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출장안마,출장마사지,바나나출장안마이미지출장안마출장마사지

(S) 생존비와 생활비_태승철

by 태승철 · 26-01-19 08:43 · 129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존비와 생활비>의 줄거리 :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이 분명한 증거가 다른 사람의 손해가 안타까움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를 나는 어떻게 지출해야 할까요? 어쨌든 내가 지출해야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여기서 하나님은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수입과 월급의 지출 방식을 생존비와 생활비로 나누어 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존비와 생활비 지출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생존비와 생활비

 

(신명기 22:6~7)

 

6.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본문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는지 상상도 추측도 하기 힘듭니다. 본문 중심으로 <생존비와 생활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가 필수적입니다. 성령께서 3,500년 전의 저자에게 말씀하실 때의 취지를 오늘날 우리에게도 알려주셔야 합니다. 이로부터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요구되는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삶은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주어진 영적 사실들이 내 마음의 환경이 되어 줌으로써 그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주어진 영적 환경 안에서 말씀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주어진 영적 환경에 충분히 잠긴 상태가 아니라면 성령께서 어떠한 취지와 의도에서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적 환경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 기쁨의 동산 에덴을 예비하셨듯이 우리의 삶도 이미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관계의 그물망과 뜻의 레일로 짜놓으셨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가족 관계, 이웃 관계, 각종 문제와 상황의 관계가 그물망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이 관계의 통로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이 막힘없이 흘러가야 합니다. 또한 사람이든 문제든 상황이든 제3의 대상을 마주할 때 내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의 레일을 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갖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항상 쉬지 않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더 크게 가지기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물망처럼 짜인 관계의 통로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이 뻗어가고,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흘러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삶의 토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든, 문제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이 기본 토대는 충분히 활성화되고 의식에서 켜져 있어야 합니다. 성경 구절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현장에 나갈 때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심장에 꽂아두어야 합니다. 심장이 뛰며 온몸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박동할 때 세상에 대한 죽음은 활성화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심장에서 나온 피가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몸이 움직여 갈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언제 어디서든지 심장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꽂아둘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심장이 될 때 몸으로 무엇을 만나든지 의식에는 죽음의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 가지기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제를 통해 신명기 22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사실이 마음과 의식에서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을 때,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가지기를 계속하면 관계의 통로로 하나님의 주권이 흐릅니다. 내몸이 제3의 대상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뜻의 레일을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 사실입니다. 22장은 이러한 기본 사실로 이루어진 삶의 다양한 측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진정한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 속에 신앙의 기본 개념이 예리하고 선명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의식에 새겨진 기본 개념으로부터 마음의 움직임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7분 설교의 영상을 올리다 보니 하나님께서 7분 설교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하신다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7분 설교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없기에 핵심적인 신앙의 기초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만 전합니다. 이것은 각 단계별로 꼭 의식해야 하는 신앙의 영적 개념들을 명확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개념은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라도 명확하게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같은 단어를 70번을 반복해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앙적 기본 개념도 예리하게, 섬세하게, 분명하게, 또렷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신앙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7분 설교는 여러분이 알고 있었더라도 잊어버린 신앙의 핵심을 짚어드립니다. 이를 통해 신앙의 기본 개념을 또렷하게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22장은 7분 설교와는 다르게 다양한 예를 통해 삶에 적용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저도 22장을 대하면서 설교를 몇 편에 나누어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말씀처럼 말씀 한 장을 하나의 설교로 정리하려 했으나 내용마다 구체적인 특징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유지한다면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삶의 모습이 여러 측면으로 제시되고 있기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목표는 십자가 생활화를 온전히 해나가는 것이지 그저 성경을 빨리 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십자가 생활화를 온전히 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여러 예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가 읽은 6~7절은 너무나 뜬금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특이합니다.

