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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의 관계 혈관을 막는 혈전 뚫기>의 줄거리 :
하나님이 미리 짜놓으신 관계의 그물망 판에서 살 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나를 통해서 막힘없이 모든 관계 혈관으로 다 뻗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이미 이런 관계의 혈관을 막는 다양한 종류의 혈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삶이 뇌졸중이나 심근경색 그리고 폐혈전증 등 선민으로서의 생명이 위급해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언제나 삶의 현장으로 나갈 때면,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로 제거되는 혈전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삶의 관계 혈관을 막는 혈전 뚫기
(신명기 22:1~5)
1.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본문에는 일관된 주제로 여러 가지 항목이 짧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만 한꺼번에 다루기에는 각 항목들이 실제 삶과의 관계가 깊기 때문에 오늘은 두 가지 항목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삶의 관계 혈관을 막는 혈전 뚫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삶의 관계는 혈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혈전이 혈관을 막듯이 관계를 막는 요소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혈전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미리 짜놓으신 관계의 그물망에 충돌하거나 끊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관계 안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막힘없이 흘러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상대하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내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흘러가야 합니다. 내가 직접 대면하는 대상에게로 흘러가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고, 간접적인 관계를 맺는 대상에게 흘러가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판에서 나로부터 발생하는 혈전이 있다면 관계의 혈관은 막히게 됩니다.
혈전은 핏덩어리입니다. 혈전이 몸을 돌다가 뇌에서 막히면 뇌졸중을 일으키고, 심장에서 막히면 심근경색을 일으키고, 폐에서 막히면 폐혈전증을 일으키며, 다리 정맥에서 막히면 하지정맥혈전증을 일으켜서 목숨을 위협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미리 짜놓으신 관계의 그물망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제3의 대상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있어야만 막힌 혈전이 뚫리고, 내 삶의 판 전체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막힘없이 흘러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관련된 모든 관계를 통해 삶의 판을 짜놓으셨습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만 드리고, 하나님만을 갖고, 하나님과 묶인 상태에서는 그 모든 관계 안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흘러갑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 계획들로 삶이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내가 직접 대면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흘러가야 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내 속에서 발생하는 혈전에 의해 막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통해 뚫려야 하는 혈전의 종류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이 본문을 통해 나열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4절에는 분실물을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언뜻 이 말씀을 보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소나 양이나 나귀 그리고 의복 같은 것들은 당시의 대표적 재물이었습니다. 욥기에서 욥을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라고 소개하며 소 떼와 양 떼 등을 언급한 것과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가축이나 의복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며,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경우에는 잘 보관하였다가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뉴스를 보면 택시 기사가 돈봉투를 주인에게 찾아주었다는 미담이 소개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떠올리며 본문을 단순히 다른 사람이 분실한 재물을 내 것으로 삼지 말고 돌려주라는 교훈적 이야기로 여깁니다. 그러나 본문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본문에는 “못 본 체하지 말고”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다른 사람의 분실물을 내 것으로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분실물을 못 본 체하지 말라는 것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의 물질적 손해를 나 몰라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손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손해를 보든 안타까운 마음도 없고 아파하는 마음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짜놓으신 관계의 그물망에서 이루어져야 할 뜻과 계획은 다 막혀버린다는 것입니다. 비록 나와 이해관계가 없을지라도 나의 말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하나도 이루어질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루어지면 보시기에 좋을 뜻과 계획으로 관계의 판을 짜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의 손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이 관계의 판에서 발생하는 모든 만남은 나로부터 발생한 혈전으로 막혀버립니다. 선민에게 어울리는 삶의 판도가 죽어버리는 결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의 손해를 신경 쓰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내 것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에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손해에 신경 쓸 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짜놓으신 관계의 그물망의 판도가 유지되고, 매 국면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소유의식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재물에 대해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재물이 많든 적든 일단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가지면 나와 관계하는 사람의 손해를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 것만 유지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그와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하나도 흘러갈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재물에 대해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흐름을 막는 혈전입니다. 