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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우리’라는 의식이 제 팔자(?)다>의 줄거리 :
‘우리’라는 의식만 바꿔도 인생이 바뀝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정하신 삶을 사느냐? 아니면 공중 권세 잡은 마귀가 속이고 망가뜨리는 삶을 사느냐? ‘우리’라는 의식이 결정합니다. 공중 권세 잡은 마귀에게 끌려가는 팔자를 하나님이 정하신 삶을 사는 팔자로 바꾸려면, ‘우리’라는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무의식중에라도 뱉는 ‘우리’라는 의식은 실제로 내 마음이 현재 속한 소속감이 땅에 있는지 천국에 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끝내 땅의 ‘우리’에서 천국의 ‘우리’로 바꾸지 못하고 죽는 사람. 스스로 천국 팔자를 지옥 팔자로 정하고 만 셈입니다.
‘우리’라는 의식이 제 팔자(?)다
(신명기 22:8~30)
8.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11. 양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12.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우리가 읽은 8~12절은 일상에서 금지하신 일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읽지 않은 13절부터 30절까지는 이성 간의 성적 윤리에 대한 말씀이 여러 예를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우리’라는 의식이 제 팔자(?)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라는 표현은 일상에서 우리 가족, 우리 아이, 우리 회사, 우리 단체, 우리나라 등으로 다양하게 쓰입니다. 제가 ‘우리’라는 말을 쓸 때는 저와 말씀을 듣는 여러분을 가리킬 때입니다. 그런데 무의식중에 쓰는 ‘우리’라는 말이 내 인생을 결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정하신 삶을 살거나 공중 권세 잡은 마귀가 속이고 망가뜨리는 삶을 사는 것은 무의식중에 내뱉는 ‘우리’라는 말이 결정합니다.
모든 사람은 공중 권세 잡은 마귀에게 끌려가는 팔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계획해 놓으신 삶을 사는 팔자입니다. 다만 여기서 개념을 정확하게 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는 운명으로 정해진 인생을 팔자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에서 팔자라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사용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거나 마귀에 의해 이끌림을 받도록 정해졌다는 점에서는 팔자의 의미가 같습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는 내가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이 정해진 운명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이끄는 삶을 살 것인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뜻하고 계획하여 정하신 삶을 살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우리’라는 의식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본 뒤에는 습관적으로 ‘우리’라는 말을 할 때마다 누가 포함이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만 반복하더라도 팔자는 바뀝니다. 저주받은 팔자에서 복된 팔자로, 지옥 팔자에서 천국 팔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정해졌다는 점에서는 운명론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정하신 인생으로 뛰어들 것인가, 마귀가 속이고 망가뜨리는 인생으로 뛰어들 것인가를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정하신 길로 가는 중이라면 ‘우리’라는 의식이 바뀌어 있는 상태입니다.