 

길을 가다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새 둥지가 눈에 띕니다. 둥지가 있는 것을 보면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든지 새끼를 품고 있든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끼는 가지되 어미 새는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무슨 의미에서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것일까요? 주석에는 자연계에 대한 사랑이라 해석을 했습니다. 어미 새는 놔둬야 계속 새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고기를 잡을 때는 새끼는 놓아주고 큰 것을 잡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말씀이 잘못된 것일까요? 애초에 이 말씀은 자연계를 사랑하거나 창조의 질서를 존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자연계를 사랑하고 창조의 질서도 존중해야 하지만 본문은 그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씀의 취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기본이 되는 영적 사실들에 내 마음이 잠겨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을 맨땅에 헤딩하듯이 대한다면 자연계를 사랑하라는 식의 엉뚱한 해석이 나와버립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 산 자로서 하나님 가지기를 지속합니다. 내가 몸으로 맺는 이 땅의 관계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흐르고, 내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의 레일을 따라갑니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본문을 볼 때 성령의 취지를 따른 올바른 이해도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눈에 띄는 점은 하나님께서 가지라고 하시는 것과 가지지 말라고 하시는 것으로 나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사소하게 여겨지는 일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길을 가다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둥지가 있음을 발견한 것도 하나님께서 새 둥지를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미 새는 놔두고 새끼만 가지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십자가 생활화의 삶이란 하나님이 짜놓으신 그물망의 판과 하나님의 뜻의 레일을 달리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의 한 측면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갖거나 갖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새 둥지는 월급이나 수입에 대한 비유입니다. 눈에 띈 새 둥지는 하나님께서 내게 있게하신 재정적인 수입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있게하신 수입이란 길을 가다가 눈에 띈 새 둥지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을 많이 갖기 위함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는데 새 둥지처럼 수입이 주어집니다. 직장인들의 월급은 노동과 근로의 대가로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월급을 받기 위해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알고 하나님 가지기만을 원하는 삶에서는 노동과 근로는 월급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갖기는 언제 어디서든 해야 할 일입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하나님을 더 갖고자 합니다. 월급을 위해서 노동을 한다면 내 마음은 월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에 월급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직장에 나가 일을 합니다. 다만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중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직장을 허락하셔서 근로와 노동을 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서 하는 일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자들에게 일이란 하나님을 마주하면서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과 기쁨에 대한 보답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주셨으니까 그 보답으로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일이 노동이고 근로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가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삶에서 월급과 수입이란 길을 가다 발견한 새 둥지와도 같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닌 우리 삶에 적용되어야 할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직장에 나가 근로와 노동을 한다면 월급을 바라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도 월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입니다. 노동과 근로를 하지만 하나님 때문에 하는 것이지 월급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에서 월급과 수입이란 하나님 가지기를 하는 인생의 여정에서 눈에 띈 새 둥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새 둥지에서 가지면 안 되는 어미 새의 몫이 있고, 가질 수 있는 새끼 새의 몫이 있습니다. 수입에서 내가 가져야 할 몫이란 결국 지출해야 할 부분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생존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떠올려 봅니다. 250만 명이 40년 동안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모든 비용이 생존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어지는 수입과 월급 중에 하나님이 내게 맡기시는 재량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존비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집이 있어야 하고, 생활필수품도 필요합니다. 생존을 위한 필수 지출 항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재량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필수적인 일에 무슨 재량권이 있느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옷을 예로 들어봅니다. 와이셔츠를 하나 사려고 해도 3만 원짜리가 있고 10만 원짜리가 있습니다. 비싼 것은 20만 원짜리도 있고, 70만 원짜리도 있을 것입니다. 똑같은 필수품으로서 와이셔츠를 사는데 3만원짜리를 살 것인가, 70만 원짜리를 살 것인가에 대한 재량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개념이 있습니다. 신앙에는 근검절약이라는 율법이 없습니다. 검소라는 율법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재량권은 어떻게 조절이 될 수가 있을까요? 먼저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가지기를 계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크게 가질수록 세상 것들 중에서도 특히 생존비와 관련해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와이셔츠를 사야 하는 상황을 예로 든다면 하나님을 크게 가지면 가질수록 비싼 옷에 대한 기대감이나 효용성이 떨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적게 가질수록 비싼 옷에 대한 기대감이나 효용성을 크게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존비에 대한 지출에 있어서 율법적 기준을 제시하시며 비싼 것은 안 되고 싼 것만 사라고 하시거나, 너무 싼 것도 좋지 않으니 중간 것을 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존비에 대해 재량권을 주십니다. 다만 이 재량권 안에는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옷을 사야 되는 순간에 마음에 하나님을 가진 크기를 보라는 것입니다. 근검절약이라는 율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적용하면 마음을 볼 필요가 없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지금 실시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가지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충분히 갖는 중에 와이셔츠를 사려고 하는데 3만 원짜리는 못 입겠다고 여겨진다면 10만 원짜리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여유도 있고 그럴 마음이 생기면 사라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경제적으로는 70만 원짜리 와이셔츠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하나님을 가지다 보니까 70만 원짜리 와이셔츠에 대한 기대감이나 효용성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3만 원짜리를 사도 충분하다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것을 사면 됩니다. 이로부터 형제나 이웃의 씀씀이에 대해 판단할 이유도 없습니다. 삶에 필수적인 것들인데 좀 비싼 것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굳이 비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존비에 대한 재량권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율법의 기준에서 억지로 근검절약이나 금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비싼 것에 대한 기대감이나 효용성이 반비례로 작아지는 상태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비싼 것을 사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하나님을 크게 못 가져서 여전히 세상 것에서 약간이나마 기대감이나 효용성을 찾는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가지기를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새끼 새를 가지라고 하신 것은 생존비의 부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존비에는 다양한 경우와 쓰임이 존재합니다. 특정 부분에서 재량권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관공서나 회사에서 직급이나 필요에 따라 집이나 차량이 제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장인께서도 어느 회사에 이사로 계실 때 사택이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재량권을 가질 수 있는 생존비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존비에는 하나님께서 재량권을 주십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가지기를 지속하는 선민에게는 하나님이 재량권을 주십니다. 지금 단계에 하나님을 가진 크기에 맞추어서 사면 됩니다. 다만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 가지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의 비싼 것들에 대한 효용성이나 기대감이 점점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좋습니다. 이것이 근검절약이나 금욕이라는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가지기로 재량권을 조절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미 새를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삶에는 생존 이외의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생존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40년 생활을 통해 생존한 이스라엘 백성에 가나안 땅을 주시려고 하셨듯이 생존 이상의 삶을 허락하십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수입의 일부를 은행에 예금하거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쇼핑하거나,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 친구에게 밥을 산다거나 잔치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각종 취미 활동이나 휴가나 여행, 기부나 구제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것을 생존비와 구분하는 생활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생활비에 대해서 우리의 삶의 내용들을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새 둥지가 전체 수입일 때 재량권을 주신 새끼 새가 생존비였다면, 갖지 말라고 하신 어미 새는 생활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왜 생활비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재량권을 주시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이때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을 따라서 계획한 일이라면 내게 재량권이 있는 것입니다. 어미 새를 갖지 말라는 것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지 말고,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더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일단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 말고 무엇으로 만족하려고 여행을 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 만큼 이 시간에 하나님을 더 가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미 새를 갖지 않는 태도입니다.