혈전이 뇌졸중, 심근경색, 폐혈전증, 하지정맥혈전증 같은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문제를 일으키듯이, 나의 소유의식은 선민으로서의 생명을 끝내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투자를 좋아합니다. 다만 투자를 생각할 때는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망각합니다. 재물을 하나님이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내 멋대로 늘릴 수 있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동산에 투자하고, 주식에 투자하고, 연구 개발에 투자하고, 인재를 발굴하는 측면에서 사람에게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래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내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내 것을 늘리기 위해 투자를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선민이 할 수 있는 투자가 있습니다. 선민은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선민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투자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대면할 때 손에 조약돌을 쥐었습니다. 이제 조약돌은 다윗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다윗은 그 조약돌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투자했습니다. 그 결과 골리앗의 이마에 조약돌이 박혀 죽었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물리칩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하나님의 뜻에 투자한 다윗의 조약돌 하나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비유적으로 이 아이는 하나님의 뜻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투자했던 셈입니다. 그러자 그 결과 오천 명을 먹이는 어마어마한 기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아이에게 어떤 물질적 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서 쓰임이 커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쓰임이란 결국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재물이 많고 적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그것에 대해 죽음으로써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른 쓰임을 갖게 됩니다. 반대로 내 것이라 여긴다면 쓰임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막는 혈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막히면 결국 내 손해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계획하신 내 인생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참 소유는 하나님 자신이고 천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만족감으로, 천국을 현실감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천국을 가질 때 발생하는 일이 있습니다. 조금만 가졌을 뿐인데 이상하게 이 땅에서 벌어지는 다른 사람의 손해를 못 본 체할 수 없게 됩니다. 거꾸로 다른 사람의 손해가 신경에 거슬려서 못 본 체할 수 없다면 내가 하나님을 가져서 천국을 현실로 느낀다는 증거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다른 사람의 손해가 신경에 거슬리는 상태가 될 때 나타나는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몸이 있으므로 맺어지는 관계들의 판 위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막힘없이 실현되고, 내 말과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막힘없이 흘러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재물을 내 것으로 붙잡는다면 다른 사람의 손해를 못 본 체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막히게 됩니다.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전 설교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아니라 ‘두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것과 내 것인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착각하여 자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의 손해가 마음에 걸리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이 마음가짐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요?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재물을 하나님 것으로 생각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 마음가짐은 반드시 저절로 생깁니다. 다른 사람의 손해가 마음에 걸립니다. 세상에서는 하찮다고 여겨지는 사람일지라도 내게는 조금도 하찮지 않고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선민이란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만을 크게 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왕도 하찮을 정도로 작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선민이 세상에서 작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작게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민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가져서 세상 모든 것이 사소해지면, 역설적으로 사람 하나하나가 귀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타인의 손해를 못 본 체하지 않습니다.
한편, 5절에서는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의복 구별을 말씀하십니다. 의복이란 신분을 상징합니다. 흔히 은퇴할 때 옷을 벗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남자나 여자라는 자아의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신분 의식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신분 의식으로부터 인류의 모든 역사와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빠지지 않았다면,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고대 지중해의 판도 또한 바뀌었으리라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남자와 여자라는 신분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옷을 바꿔 입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녀의 신분 의식을 분명히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옷을 바꿔 입는 것은 현재 신분에 대한 불만을 의미합니다. 더 나은 신분을 원하는 것입니다. 신분 상승이라는 표현은 낯설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분 상승을 꾀하고 신분 추락을 두려워합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신분의 변화를 꾀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민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인해 내 삶의 판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의 흐름은 막혀버립니다.
