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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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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하나님의 작심삼일을 막아라_태승철

by 태승철 · 26-01-12 09:19 · 156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의 작심삼일을 막아라>의 줄거리 :

선민인 우리로 인해 하나님은 본의 아니게 작심삼일을 반복하시게 됩니다. 나를 통해 이루시려고 세우신 모든 뜻과 계획이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작심삼일이 되어버리고 마는 일이 수없이 반복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작심삼일이 되도록 하는 일이 바로 살인입니다. 살인으로 상징되는 모든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세워두신 계획과 뜻을 끝까지 실행하지 못하시고 작심삼일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작심삼일을 막아라

 

(신명기 21:1~9)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2. 너희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나가서 그 피살된 곳의 사방에 있는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3.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4. 그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5.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6.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7.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9.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

 

 

본문은 상당히 특이합니다. 이 특이한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작심삼일을 막아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이 제목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뜻과 계획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우리처럼 작심삼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신실하심으로 한 번 정하신 일은 끝내 이루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계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계약의 당사자인 우리가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가 계약의 취지를 따라 온전함을 염두에 두시고 뜻하시고 계획하셨지만, 우리가 계약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뜻과 계획이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함을 드러내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께 작심삼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온전해야 하나님은 나와 관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와 관계하심을 염두에 두시고 이 땅에서 이루어질 뜻과 계획을 짜두셨습니다. 그런데 내 온전함이 삼일을 가지 못한다면 내 온전함을 기반으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작심삼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의 온전함이란 삼일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작심삼시나 작심삼분 심지어 작심삼초도 어려울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온전함이 3초는 갑니까? 3분은 유지됩니까? 3시간은 유지가 돼요?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된 내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1~9절에는 특이한 경우가 언급됩니다. 살인이 일어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범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입니다. 오늘날은 과학수사대가 있고 언론을 통해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어 배포할 수 있기에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들판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목격자가 없다면 범인을 찾는 것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시체는 발견되었지만 범인을 색출하지 못하는 미제 살인 사건에 대한 절차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미제 살인 사건이 벌어졌을 경우 선민의 사회 전체가 죄를 뒤집어쓴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나고, 선민의 사회 전체에 뿌려진 죄를 속량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속량의 절차는 특이하게도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송아지를 물이 항상 흐르는 골짜기로 데려갑니다. 그 골짜기는 반드시 한 번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경작을 한 곳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장로들은 골짜기에서 암송아지의 목을 꺾어 죽인 후에 물로 손을 씻습니다. 여기서 암송아지는 살인범을 가리키기에 목을 꺾어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씻음에는 살인과 무관하며 살인범과 완전히 결별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얼핏 이러한 말씀은 오늘날과는 무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3600년 뒤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러한 상징적 행위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선민의 삶에는 판이 있습니다. 선민은 길거리에 돌멩이처럼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관계는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면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연결된 선민의 사회에서 미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 대상을 고의로 없앤 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물망처럼 연결된 선민의 삶의 판을 뜻하고 계획하셨는데, 살인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그 뜻과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물망에서 있음으로 계산된 한 사람이 누락된 것이고, 몰래 살고 있는 살인범도 선민의 그물망에서 누락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을 포함하여 만드신 선민의 판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연결망을 기반으로 뜻과 계획을 짜셨는데 살해당한 자와 살인범이라는 두 사람의 부분만큼 구멍이 생긴 것입니다. 살해당한 자는 있음이 없음이 되었고, 살인범은 있기는 하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선민의 사회란 결국 구원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관계의 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구원받은 자임을 전제로 뜻과 계획을 세우셨지만 살인사건을 통해 더는 그 뜻과 계획을 유지하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8절을 보면 암송아지의 목을 꺾고 손을 씻은 장로들이 해야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라고 속량을 구합니다. 이처럼 속량을 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짜 놓으신 계획과 판도가 전체적으로 깨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깨지게 된 선민의 삶의 판도를 복원해 주시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로들에게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멘 적이 없는 암송아지를 항상 물이 흐르고 경작을 하지 않은 골짜기로 데려가서 목을 꺾게 하셨습니다. 소와 항상 흐르는 물과 밭은 3600년 전 선민의 삶을 위한 기본 조건이었습니다. 농경 생활을 위해서는 소와 물과 밭이 있어야 했습니다.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멘 적이 없는 암송아지를 항상 물이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데려가라고 하심은 새 판을 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살해당한 자와 살해범의 두 사람 분량의 구멍이 생긴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선민의 사회 전체 판도는 깨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선민의 삶의 판도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짜셔야 함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상징성은 찾아내기도 어렵고 찾아내서 보면 참 희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판을 새로 짬으로써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시 시작됩니다. 그리고 백성의 대표인 장로들은 암송아지의 목을 꺾고 손을 씻음으로써 살인자와는 상관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로부터 살인자는 구원받은 선민의 사회에서 완전히 제외됩니다. 선민들 사이에 숨어 살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구원받은 선민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계획을 짜십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인생 전체를 근원적으로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선민이라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먼저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민이란 마음으로 첫 번째 상대를 하나님으로만 선택하여 유지하는 자들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항상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과 묶여야만 합니다.

