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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의 완벽한 새해 세팅>의 줄거리 :
새해 소원. 새해 축복. 다 새삼스럽고 이방인이 하는 일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듯이 백지 위에 새롭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어지는 영적 사실들이 있습니다. 이런 영적 사실들로 이루어진 세팅이 전혀 없이 백지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태도를 보이면 선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에덴을 준비하신 것처럼, 새해를 맞이하는 선민인 나를 위해서도 이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세팅해 놓으셨습니다. 새해에 우리의 일은 이 완벽한 세팅에 발맞추며 충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새해 세팅
(신명기 19:1~21)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4.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잡아 죽일까 하노라
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우리가 읽은 1~7절까지는 도피성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 이후에는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과 위증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의 완벽한 새해 세팅>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1월 1일 날 자취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던 아들아이가 강릉에 왔습니다. 아들아이를 데리러 강릉역에 나갔는데 오후 2시 무렵인데도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모습이 다들 초췌했습니다. 12월 31일에 내려와서 밤을 꼬박 새우고 해돋이를 본 사람들입니다. 강릉 해변에서 뜨는 해를 보며 새해 소원을 빌고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축복합니다. 그러나 새해를 맞이해서 소원과 복을 비는 행위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새삼스러운 이방인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며 맨땅에 헤딩하듯이 백지를 제공받는 것과 같은 착시 현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내 마음에 환경으로 주어지는 영적 사실들이 있습니다. 물론 새해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뜨는 해를 보며 소원을 빌거나 다른 사람에게 덕담을 하며 축복하는 것은 선민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사실은 ‘새해에는 이미 받은 복을 누리세요.’라고 하는 말이 맞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엄연한 영적 사실들이 내 마음이 놓여야 하는 세팅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기 전에 에덴을 세팅해 주셨던 것처럼, 새해를 맞이하는 선민을 위해서 완벽한 세팅을 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 우리가 할 일이란 완벽한 세팅에 발맞추며 충돌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도로 차가 돌진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충돌을 피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2026년 새해를 완벽하게 세팅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새해에 할 일은 소원을 빌거나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완벽한 세팅 안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충돌을 피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것을 더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은 하늘에서 일어나고 땅에서 일어납니다. 하늘 세팅은 천국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의 환경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습니다. 또한 땅에 있는 십자가에서 출발해 유리 바다를 지나 하나님 보좌까지 이르는 부활 승천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백의 마음인 영에 주어진 하늘 세팅입니다. 우리는 다른 복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팅 안에 머물면서 충돌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땅 세팅이 있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질 삶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조물주 하나님이 24시간 365일 주권자로 살아계시면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며, 미리 생각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따라서 한 해 동안 내 삶을 위해서 하지 말아야 일이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소원 갖지 않기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소원 이외에 내가 가져야 할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둘째는 계획과 목표 갖지 않기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과 목표 이외에 내가 따로 세워야 할 다른 계획과 목표는 필요 없습니다. 계획과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허락하신 완벽한 세팅에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관심과 사랑을 갖지 않기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대해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은 필요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충분하고 넘치기에 내 삶에 대해 다른 관심과 사랑을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넷째는 능력 구하지 않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과 계획과 목표를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 이외의 나의 능력이나 다른 사람의 능력이 동원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내 삶에는 한 해를 위해 소원과 계획과 목표와 관심과 사랑과 능력에서 완벽한 세팅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여기며 새해를 출발하는 것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소원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지만 선민은 하나님이 이미 예수님 안에서 준비해 놓으신 완벽한 세팅 이외에 더 이상 받을 복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소원과 복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새해 소원이나 축복은 선민에게는 함정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마음의 완전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세상 것들이 사소하고 티끌처럼 여겨질 만큼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크게 가지는 것이 마음의 완전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완전함에서 출발해서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팅하신 우리의 삶은 완전함에서 출발하여 불완전함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마음은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가고, 삶의 세팅은 완전함에서 불완전함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세팅에 발맞추어 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첫 번째로 도피성을 말씀하십니다. 도피성은 고의가 아닌 사고로 이웃을 죽인 자가 피할 곳입니다. 두 번째는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경계표는 땅의 경계를 표시해 둔 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이웃에 대해 위증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도피성에 대해 살펴봅니다.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경우는 부지중에 타인을 살해한 경우입니다.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자는 즉시 돌로 쳐 죽여야 했습니다. 도피성은 전국 어디에서든 똑같은 거리에 위치하도록 요단강 동편에 세 곳, 요단강 서편에 세 곳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도피성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먼저 살인의 의미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살인이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에 의한 있음을 내가 없음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내 삶에서 주권자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광범위한 의미에서 보자면 내 마음에서 거부하고 못마땅해하는 모든 일이 살인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있게 하신 것을 거부하여 마음에서 없애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삶에 그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의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 사람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몸이 아프다면 건강이 안 좋은 상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있음을 내가 마음으로 거부하고 싫어하고 못마땅해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마음에서 살인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이 형통하지 못한 상태가 있는데 이것을 마음에서 거부한다면 이미 살인이 일어난 것입니다. 취직이 안 되고, 승진이 안 되는 상황이 있는데 내가 거부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살인입니다.