어미 새를 갖지 않는다면 내가 원해서 여행을 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는 여행을 가겠다는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여행이라고 하는 부분만큼을 하나님으로 늘 채우니까 여행을 가지 못합니다. 이처럼 완전히 여행이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되었을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여행뿐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활비 전반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취미가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되었을 때, 외식이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되었을 때, 쇼핑이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되었을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쇼핑이 있고, 외식이 있고, 휴가가 있고, 여행이 있고, 취미가 있고, 구제와 기부가 다 있습니다. 구제와 기부도 내 기분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몸으로 만나는 대로 불쌍히 여겨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적으로 기부해야 하고 구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의무감이 없을 정도로 먼저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과는 구분된 생각을 주십니다. 다른 사람은 여름에 휴가를 가도록 생각을 넣어주셨다면, 나는 겨울에 휴가를 가도록 하나님이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우리는 예금, 쇼핑, 외식, 잔치, 취미, 여행, 기부, 구제 등등의 생활 요소들을 내가 계획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러한 항목들에 대해 완전히 죽으면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완전히 죽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하나님으로 대신 만족함으로써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되면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제안한 적이 없는데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나비 한 마리, 새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를 보아도 아롱진 무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생각이 있으십니다. 보시기에 좋도록 예금, 쇼핑, 외식, 잔치, 취미, 여행, 기부, 구제 등등의 생활 요소에 대해 어떻게 아롱지게 할 것인가를 다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이 어미 새에 해당하는 지출 부분입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것들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려고 살아갈 때, 그것들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비마다 모양이 다르고, 새마다 다르듯이, 사람도 갖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나의 생활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말마다 여행을 갈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여행을 갈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1년에 한 번 갈 수도 있고, 10년 만에 한 번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못 가서 부족할 것이 없기에 일주일에 한 번 여행 가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10년 만에 한 번 갔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매주 가게 하시면 가면 되고, 하나님이 10년 만에 한 번 가게 하시면 가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차피 내 만족은 여행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대로 각각의 나비를 아롱지게 하시듯이, 고유한 방식으로 나의 삶이 아롱지기를 원하시며 생활에 관한 뜻을 따로 갖고 계십니다. 어미 새를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은 생활 항목들에 대해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량만큼 하나님을 더 가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더 가지기를 끊임없이 해나가다 보면 만족의 이유가 달라집니다. 예금이 없어도 되고, 쇼핑을 안 해도 되고, 외식을 안 해도 되고, 취미가 없어도 되고, 여행이 없어도 충분히 만족하는 스스로 광채 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 만족하기에 내버려두셔도 상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각종 생활 항목과 관계된 모든 일을 이끌어 가십니다.