이것은 몸으로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문제를 대하든지 유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묶여있기에 사람이나 문제는 언제나 제3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자는 물론이고 배 아파서 낳은 자식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 밖에 있기에 제3자가 됩니다. 이러한 전제를 놓고 볼 때 선민의 삶에는 죄의식이 필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의식이란 죄인이라는 의식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의식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주 보는 아들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는 죄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 마음이 첫 번째 대상이신 하나님을 빗나가는 죄의 위험성은 제3자를 만날 때 생겨납니다. 몸으로 만나는 제3자를 마음의 첫 번째 대상으로 직면할 때 하나님을 놓치는 빗나감의 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이 있어야만 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제3자로 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민의 기본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선민의 삶은 시작됩니다. 내가 몸으로 만나는 사람이나 대상은 제3자입니다. 3자로 인해 마음이 평강과 만족의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기쁨이 깨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크게 가진 상태여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상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제3자를 마음이 마주할 당사자로 삼고 십자가에서 죽으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애초에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과 내가 묶인 상태에서 삶의 현장에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과 평강을 유지하면서 누구를 만나든 문제를 대하든 제3자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만족과 평강은 제3자와는 무관할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가짐으로써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가져서 제3자가 사소하게 느껴지는 상태야말로 존재의 온전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내몸을 장갑처럼 끼시면서 제3자에 대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내가 몸으로 대하는 제3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임을 계산에 넣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온전함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온전함으로 이루실 뜻과 계획을 세우셔서 내 인생의 판을 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함을 유지하는 나를 통해 오늘 이루실 뜻, 한 주간에 이루실 뜻, 한 달 동안 이루실 뜻, 1년 동안 이루실 뜻, 10년 동안 이루실 뜻, 내 평생을 통해 이루실 뜻을 계획하십니다. 이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조금도 어렵거나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항상 나를 향한 최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보시기에 좋게 내 인생을 계획하시고 판을 짜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제3자를 만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오늘의 뜻은 내일로 연결되며, 내일의 뜻은 또 모레로 연결됩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 이루어질 일로부터 1년 뒤 10년 뒤에 일어날 일까지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의 계획을 세우시되 보시기에 안 좋은 계획을 세우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우신 계획이 마치 작심삼일처럼 너무나 쉽게 깨져버립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획이 작심삼일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함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묶여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온전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묶임은 끊어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세우신 내 인생에 대한 최선의 계획들도 다 깨지고 맙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대로 우리의 온전함은 3일도 가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하나님이 계획은 단 3일조차도 차분히 이루어져 갈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묶여서 하나님만을 마음이 마주할 당사자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만나는 제3자를 마음이 마주할 당사자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3자는 어디까지나 제3자여야만 합니다. 3자를 통해 기쁨을 얻을 필요가 없고 기대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으로 충분히 평강과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작 3일도 지속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계획 또한 작심삼일이 되어버립니다. 작심삼일은커녕 작심삼시도 안되고 작심삼분이나 작심삼초도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식 없이 생활 속에서 제3자를 당사자로 만납니다. 집에서는 자녀와 배우자를 당사자로 만납니다. 회사에서는 직장 동료를 당사자로 만납니다. 문제가 터지면 문제를 당사자로 만납니다. 3자여야 하는 세상일을 당사자로 삼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는 대상들을 제3자로 여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하나님과 꽁꽁 묶인 상태가 될 때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평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만 누구를 만나든 어떤 문제를 만나든 제3자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서 제3자들에 대한 뜻도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 뜻은 내일로 연결되어 있고, 또 내일의 뜻은 모레와 연결됩니다. 그렇게 10년 뒤, 20년 뒤에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하나님과의 묶임을 유지하지 못하여 제3자를 당사자로 여긴다면, 오늘부터 이어져 나갈 하나님의 뜻은 다 깨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순식간에 또 다른 계획을 세우십니다.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송아지를 끌고 항상 물이 흐르는 경작한 적이 없는 골짜기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이제까지의 연장선이 아닌 새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암송아지의 목을 꺾게 하십니다. 이는 곧 살인자의 목을 꺾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인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입니다. 꼭 사람을 죽여야 살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제3자를 마음으로 반응하면서 거부하고 뿌리쳤다면 살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한 있음을 거부하여 없음으로 만들고, 내가 원하는 것을 있게 하고 싶은 살인자의 목을 꺾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판을 짜실 때 이 살인자는 새 판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마치 자동차의 내비게이션 같습니다. 내비게이션은 목적지를 설정하면 그곳까지의 경로를 다 가르쳐줍니다. 이미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하고 내일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하셔서 마지막 목표까지 연결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로를 이탈한다는 것입니다. 