지금 주어진 신분이 못마땅해서 다른 신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좀 더 신분이 상승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흘러가지 못합니다. 신분 상승이나 신분의 변화를 향한 소원은 결국 내 삶의 관계라는 혈관을 막는 혈전입니다. 마음으로 신분 상승이나 신분 변화를 추구할 때 선민의 삶의 판은 깨지고 맙니다.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같은 혈전으로 인한 병이 임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신분이나 처지를 싫어하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다른 신분을 추구하려는 혈전을 뚫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에 세상의 모든 신분 우열에 대한 죽음입니다. 앞에서 소유를 이야기하며 하나님과 천국만이 우리의 소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분 의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나의 영원한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국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얻는 신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세상에서의 나의 신분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면 됩니다. 세상에서의 신분 자체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할 필요가 없고, 신분의 변화를 꾀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신분 변화를 꾀함이란 결국 그 신분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단절시킨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신분이나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 신분과 이 처지는 하나님에 의한 ‘있음’입니다. 이 상태에서 내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주어진 신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분과 처지를 거부한다면 감사함으로 수용함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처지에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말과 행동도 나올 수 없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지금 나의 이 세상 안에서의 신분은 배역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영원한 내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천국의 아들이라는 것뿐입니다. 남자라는 것도 영원히 남자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에서 성별은 마치 고정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영원히 남자라는 여자라는 신분 의식을 갖고 살아가지만, 남자도 여자도 이 세상에서의 배역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맡은 배역에 충실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옷을 바꿔 입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배역을 맡겼는데 왜 남자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여자의 배역을 맡겼는데 왜 여자가 아닌 것처럼 행동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신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과장의 신분에 놓으셨다면 과장의 신분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면 됩니다. 부장이 되겠다는 신분 상승의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준비하신 모든 뜻과 계획은 과장이라는 신분에 맞추어져 있는데, 과장의 신분을 부인하고 부장으로 승진하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면 과장에게 필요한 말과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부장으로 승진하기 위해 사장님에게 아부하고,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삶의 판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으로 하나님을 마주하는 사람, 영원한 신분을 지키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에서 신분 변화를 꾀하지 않고 신분 상승을 소원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우리는 신분 상승이나 신분 변화를 위한 다양한 소원을 갖습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도 신분과 관련된 마음의 소원입니다. 대학을 졸업했다면 이제 취직을 소원합니다. 취직을 해도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소원합니다. 정규직이 되고 나서는 승진을 소원합니다. 은퇴가 미뤄지기를 소원합니다. 해외 거주하는 분들은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소원합니다. 이렇게 소원대로 신분 상승과 신분 변화가 일어났다면 잘 된 것일까요? 영주권이 나오고 시민권이 나와도, 대학에 합격을 해도, 취직을 해도, 승진을 해도,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바뀌어도, 하나님의 판은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으로부터는 불합격한 것이고 탈락한 것입니다. 신분 변화에 대한 바람은 관계의 혈관을 막아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흐르지 못하게 하는 혈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신분 변화에 대한 아무런 소원도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요셉을 생각해 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억울하게 팔려 애굽에서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노예와 죄수를 거쳐 총리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요셉의 이야기는 신분 상승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손꼽힙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배당에서 종교 생활을 하던 때에는 이러한 요셉이 신분 상승을 위한 마음가짐과 노력을 정당화하는 소재로 쓰였습니다. 신분 상승을 추구하도록 격려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명기 28장 13절의 “너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라는 말씀을 비롯한 여러 말씀을 오해하여 잘못 적용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요셉이 신분 상승을 소원했을까요? 요셉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요셉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을 뿐 이 땅에서 주어진 신분의 변화를 추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서 보디발의 집에 팔렸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에게 인정받아 모든 집안일을 총괄하는 자가 됩니다. 다만 요셉이 신분 상승을 꾀하던 과정에서 집안일을 총괄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주하였고 하나님과 묶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하나님이 짜놓으신 그물망 안에서 주어진 신분을 받아들였습니다. 노예 신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말과 행동하는 것을 책임으로 알았습니다. 