8절을 보면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이란 평평한 슬라브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지붕에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서 다양하게 활용했습니다. 지붕은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과는 구분된 휴식의 장소였고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특이하게 가족이 떨어질까 염려하려 난간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지붕에 올라갔다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난간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집이란 가족이 ‘우리’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배타적이고 폐쇄적 공간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집이라는 공간을 만들 때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둘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가족을 ‘우리’라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집을 지을 때조차도 ‘우리’라는 말로 가족을 묶지말고 다른 사람과 이어지는 연결을 염두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욥바라는 곳에서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머물던 집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도하는 모습이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이 우리 집 지붕에 올라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을 지을 때 ‘우리’라는 폐쇄적인 가족의 울타리를 깨고 다른 사람과의 연결성을 염두에 두라는 의미의 말씀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족구성원 각자가 집 밖에서 맺는 모든 관계의 관계는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에 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라는 의식으로 가족을 묶는다면 관계의 그물망은 뻗어나갈 수 없습니다. 마치 일정한 경계를 긋고 가위로 잘라내는 것처럼 하나님이 뜻하고 계획하신 관계의 그물망이 손상되는 것입니다. 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가족에 대해서만 ‘우리’라는 의식에 갇힌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은 저로부터 여러분에게로 흘러갈 수 없고, 또 여러분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능한 안정적 울타리를 확보하고자 합니다. 소속감으로부터 사회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가족뿐만 아니라 회사나 학교나 관공서나 동호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나 지역이 ‘우리’라는 의식으로 묶입니다. 우리 가족, 우리 회사, 우리 학교, 우리 동네 등의 셀 수도 없는 ‘우리’를 만들어서 어떻게 하든지 소속감과 안정감을 찾습니다. 다만 이러한 ‘우리’는 모두 땅에 소속된 평면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우리’의 개념을 타파해야 할 것을 촉구하며, 가장 기본적인 가족 단위의 ‘우리’라는 울타리부터 깨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라는 개념이 잘못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중심으로 세우신 계획은 흘러갈 수 없습니다. 관계라는 혈관을 따라 흘러가야 할 하나님의 계획이 잘못된 ‘우리’에 의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라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까요? ‘우리’라는 의식은 땅이 아닌 하늘에서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우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족도 세상에 포함된 것이기에 가족도 ‘우리’로 묶일 수 없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에서 나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사위일체로 묶여야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계속해서 ‘우리’라는 말을 쓸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 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우리’를 언급할 때 정말로 그것이 나와 묶여야 하는 ‘우리’가 맞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언급할 때 대한민국이 나와 묶여야 하는 ‘우리’가 맞는지 생각합니다. 내가 대한민국과 ‘우리’로 묶여야 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로 묶이는 ‘우리’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물론 편의상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나라를 언급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때도 ‘우리’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사위일체 ‘우리’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과정을 갖는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팔자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도 무의식중에 ‘우리’라는 말을 쓸 것입니다. 다만 마음에서 ‘우리’의 개념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소속된 가족이나 회사나 동호회가 담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소속에서 ‘우리’를 찾는다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우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은 울타리 같은 배타성을 지닙니다.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의식의 표현입니다. 세상의 소속을 ‘우리’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사위일체로 묶인 ‘우리’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내용물이 담긴 ‘우리’를 무의식중에 계속해서 말한다면, 내 마음이 여전히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어지는 9~11절에는 ‘우리’와 연관된 다양한 예가 언급됩니다. 포도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고,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밭을 갈지 말고, 양털과 베 실을 섞어서 옷감을 짜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은 우리가 입는 옷을 보면 면과 폴리에스터 등의 혼합직물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러한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본문은 단순히 일상적 금지 행위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밭에 뿌리는 종자의 차이, 소와 나귀의 차이, 양털과 베 실의 차이처럼 천국 의식을 갖는 사람과 세상 사람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차이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위일체를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의 평면상에서 소속감을 찾으며 ‘우리’라는 의식을 찾는 사람과 섞여 살 때는 분명한 차이가 드러나야 합니다. 포도와 곡식의 종자처럼 차이가 있어야 하고, 소와 나귀처럼 차이가 있어야 하며, 양털과 베 실처럼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선민 됨이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라는 의식은 신앙 점검의 지표가 됩니다. 