지정된 경로를 이탈하면 내비게이션은 곧바로 다른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를 이탈한 지점에서 다시 최선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경로를 이탈할 때마다 이 작업을 반복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오늘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면 내일의 뜻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내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 모레의 뜻으로 연결됩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처럼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의 삶은 최선으로 진행되어 갑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탈하는 순간 하나님은 내비게이션보다도 더 빠르게 당신이 보시기에 좋을 최선의 새 판을 짜십니다. 제가 67년을 살았는데 이 기간에 하나님께서 저 한 사람의 인생 경로를 몇 번이나 재탐색하셨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탐색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에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도무지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신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일정한 과정과 일정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만나는 상황이나 문제나 사람을 제3자로 볼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마음에서 문제나 사람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제3자로 볼 수 있을 만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묶이는 시간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자꾸 몸으로 만나는 제3자에게 흘러갑니다. 이제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갔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경로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면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도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경로를 재탐색하실 때마다 내가 하나님과 묶이는 것을 전제로 하십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이 제3자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하시고 계획하시며 새 판을 까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판을 까시기가 무섭게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무너진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은 도무지 결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진리임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민의 사회에서 제외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경로를 재탐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제대로 붙잡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제대로 갖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임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아예 하지 않게 된다면 어떨까요?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일상생활에서 인정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고, 십자가 생활화 자체가 근절되었다면 그러한 사람의 생애는 소모품이 되어버립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알고 이것만이 길이고 진리임을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유지합니다. 다만 아직도 죄의 체질을 벗지 못하여 제3자를 마음에 담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작심삼일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십자가가 유일한 길임을 믿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작심삼일로 재탐색을 반복하시더라도 우리를 놓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예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다면 이제 하나님의 재탐색도 없습니다. 이로부터 소모품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나를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요 주권자로서 당신의 주권을 이 땅에 펼쳐 나가시기 위한 소모품으로 쓰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에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열둘뿐이었으니 확률은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에 들어왔으면서도 구원에서 영원히 제외되었습니다. 구원 사역의 수혜자가 아닌 구원 사역을 위한 소모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제3의 대상을 끊임없이 마음에서 당사자로 만납니다. 이렇게 마음이 빗나가고 있으면서도 죄의식이 하나도 없이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가룟 유다와 같은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민의 인생은 하나님을 날마다 더 크게 갖고 많이 갖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이 하나님과 묶이지 못하고 하나님과 친해질 수 없다면 몸이 죽은 다음에 천국에 못 갑니다. 사는 동안 마음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천국으로 가서 아버지와 꽁꽁 묶이고 날이 갈수록 아버지를 크게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나도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아버지 있음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게 하시고, 아버지 좋음의 만족감이 점점 커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어떤 제3자를 만나든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를 깊게 가지게 하시고 크게 가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많이 가지게 해달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크게 갖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는 이루어집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세상에서 만나는 제3자를 당사자로 여기며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를 죽은 자로 여기고 자녀든 아내든 남편이든 그 누구든 제3자로 밀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사자 되시는 하나님을 마주 보고 하나님을 마음에서 크게 느끼고 크게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는 이루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하나님을 크게 가지게 됩니다.

당장 하나님을 크게 가지지 못한 상태라도 주님과 함께 죽을 수는 있습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내몸으로 만나는 제3자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3자가 당사자가 되면 안 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써 나의 당사자는 영원히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오늘도 내일도 내가 만나는 제3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나를 도구로 삼아 이루어져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심삼일을 넘어서 작심삼년, 작심평생의 마음으로 뜻과 계획이 유지될 수 있게 해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작심삼초, 작심삼분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작심평생이 될 수 있도록 해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시고 이루시겠다고 결심하신 바가 꺾이지 않도록,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아버지 앞에서 존재의 온전함을 지탱해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를 작심삼일 하게 하는 나는 아버지에 의한 있음을 직접 반응하며 거부하는 살인자입니다.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멘 적 없는 암송아지의 목이 꺾이듯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런 살인자인 내가 죽게 해 주시옵소서. 작심삼초 작심삼분이 되게끔 아버지를 몰아붙였던 내가 죽음으로써 작심평생에 걸쳐 아버지가 뜻을 이루어 가시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