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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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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삶의 판은 짜였고 길은 놓였다_태승철

by 태승철 · 26-01-15 07:02 · 179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미 삶의 판은 짜였고 길은 놓였다>의 줄거리 :

에덴을 예비하셨듯이, 이미 내가 살아야 할 한 해 동안 삶의 그물망 판을 다 짜셨고 길을 다 놓으셨습니다. 예외 없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음을 기준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삶의 판이란 관계의 판입니다. 사람과 사건과 사물을 만나 관계하게 될 그물망 판을 짜놓으신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났을 때 내가 할 말과 행동을 서울 지하철 노선도처럼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내가 한 해 동안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만남의 그물망을 찢지 않고, 내 언행이 이 레일을 이탈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미 삶의 판은 짜였고 길은 놓였다

 

(신명기 21:10~23)

 

10.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기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11.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그에게 연연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12.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13.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14.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우리가 읽은 10~14절에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여자를 아내로 삼는 규정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15~17절에는 축첩이 가능했던 역사적 배경을 두고 아브라함처럼 두 아내가 있었을 경우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한 아내는 미워하고 다른 아내는 사랑하는데 미워하는 아내에게서 첫 아이를 얻고 나중에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둘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태어난 둘째를 장자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어서 18~21절에는 선민의 특권을 누리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패역한 아들이 있다면 부모가 그를 공중 앞에 끌어내어 자식의 패역함을 말했을 때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21~23절에는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을 죽였을 때 시체는 일벌백계의 의미를 담아 나무에 매달게 했습니다. 범죄 한 자의 시체를 보았다면 이러한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시간은 해지기 전까지입니다. 날이 새도록 두어서 다음날 해가 뜰 때 시체가 보인다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이미 삶의 판은 짜였고 길은 놓였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삶의 현장으로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한 해 동안의 삶의 판을 그물망처럼 다 짜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언행의 길도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판을 미리 짜시고 내 언행의 길을 미리 정해 놓으실 때의 기준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이미 내 삶의 판은 다 깔려 있고 내 말과 행동의 길은 다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해를 산다는 의미는 짜놓으신 판을 깨지 않고 정하신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해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 이외의 다른 판을 살면서 행복할 수 없고 평강할 수 없고 기쁠 수도 없습니다. 언행을 위해 정해 놓으신 길 이외의 다른 식의 말과 행동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한 해를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미 짜놓으신 판을 깨뜨리거나 지키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판을 깨뜨리면 성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언행은 정해진 길을 가거나 이탈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탈하고도 성공하는 생애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좋아하는 목표를 세워 이루겠다고 결심한다든지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이라는 기준을 따라 짜놓으신 삶의 판과 정해 놓으신 언행의 길을 따라가면 될 뿐입니다.

삶의 판을 그물망으로 비유할 수 있는 이유는 삶이 관계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과 사물과 사건들을 만나는 것이 삶입니다. 우리 삶에는 관계의 그물망이 판으로 깔려 있습니다. 누구를 만날 것이며 어떤 상황을 만날 것인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숙명론이나 운명론처럼 반드시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 판은 지켜지거나 깨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짜놓으신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관계의 판 위에서는 내가 해야 할 말과 행동도 정해져 있습니다. 이 판을 깨지 않는다는 것은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그물망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만남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말과 행동의 길을 이탈하지 않음으로써 온전하고 완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이미 짜놓으신 그물망 같은 삶의 판을 깨뜨리지 않고, 말과 행동이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길 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십니다. 이전 설교에서 삶의 판이 짜여있고 내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해야 할지도 정해져 있는 상황을 점선으로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점선으로 그려두신 길을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실선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선민의 삶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것인지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의 있음과 없음까지도 정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가족이든 이웃이든 직장 동료를 만난다는 것은 그가 내 앞에서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대상이 내 앞에서 있음이나 없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짜놓으신 판대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내 앞에 있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건이든 사물이든 우리는 하나님께서 있게 하셨기 때문에 생겨난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있게 하신 대상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저 우두커니 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이라는 기준에서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말과 행동을 한다면, 또 다음 단계에 대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뜻을 두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마무리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대로 다른 만남을 갖고 그도 나름의 관계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대로 말하고 행동한 것이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 사람이 만나는 다른 관계에도 영향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을 기준으로 한 만남과 관계의 판이 짜여있고, 그 만남과 관계 속에서 내 말과 행동의 길이 레일처럼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얼핏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기차가 레일 바깥으로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 할 수 없습니다. 기차 바퀴로는 땅을 달릴 수는 없기에 푹푹 빠져서 가라앉을 것입니다. 우리 삶이 어렵고 힘들고 마음이 지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이 짜놓으신 레일 위를 달리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어떻게 해야 이 판을 깨뜨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언행의 레일 위를 벗어나지 않고 달릴 수 있는가를 다른 표현을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읽은 10~14절에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온 여자를 아내로 삼는 규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전쟁에서 지면 남자는 죽이고 여자와 아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 온 여자를 아내로 삼고자 한다면 밟아야 할 절차가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살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살인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에서 빠져나가는 경우라면, 포로로 잡혀 온 여자가 선민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아담을 위해 에덴동산을 예비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선민을 위해 그물망처럼 짜놓으신 관계의 판 안으로 새로운 사람이 영입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여자는 이제까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애초에 주권자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삶의 판을 짜놓으신 것 자체를 모릅니다. 내가 해야 할 말과 행동의 길이 이미 놓여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제멋대로 관계하며 만나는 대상이 마음에 들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합니다. 살인이 상징하는 행위를 마음대로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자가 선민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을 깨뜨리지 않을 준비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언행의 레일을 달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12~13절을 보면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는 것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사는 동안 계속 자라는 것이 머리털과 손톱입니다. 다시 말해 머리털과 손톱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역사이자 여정입니다.