무의식중에 쓰는 ‘우리’라는 표현에 담긴 소속이 무엇인지를 잡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내가 이루는 ‘우리’는 가장 배타적이고 폐쇄적이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사위일체의 ‘우리’ 안으로는 누구도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이 ‘우리’라고 생각하고, 헬라인이 ‘우리’라고 생각하고, 종의 계층이 ‘우리’라고 생각하고, 자유인의 계층이 ‘우리’라고 생각하고, 남자가 ‘우리’라고 생각하고, 여자가 ‘우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또 골로새서 3장 11절에서는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라고 했습니다. 헬라인의 우리, 유대인의 우리, 할례파의 우리, 무할례파의 우리, 야만인의 우리’ 스구디아인의 우리, 종의 우리, 자유인의 우리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똑같이 새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소속감은 세상의 기준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될 가능성은 열려있지만, 지상에서는 ‘우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이룬 자들이 새사람인 이유는 지상에서 소속감을 찾는 옛사람과 분명한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던 때에 교계에서 각종 전도 프로그램이 유행했습니다. 예배당에 각종 세상 문화를 도입하여 세상 사람들이 예배당을 불편해하지 않을 정도로 차이를 순화하고 구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전도를 하고자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편해하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충돌을 느끼면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세상 문화를 그대로 예배당에 도입하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도 없어지고 선민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전도는 차이를 없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만 이루어집니다. 예배당과 세상의 울타리가 없어져서 평면상의 이동이 일어날 뿐이라면 그것은 전도가 아니라 이사일 뿐입니다. 이사를 간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듯이 같은 사람이 세상에서 예배당으로 옮겨왔을 뿐입니다. 오히려 환경이 맘에 들 때 기존의 성향은 더욱 강화됩니다. 세속적이던 사람이 예배당에 와서 더욱 세속적 성향을 띄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차이를 없애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명한 차이에서 확실한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소와 나귀는 도저히 같은 부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4~16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의식의 차이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을 만날 때 사위일체의 ‘우리’라는 의식을 갖고 세상의 ‘우리’라는 의식의 울타리를 깨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속에서 ‘우리’의 의식을 갖습니다. 이방인이면 이방인, 부자면 부자, 가난하면 가난한 사람, 종이면 종, 자유한 사람은 자유한 사람, 정치가면 정치가, 교육가면 교육가라는 소속에서 ‘우리’라는 의식을 갖습니다. 그 모든 ‘우리’ 속으로 사위일체의 ‘우리’라는 의식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사위일체를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로부터 전도도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쉽게 말해 ‘당신과 나는 너무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보여준 전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받는 은혜와 축복 또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우리’라는 의식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내가 ‘우리’로 묶이지 않으면 예수를 믿어서 얻게 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은혜도 무효가 되고 하나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올바른 ‘우리’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전 설교에서 삶은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을 마주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령을 통한 일체 되심에 나도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내게 주어지는 마음의 환경과 영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위일체를 ‘우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삶에서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우리’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내 남편이 남의 남편일 수 없는데 우리 남편이라고 부르고, 내 아내가 남의 아내일 수 없는데 우리 아내라고 부릅니다. 본래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도 굳이 ‘우리’를 사용할 만큼 땅에 있는 존재들을 한 울타리로 묶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구분이 명확해야 합니다.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이 땅에 머물고 있는지 하늘로 올라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우리’ 속에는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부모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라도 이웃도 세상에 있는 누구도 들어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단순히 ‘우리’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편의상 대화를 하는 중에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한국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북한과 구분하려면 우리나라라고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우리’조차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라고 말을 할 때 대한민국이 ‘우리’ 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은 내 마음이 지금 땅에 머물고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 허용되는 ‘우리’는 각자 사위일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전체로서의 교회입니다. 나도 사위일체를 이루고, 당신도 사위일체를 이룹니다. 이처럼 사위일체를 단위로 이루고 있는 사람들 전체를 교회라고 하는데, 이 교회를 ‘우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우리’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사위일체를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 하나를 제외하면 ‘우리’라고 하는 모든 말을 점검해야만 합니다.
한편, 12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복을 보면 속옷 위에 겉옷을 걸쳤는데, 그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달라고 하십니다. 옷에 다는 술은 여덟 가닥의 실을 꼬아서 다섯 개의 매듭을 만듭니다. 이 술을 ‘치치트(ציצית)’라고 하는데 히브리어 알파벳이 가리키는 각 숫자를 합산한 600에 여덟 가닥의 실과 다섯 개 매듭을 더하면 613이 됩니다. 여기서 613은 모세가 말한 율법 조항의 숫자입니다. 다시 말해, 치치트를 단 옷을 입고 삶의 현장에 나갈 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율법 613조항을 다 외워서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은 결국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고 계시고 나를 인도하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으로써,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시간으로 따라서 살아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포도와 곡식의 차이, 소와 나귀의 차이, 양털과 베 실의 차이처럼 선민과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를 만드는 원인입니다.
