습니다.’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단순히 예수님께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딸 문제에 정복당한 자신의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랐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 나와서 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의 마음 상태는 이 세상의 어떤 문제나 대상에 의해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소중한 대상이라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취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의 문제가 강력한 것임을 아뢸 수 있어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을 풀어보자면 아버지 앞에는 흰 옷을 입고 나가야 하는데, 지금 내 마음이 딸의 문제에 정복당해서 얼룩졌습니다. 이렇게 얼룩진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여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한 셈입니다. 마음이 정복당한 줄 모른다면 눈앞에 보이는 일들만을 문제시하게 됩니다. 진짜 문제는 세상일들에 정복당한 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깨닫지 못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든지 우리는 죽임 당한 어린 양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문제가 스며들어온 나는 인격 자체가 어린 양과 함께 각이 떠져서 죽어야 함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기도를 관철합니다. 이렇게 할 때 인생의 모든 순간을 두루마리에 쓰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며 금 대접의 기도를 하는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 갑니다.

 

한편 본문 11~12절을 보면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어린 양도 그러한 일들과 관계가 없는데 하물며 죽임 당한 어린 양에게 무슨 능력과 부와 지혜가 있으며, 힘과 존귀가 있고, 어떻게 영광과 찬송의 대상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각과 뜻을 부인하고 오직 아버지의 생각과 뜻만을 받아들이시는 어린 양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죽어야 된다는 뜻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어린 양은 능력 제로, 부 제로, 지혜 제로,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을만한 점이 제로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는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천사들까지도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찬송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임 당하는 어린 양의 상태로 스스로를 규정하셨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고스란히 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두루마리의 내용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제로로 놓으셨고, 당신의 부요함을 제로로 놓으셨으며, 당신의 생각하는 지혜를 제로로 놓으셨고, 당신이 힘쓸 것을 제로로 놓으셨고, 당신의 존귀함을 제로로 놓으시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멸시당하며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내려오기에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의 내용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도 필요하고, 부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하고, 힘도 필요하고, 존귀도 필요합니다. 찬송 받을만하고 영광 받을만한 점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로의 상태가 되는 것을 고집하시고 지키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그대로 다 임할 수 있었습니다.

새끼 중심축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그대로 다 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어린 양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노래를 부르는 사람, 승진 노래를 부르는 사람, 건강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겉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의식 속에 담긴 염원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써 오직 하나님을 유일한 대상으로 삼아 사는 자답게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쓰신 두루마리의 내용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나를 통해 이 땅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진정한 중심축이신 예수님을 새 노래로 찬양하며 금 대접의 기도를 드리는 새끼 중심축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 양 중심축에 연결된 새끼 중심축이 되기 위하여 오늘도 어린 양을 향하여 거문고 찬양과 금 대접의 기도를 쉬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