다만 선민이자 구원받은 자의 삶이란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곧 내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여 당신을 상대자로 내어주셨듯이, 나도 하나님을 상대자로 선택하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무관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마주하는 자들의 삶의 판으로 들어오려면 예전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예전 삶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짜두신 판은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여자를 위한 판만 깨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위한 판이 깨지고 자녀에 대한 판도 깨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제까지의 삶의 여정을 완전히 죽여버리고 새롭게 태어나야만 합니다. 머리털을 밀고 손톱을 베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머리카락과 손톱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처럼 이제부터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라는 말씀은 사회적으로 신분 의식이 완전히 바뀜을 의미합니다. 선민이라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 의식을 가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로 하나님의 자녀를 자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을 제일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라봄이란 모든 일이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루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선민이라면 항상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민의 기본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선민의 신분 의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이제 내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마주하는 사람이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로 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경우였다면, 이방인 남자가 선민의 사회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남자의 경우는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내 사라를 볼 때도 사라 앞에서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아들 이삭을 볼 때도 이삭 앞에서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적들을 보거나 왕을 대면할 때도 그들 앞에서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상대하고 마주하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을 관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 할례의 의미입니다. 다만 여자에게는 할례를 할 수 없기에 이에 상응하는 의미를 담아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포로의 의복을 벗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털을 밀고 손톱을 베는 것이 개인의 삶의 역사를 지움을 의미하고, 포로의 옷을 벗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의식을 가짐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부모를 위하여 애곡함도 이러한 의미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제 선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부모가 준 육체를 기준으로 맺었던 모든 관계가 단절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맺었던 관계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면서 마음이 매여있는 한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을 깨뜨릴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을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선민이 아니었을 때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은 채로 육체로 만나며 이룬 관계는 다 끊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한 달 동안 애통해하면서 그동안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그 부모님과의 관계를 끊고, 부모님이 주신 몸으로 맺었던 모든 관계를 다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을 깨뜨리지 않고, 모든 만남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뜻의 레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말로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던 종교인의 구간은 이방 여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짜놓으신 판을 항상 깨뜨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 사람이 있게 하시고, 사건이 있게 하시고, 문제가 있게 하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믿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감사뿐입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라도, 아무리 어렵고 힘든 난관이라도 하나님에 의한 있음을 안다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의 있음도 하나님이 결정하시기에,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문제와 상황의 있음은 당연히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을 깨뜨리지 않고, 사람과 문제와 상황을 마주했을 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레일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정해 놓으신 레일로 가기 위해서는 주어진 사람이나 문제나 상황을 거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부하지 않음이란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상대해야 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땅에 머물며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들을 상대한다면 자꾸 거부하면서 판을 깨뜨리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의 모든 대상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향하여 살아있습니다. 포로의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새로운 신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벰이란 이제까지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았던 삶의 여정을 다시는 이어가거나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미합니다. 이제는 육체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 내가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합니다. 만남에 대해서 스스로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를 위해 한 달 동안 애통함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몸으로 만나는 대상들에 대해 반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15~17절은 두 아내에게서 아들을 보았을 때 임의로 장자를 결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두 아내가 있는데 사랑하지 않는 아내가 먼저 아들을 낳았고, 사랑하는 아내가 나중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둘째를 장자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이 미리 짜놓으신 판을 깨뜨리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편애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짜놓으신 판이 깨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요새 가장 좋아하는 대상을 최애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편애하거나 최애로 여기는 대상이 있다면, 질서정연하고 선후가 명확한 하나님께서 짜놓으신 내 삶의 판은 깨지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편애와 최애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대상으로 인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짜놓으신 삶의 판은 반드시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아내가 첫째 아들을 낳았고, 사랑하는 아내가 둘째 아들을 낳았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장자는 두 배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아내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유산을 덜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입니다. 그런데 내가 편애하고 최애로 여기는 대상이 있다면 이것은 뒤죽박죽이 되고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은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이 깨지면 이로부터 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동도 모두 정해 놓으신 레일을 벗어나게 됩니다. 깨진 판 위에서 레일을 벗어나는 말과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수 없습니다. 평강과 만족이 이루어지는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이 유지되고 모든 만남의 순간에 말과 행동이 레일 위를 갈 때 평강과 만족의 삶은 가능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이라는 기준에 맞추어진 성공적인 삶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편애가 있고 최애가 있다면 불가능합니다. 세상 것을 좋아함에 대한 기호가 있다면 판은 깨지고 말과 행동도 레일을 벗어나게 됩니다. 세상에 좋아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삶이 부자유스럽고 힘들고 지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을 기준으로 살 때 마음에 행복과 평강과 기쁨이 임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대로만 하면 될 뿐입니다.