내 삶에서 벌어지는 잘 됨이나 안 됨은 모든 것을 있게 하시고 또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안 됨의 있음을 거부하며 결핍감을 느끼고 못마땅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 상황을 거부하며 없애려는 일종의 살인입니다. 그런데 새해를 맞이해서 소원을 가질 때 이러한 살인이 나타납니다. 현재 상태의 있음이 마음에 안 들어 거부할 때 이미 살인을 한 것입니다. 현재의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있음을 내가 마음으로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은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것이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있음에 관여하려 합니다.
모든 소원은 현재 상태의 있음에 대하여 부족감을 느끼면서 거부하여 새롭게 내가 원하는 있음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살인의 의미를 밑에 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인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든 상황이든 문제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있음을 거부하지 않는 방법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감사하는 자는 소원을 갖지 않습니다. 삶에 대해서 감사하는데 다른 소원을 갖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소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갖는 것은 삶에 대한 소원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소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내 삶은 하나님의 소원으로, 하나님의 목표와 계획으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이 세팅을 알고 있다면 감사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설령 안 좋게 여겨지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에 의한 있음이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무조건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이 있게 하신 나를 거부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관점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는 상태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는 상태는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 목숨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목숨이 지탱되는 동안에 내 마음은 죄와 저주에 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귀에 의해서 있게 된 것이지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게 아닙니다.
이로부터 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나의 상태는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이 아니기에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를 거부함이란 결국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살인입니다. 그냥 내가 나를 죽이면 자살입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죄와 저주가 극복되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러한 살인의 의미로부터 도피성이 제시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피하는 장소입니다. 예를 들어 올해도 취직을 못해서 먹고살 길이 막연합니다. 먹고살 걱정을 하는 중에 이미 마음은 ‘돈이 없는 상태’의 있음에 대해 거부감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내가 ‘돈이 없는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거부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돈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돈이 없는 상태’는 나쁘다고 여기며 거부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내 마음에는 ‘돈이 없는 상황’의 있음에 대해 거부함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럴 때 선민이라면 이것이 부지중에 일어난 살인과 같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돈이 없는 상태’가 있게 되었음을 내 마음이 거부하는 것은 부지중에 일어난 살인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해지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없는 상태’는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다가 건강이 없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겨서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은 ‘건강이 없는 상태’의 있음에 대하여 거부함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부지중에 살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 봅니다. 어떤 사람이 싫습니다. 그런데 그를 객관적으로 따져보고 ‘이 사람은 이런 점이 안 좋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해야겠다.’라고 여겨서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는 거부함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뼛속까지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거부하는 살인의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 되며 지체하지 말고 떠나라는 뜻이 있습니다. 내가 거부하고 있는 대상을 피해서 얼른 십자가 예수님이라는 도피성으로 도망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은 망가지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들을 거부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이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민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의도적으로 일어나는 살인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부감 속에 빠져 있는 것은 같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어떤 일이 안 풀릴 때 그 상황에 대한 거부감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십자가로 도망가지 않고 거부감의 상태를 유지하며 행동으로 옮긴다면 의도적입니다. 내가 거부한 만큼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와 관심과 사랑에서 내가 거부됩니다. 보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나무를 하던 중에 도끼가 빠져나가는 바람에 옆 사람이 맞아 죽은 상황을 예로 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형제나 가까운 사람이 복수를 하겠다며 나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복을 피하려면 도피성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복의 상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보복은 나로 인해 죽은 사람과 가까운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과 계획에도 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나에게 ‘돈 없는 상태’를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돈 없는 상태’를 거부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돈 없는 상태’에 이어지는 다음 단계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현재로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돈 없는 상태’의 있음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거부한다면, 이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에 의해 나를 위해 준비된 것들이 다 없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에 의해 내게서 이루어지도록 준비되었던 뜻과 계획이 없어지는 것이야말로 나를 향한 보복입니다.