내가 세상 사람과 다른 이유는 실시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과 경험과 욕구를 따릅니다. 스스로 좋고 나쁨의 판단을 따라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합니다. 반면 선민은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의식을 항상 천국에서 갖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내가 ‘우리’라는 의식이 강하고 또렷하게 유지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위일체의 ‘우리’라는 의식으로부터 평안함과 안정감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동안에 떠오르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신앙에서 ‘우리’라는 의식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내가 ‘우리’라는 의식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붙박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폐쇄성과 배타성을 가진 ‘우리’라는 의식을 가질 때 세상에서 어떤 상황을 마주하든, 어떤 단체나 어떤 사람 속으로 뛰어들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차이를 드러내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우리’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각자가 사위일체를 이루어서 ‘우리’라는 의식으로 똘똘 뭉친 그 전체가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땅에서는 유일하게 ‘우리’라고 쓸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 외에는 본질적으로 ‘우리’라는 말이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읽지 않은 13절부터 30절까지는 이성 간의 성 윤리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사뭇 무섭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동정을 잃은 것이 확인되면 돌로 쳐 죽여라, 기혼자들이 탈선하면 돌로 쳐 죽여라, 강간범을 돌로 쳐 죽여라, 아버지의 여자를 건드린 자도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적 이탈이 일어난 경우에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구약의 성 윤리마저도 경계를 뚫어버리시고 더 강화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기만 해도 이미 성적 이탈행위를 한 것과 똑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이성에 대해 성적 이탈을 마음으로 생각만 했어도 이미 다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서 감싸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여인을 돌로 쳐야 하는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구약에서 돌로 쳐 죽이라고 했던 모든 범죄를 다 적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죄가 없는 사람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다 떠납니다. 10~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 여자의 죗값을 치르실 것이기에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도 이 여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남녀 관계가 언급된 이유는 이것이 ‘우리’라는 의식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녀라는 출발점에서 ‘우리’라는 의식이 발생하면서 가족이 생기고, 그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가 우리가 되고, 그 동네가 처한 나라가 우리가 됩니다. 남녀 관계가 기본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기본이 되는 남녀 관계가 올바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이 온전해야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절대로 ‘우리’로 생각할 수 없고, 여자는 남자를 절대로 ‘우리’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위일체의 ‘우리’ 안에 남자나 여자가 끼어들 수 없고, 사위일체의 ‘우리’로부터 여자와 남자를 배타적으로 내쫓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남녀 관계에서도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의 레일을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이 본문에 담긴 의미입니다.
사람은 남자 아니면 여자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필요로 하고,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번성하게 하시기 위하여 성적인 욕구도 주셨습니다. 다만 이로부터 잘못된 ‘우리’라는 의식을 가짐으로써 이탈하게 됩니다. 행위의 이탈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이탈도 똑같이 취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하신 상황과 똑같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죽음을 대신 받아 주셨습니다. 이로써 사위일체의 ‘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위일체를 유지하지 않으면 이성 간에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의 레일을 달려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위일체의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자녀든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이 사위일체가 확고해야 이성 간에 하나님의 뜻도 정확히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천국 ‘우리’가 있고 세상 ‘우리’가 있습니다. 천국 ‘우리’를 가져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삶을 사는 팔자가 됩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꼼꼼히 살핌으로써 사위일체가 아닌 다른 대상이 들어있다면, 그러한 나를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무의식중에라도 ‘우리’라는 말이 나올 때면 반드시 사위일체의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세상에서 가졌던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모든 ‘우리’라는 의식이 철저하게 뿌리까지 죽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 있든 사위일체 ‘우리’ 의식으로 똘똘 뭉쳐서, 무엇이든지 뚫고 나가고 타파하며 이 독특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