 

제가 성도님을 강릉에 초대할 때 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이 허락하심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의 재량권에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새 둥지 하나 발견해서 어미는 두고 새끼만 가져갔는데, 고작 이만한 일에 대해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등장하는 것이 참 이상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새 둥지란 우리의 수입 전체를 가리킵니다. 수입과 지출은 삶에서 매우 큰 영역을 차지합니다. 80% 이상이 수입과 지출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문은 이러한 수입 지출의 양상에서 생존비와 생활비를 구분하는 태도를 가질 때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복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심해서 뜻을 가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바라보시며 분명한 의도를 갖고 계십니다. 이루어지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만들어 놓으신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실시간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땅에서 살 때 수입과 지출은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러한 수입과 지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엄청난 복입니다. 수입이 많은 것이 복이 아닙니다. 적은 수입이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생존비와 생활비를 나눕니다. 생존비를 지출할 때는 내가 가진 하나님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늘 반성하는 마음으로 재량권을 조절합니다. 생활비를 지출할 때는 내 마음에서 소원이 생기는 항목마다 그런 지출이 필요 없을 만큼 하나님 가지기를 계속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장수를 말씀하신 의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죽을 때를 정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장수할 수 있다는 말씀은 새삼스럽습니다. 장수를 하든 요절하든 그것에는 이미 정하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장수는 하나님의 뜻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50살을 살고, 어떤 사람은 70살을 살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50살을 살기로 한 사람이 평생 하나님이 정하신 뜻의 50%를 이루었다면 25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입니다. 한편 70살을 살기로 한 사람이 평생 하나님이 정하신 뜻의 10%를 이루었다면 7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룸의 측면에서 보자면 50살을 산 사람이 70살을 산 사람보다 더 장수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땅에서 이루는 비율이야말로 장수를 결정하는 요인입니다.

예수님 같은 경우 3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의 내용을 보면 다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죄가 없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감이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전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이셨습니다. 33년의 생애를 사셨어도 하나님의 뜻을 100% 다 이루셨기에 누구보다 장수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0살을 살아도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1%도 안 된다면 1년도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존재감의 가치 자체가 제로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하나님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기에 100살을 살았어도 요절한 셈입니다.

 

수입과 지출은 삶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가지기를 합니다. 관계의 통로로 하나님의 주권이 흐르고 있고, 3의 대상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의 레일을 달리는 사람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수입과 지출에 있어서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월급을 위해 노동하지 않습니다. 빈틈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월급이 내 마음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가지라 주신 은혜에 보답하여 행동을 할 때 눈에 띈 새 둥지처럼 수입을 주시고, 이제 그 수입에 대하여 생존비와 생활비를 나누어 지출함으로써 복과 장수를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