 

18~21절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패역한 아들에게 내리는 벌에 대한 규정입니다. 십계명의 제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부모가 공중 앞에 끌어내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라 하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부모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 말에 순종해야 할까요? 영적으로 보자면 부모가 가나안 일곱 족속과 다를 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34~37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를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 역시 하나님께서 짜놓으신 판을 깨뜨리지 않고,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레일 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를 있게 하신 통로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부모를 매일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부모를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셨다.’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부모와의 관계가 상징하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중에 나는 부모를 상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항상 가져야 하는 기본적 태도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는 하나님이 나를 있게 하셨음을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보면서 내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다음 단계로 스스로 뜻을 가지고 말과 행동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순종의 의미입니다. 내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말과 행동도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표현을 통해 상징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부모를 보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부모를 통해 있게 된 자입니다. 내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에 말과 행동을 하는 뜻도 내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에 스스로 뜻을 내서 말과 행동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전부 스스로 뜻을 내서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하신 것은 선민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 될 뜻도 반드시 외부에서 주어져야 합니다.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께 나의 말과 행동을 위한 뜻도 준비되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패역한 아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신 것은 이와 같은 선민은 세상으로부터 없음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21~23절은 죽을죄를 범함으로 그를 죽여서 그 시체를 일벌백계의 의미를 담아 나무에 매달되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시체는 하나님의 뜻이 끊어진 대상입니다. 죄인의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것은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면 곧 선민의 사회에서 없음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놔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땅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해가 뜨면 사람은 활동을 합니다. 선민은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 위에서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내 앞에서 있음이 되게 하신 사람과 사건과 문제와 과제들을 향하여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해가 뜨는 시점에 하나님의 뜻이 끊어진 대상인 시체를 볼 때 땅이 더럽혀진다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이 끊어진 상태의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판이 깨지게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시체를 활동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매달아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라고 하심은, 말하고 행동하는 활동은 반드시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없는 일에 손대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시체를 중앙에 두고 사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총괄할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날마다 짊어짐이란 내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아예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죽어서 세상을 벗어나야 하나님께서 내몸을 중심으로 짜놓으신 관계의 판은 깨지지 않습니다. 또한 그 판에서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내몸을 움직이십니다. 그럼으로써 레일을 벗어나지 않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서 없어져야 하나님이 짜놓으신 판은 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세상에 대해서 살아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지 판은 깨집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몸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 직접 반응을 하면 판은 깨지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마음으로 반응하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올 한 해의 판을 다 짜두셨습니다. 내 앞에 누가 있음이 될 것이고, 어떤 사건이 있음이 될 것이며, 어떤 문제가 있음이 될 것인가는 이미 하나님께서 짜놓으신 판입니다. 내가 반응하면서 싫다고 거부하고, 내가 반응하면서 좋다고 편애하거나 최애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판을 뒤죽박죽으로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무엇이 내 앞에 있음이 되든지 감사함으로 판을 깨지 않고 수용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 됨의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면, 모든 만남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려집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하지 않으셔도 내 마음이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가 분명하고 세상에 대해 죽음이 분명하면, 그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서 말하고 행동하면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반대로 내가 살아서 내 앞에 있음이 된 사람과 사물과 사건에 대해 거부하거나 끌어당깁니다. 최애로 삼거나 편애하면서 반응한다면 무슨 말과 무슨 기도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무조건 판을 벗어나는 일이 됩니다. 아무쪼록 이미 짜놓으신 판을 깨뜨리지 않고, 그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의 순간에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레일을 벗어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든든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이라는 기준으로 에덴을 준비하셨듯이 이미 우리 삶의 판을 다 짜놓으셨습니다. 또한 그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만남마다 말과 행동의 길까지 정해 놓으셨습니다. 어찌하든지 이 판을 깨지 않고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해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