마치 배역을 맡은 배우가 감독이 주는 대사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자기의 업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신분에 대한 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요셉에게 노예 신분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면 보디발이 집안의 감독으로 세울 만큼 신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신분 변화에 대한 아무런 충동 없이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지혜를 따라 말과 행동을 했을 뿐인데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감옥에서도 죄수라는 신분을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죄수라는 신분에서 할 수 있는 하나님이 넣어주시는 말과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자 죄수로 옥중의 제반 사무를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죄수의 처지에서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요셉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요셉이 총리 자리를 향한 신분 상승의 소원으로 움직였던 사람이 아니었듯이, 이 세상에서의 신분 변화나 신분 상승은 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내 일로 받아들인다면 지금 하나님이 있게 하신 신분과 처지를 마음에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지금 처지에서만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나님이 주실 수가 없습니다. 노예로 떨어졌으면 노예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주십니다. 총리로 올라갔으면 총리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주십니다. 요셉이 한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남자와 여자가 옷을 바꿔 입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으려 하고 여자가 남자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신분을 싫어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다른 신분과 처지에도 적용됩니다. 나는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났나? 나는 왜 이렇게 못생긴 모습으로 태어났나? 다 불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상태에서 받아야 할 하나님의 말과 행동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다 잃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로는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 안에서 살 수 없습니다. 결국 삶의 판을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분 체계 안에서 바꾸려 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 잘 믿으면 세상 사람들이 세워놓은 높은 신분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의 두 항목을 엮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의 판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내게 ‘있음’이 되게 하신 재물이 마이너스라서 빚을 진 상태입니다. 가난함과 빚쟁이라는 신분이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빚을 갚고자 노력합니다. 추가로 빚을 내서 급한 빚을 막고, 카드를 돌려가며 빚을 막고자 합니다. 이렇듯 발버둥 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습니다. 혈전에 의해 혈관이 막혀버리듯 관계로 이루어진 삶의 판은 막혀버립니다.
일단 빚을 진 상황에서 할 일이란 빚쟁이라는 신분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의 충동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빚지고 있는 삶의 형편을 떠나서 내 진정한 소유인 하나님을 갖습니다. 내게 허락된 천국을 실감하고,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갖고, 하나님의 좋음을 만족감으로 갖습니다. 그러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만족감을 더 크게 갖게 해 주세요!’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빚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요셉은 노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신분이 노예에서 죄수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빚쟁이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다가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고, 고소나 고발을 당해서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길바닥에 나앉는 것도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의 처지를 자처하여 평생을 사셨으면서도 공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다 이루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지 나사로의 처지가 되었다면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빚을 졌다고 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머리 둘 곳 없는 주님의 처지에 본의 아니게 가까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빚을 졌다고 해서 빚쟁이라는 처지를 벗어나려고 애쓰고자 하는 것은 선민의 태도가 아닙니다. 빚쟁이라는 처지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할 뿐입니다. 그 결과 고발을 당해 감옥에 들어가든 길거리에 나앉든 다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밑바닥으로 내쳐진 상태일지라도 요셉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은 계획과 뜻을 불어넣으시면서 내 삶을 얼마든지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인해 광야에서 이스라엘 250만 명이 40년을 먹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빚이 많아도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는 것뿐입니다. 빚쟁이의 신분을 내가 벗어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법이 어떻고 상황이 어떻든 처지가 어떻든 그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나는 더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머리 둘 곳 없는 주님의 처지에 간 것뿐입니다. 주님과 같은 형편이 된 것이 손해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관계의 혈관을 깨끗하게 유지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막힘없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바닥에서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가십니다. 어떤 삶이라도 재건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이시고, 내가 믿음으로부터 실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떨어져 있는 나를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확인함으로써 오늘 말씀드린 이론이 여러분에게 실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떡하든지 내 손으로 이루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도 아버지가 저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계획과 뜻만큼은 막힘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 죽음을 철저히 인식하여 주장하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