이러한 보복은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음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건강 없음의 상태, 돈 없음의 상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의 있는 상태를 비롯한 다양한 일들을 있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있음에 대해 내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면, 이로부터 이어져 나갈 하나님의 모든 선한 계획들이 사라지는 보복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보복을 당하기 전에 우리는 십자가라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없음의 상태, 건강 없음의 상태, 자녀가 말썽부림의 상태에 대해 거부반응이 일어난다면 이것이 부지중에 살인과 같다는 것을 얼른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상태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께로 도망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앞선 말씀을 통해 완전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도피성으로 피하는 것도 완전함을 위한 일입니다. 돈 없음의 상태, 건강 없음의 상태, 자녀가 말썽부림의 상태가 티끌같이 여겨질 정도로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크게 갖는 완전함을 지향합니다. 거부감에 사로잡힌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투명하게 합니다. 돈 없음에 대해 쓰는 마음 부분만큼, 건강 없음에 대해 쓰는 마음 부분만큼, 자식 말썽부림에 대해 쓰는 마음 부분만큼이라도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있게 투명하게 되어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렇게 하여 돈과 건강과 자녀의 형통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만큼 하나님을 갖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단계로 이어져 나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어 이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인을 피하는 길은 결국 있음의 문제입니다. 현재 눈앞에서 거부감이 드는 ‘있음’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 의한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소원과 복을 빕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연말에는 감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민의 태도가 아닙니다. 선민이라면 연초에 완벽하게 세팅된 하늘 세팅과 땅 세팅의 영적 사실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 하나도 거부하지 않고 연초부터 연말까지 감사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선민이 거부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죄와 저주에 찌든 나 자신입니다. 내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팔리실 때 유다에 대해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일 년 내내 무조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은 망가지지 않습니다. 2026년을 이렇게 감사만 하면서 사신 후에 어떤 차이와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연말에 간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간증이 이루어질지 무척 궁금합니다.
한편,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땅을 분배해 주셨고, 그 경계를 돌로 표시했습니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긴다는 것은 내 땅을 넓히고자 이웃의 땅을 침범함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의 주된 부분은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반응을 일으키면, 마음속에서 그 사람의 있음을 없애버리는 살인이 자행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할당된 땅의 경계표를 내가 밀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경계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이든 이웃이든 동료든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집사람을 대합니다. 그런데 집사람의 모습에서 내 마음의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부분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에 대해 마음에서 집사람을 죽이는 살인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집사람의 이런저런 부분이 마음에 안 든다고 여겨서 거부하는 살인이 발생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집사람에 대해 갖고 계셨던 계획과 목표에 차질이 생깁니다. 이것은 자녀나 이웃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면, 저와의 관계에서 그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과 목표가 허물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 살며 하나님의 온전한 세팅에 충돌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에 대한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온전한 세팅과 충돌을 일으키기에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에 대해 갖고 계셨던 하나님의 계획도 허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내가 관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십자가 생활화도 안 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허물어질 일이 없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십자가 생활화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적 상태를 아시고 그의 상태를 계산하시며 나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내가 완벽한 세팅 안에서 머물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완벽한 세팅에 충돌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갖고 계셨던 계획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거부반응으로 인한 여파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 위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마음의 거부감을 갖는 것이 살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못마땅해함을 유지하다 보면 내 의지로 타인을 함정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는 위증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내게서 이러한 태도가 나타난다면 나 자신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은 당연히 깨져버리고, 나의 완벽한 세팅을 전제로 진행되는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까지도 모조리 깨져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마치 나비 효과와 같은 파급력을 보입니다. 나와의 관계에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깨져버리면, 그가 맺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관계에서도 하나님이 본래 계획과 목표가 다 깨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완벽한 세팅을 다 깨뜨려 놓고 소원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주어진 영적 사실과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마치 그런 것은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내 소원으로부터 인생을 출발했습니다. 내게 허락된 한 해를 내 소원과 내 뜻과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어서 주어진 영적인 사실로 이루어진 완벽한 세팅은 휴지 조각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나와 관계된 사람에 대해 거부반응이 일어난다면 이미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계획하신 경계표까지도 다 없애버리게 됩니다. 심지어 이제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하려 하게 됩니다. 본래 우리가 다른 사람을 통해 얻을 이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나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가지면 됩니다. 그로 인해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 일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크게 가지는 마음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 앞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과 행동만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사람을 상대할 때 거부함으로부터 나타납니다. 좋아함이 마음에 담는 것이라면 거부함도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았기에 반응합니다. 거부하다 보면 그에게 위해를 가하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거짓말까지 만들어 내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은 이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나의 새해를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은 다 박살이 납니다. 내 마음도 하늘을 향한 완전함을 지향하지 못하고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새해에 모든 선민에게 완벽한 세팅을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야 함을 아는 모든 선민에게는 땅에서의 완벽한 세팅과 하늘에서의 완벽한 세팅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하늘 세팅과 땅 세팅에 완전하게 적응하여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올 한 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완벽한 하늘 세팅, 완벽한 땅 세팅에 충돌하지 않도록 허락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일 년 내내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감사로 일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땅에서 이루어진 완벽한 세팅을 망가뜨리지 않게 하시고, 하늘에서 이루어진 세팅을 통하여 내 마음의 완전함을 일 년 내내 지향하여 이루고 또 이루고 또 이루는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