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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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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하나님 도구로만 사는 법_태승철

by 태승철 · 26-01-08 08:59 · 133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한해를 하나님 도구로만 사는 법>의 줄거리 :

바야흐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치러야 할 가나안 정복 전쟁에 대한 지침을 말씀하십니다. 3600년 전에 내려진 이 전쟁에 대한 지침은 오늘을 사는 선민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살인이 하나님에 의해서 있음을 마음이 거부하는 태도를 상징하였듯이, 전쟁도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에 의해서 있음을 하나님 자신이 나를 도구로 삼아서 없음이 되게 만드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도구 삼아 당신이 있게 하신 것들에 대한 뜻을 이루어 가심을 상징합니다.

 

 

한해를 하나님 도구로만 사는 법

 

(신명기 20:1~9)

 

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2.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3.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우리가 읽은 1~4절에는 전쟁이 날 때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시며 구원하시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5~9절을 보면 전쟁에 보내면 안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못한 사람을 전쟁에 보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또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지 못한 사람도 전쟁에 보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사하면 그 과실은 포도원 주인이 아닌 타인이 먹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자와 약혼하고 결혼을 못한 사람도 전쟁에 보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전사하면 타인이 그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다소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이 함께 싸우시고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후에, 전쟁에 나가서 죽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한해를 하나님 도구로만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은 전쟁에 관한 말씀입니다. 앞서 우리는 도피성과 함께 살인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살인의 상징성을 기억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의미를 확장하시면서 형제에게 쓸모없는 놈이라고만 해도 살인죄가 성립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살인의 상징성이란 주권자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싫어하여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쓸모없는 놈이라고 하기만 해도 살인죄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을 내 마음이 거부함이란 내 마음에서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살인은 어떤 대상을 향해 거부하는 것이지만 더 깊은 의미에서 보자면 내 주체성으로 하나님의 주체성을 뭉개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못마땅해서 거부하여 살인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내가 주체로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판단 자체가 한해의 삶을 끊임없이 살인의 연속으로 이끌어갑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는 동안 못마땅한 면이 하루에 열두 번씩 보입니다. 사실 남편의 어리숙한 행동들은 아내의 마음에 웃음을 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냥 못마땅하게 여겨진다면 마음에서 남편에 대한 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남편 한 사람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살인을 하는지 모릅니다.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경우나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경우에도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대할 때, 재정 상태를 대할 때, 하는 일에 대해서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인의 연속으로 한 해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살인하고, 저 상황을 살인하고, 그 대상에게 살인합니다. 늘 못마땅한 마음에 살인으로 가득 채운 한 해를 살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시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루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마음에서 못마땅해하며 거부를 반복하며 살인을 하는데, 희한할 정도로 24시간 거부하지 않고 인정하는 대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완전히 쓸모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24시간 365일 거부하지 않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거부하지 않기에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나오는 살인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에 의한 있음이 다 못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을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죄와 저주 때문입니다.

반대로 죄와 저주가 없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라 해도 그 말씀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저주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상황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모든 것이 못마땅합니다. 선민이란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사람, 사건, 사물, 문제, 난관, 상황 전부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며 수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가 감사로 나타납니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단 하나를 부인하고 거부하는데, 그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일 년 내내 나 자신만 거부하면서 못마땅한 모든 일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우리 삶에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과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싫어하고 못마땅해하며 거부하려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있게 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죄와 저주에 빠진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인하지 않는 단계를 통해서 내 주체성이 거부되면, 삶에 대해서 자꾸 판단하는 주체가 되려는 나를 거부합니다. 삶에서 나타나는 대상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있음을 그대로 인정하며 감사합니다. 원수라도 감사하고, 일이 안 돼도 감사하고, 병이 나도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쓰시는 단계가 찾아옵니다. 내가 몸으로 만나는 있음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나를 죽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있음 자체를 감사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 단계가 지나서 내 주체성이 부인되면 있게 하신 하나님의 주체성만 존중받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쓰시는 단계가 시작됩니다. 내가 하나님에 의한 있음을 인정한 대상에 대해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쓰시기를 원하신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주체성에 의한 있음을 살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앞에 나타나는 일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내 주체성을 죽여 거부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주체성만이 내가 만나는 대상 사이에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안 벌리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돈이 안 벌린 상황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려 하다가 도피성으로 피하는 것처럼 이건 아니다.’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재정 상태가 어려운 상황도 있음이고, 세상에서 남아 있는 내몸도 있음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성으로 내몸과 재정 상태를 움직여 가십니다. 주체성이 죽은 나를 도구로 쓰셔서 재정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자녀가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못마땅한 자녀의 있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합니다. 자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거부함을 통해 마음에서 살인을 하려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그럴 때 나와 자녀는 하나님 앞에 있게 됩니다. 이제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에 의한 있음으로 인정한 자녀에 대해 갖고 계신 뜻을 나를 통해서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의 전쟁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따져보면 거부함과 살인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2025년의 많은 날들을 살인으로 소모했던 것입니다. 이제 2026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살인이 하나도 없고, 거부함이 하나도 없고,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의 흔적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주체적인 삶이 아닌 하나님 도구의 삶으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전쟁을 통해서 도구적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전쟁을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또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이미 국가 체제를 완비하고 철 병거와 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미 철기 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에 비해 이스라엘 민족은 몇 백 년이나 노예 생활을 하다가 광야로 나왔을 뿐입니다. 광야에서 사십 년을 지낸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 같은 국가 체제도 없었으며 철 병거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1절과 4절을 보면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에서 하나님이 직접 싸우시고 이기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선민의 가나안 진입 전쟁은 지금으로부터 360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선민은 전쟁을 통해서만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이 갖는 의미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싸울 대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본문의 전쟁과 관련하여 의문점이 하나 생깁니다. 앞서 우리는 도피성과 살인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살인이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있게 하신 것을 내가 없애는 것입니다. 한편, 전쟁이란 적군을 죽이는 일입니다. 여기서 적군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전쟁터에서 하나님에 의한 있음을 인정하려면 적군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죽어야 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러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전쟁에 내보실 때는 적군을 죽이기 위해 내보내신 것입니다. 다만 절대로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대상들을 없게 만드는 것이 전쟁입니다. 따라서 있게 하신 하나님만이 그 적군들을 직접 없애십니다. 내가 전쟁에 나간다고 해서 내가 적군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살인에 담긴 상징성이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있음을 내 마음이 거부함으로써 없애는 것입니다. 한편, 전쟁의 상징성이란 하나님에 의한 있음을 나를 도구로 쓰셔서 없애십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을 하나님 스스로 없애시는 것이 전쟁입니다. 다만 나를 도구로 쓰셔서 해나가십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된 전쟁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은 복지의 삶입니다. 이것을 위해 치러야 할 전쟁이 있습니다. 전쟁이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을 하나님이 없애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모든 것에 대해서 갖고 계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본문에서 언급된 전쟁이란 단순히 있음을 없음으로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에 대해서 당신의 뜻을 펼쳐 나가시고자 나를 도구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2~4절을 보면 제사장은 전쟁에 나가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격려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이 격려의 내용이란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선민으로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내 앞에 제3의 대상이 나타나는 것이 전쟁의 상황입니다. 이 제3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도전으로 작용합니다. 3의 대상을 앞에 놓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험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험대에 놓이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관계하느냐가 시험대에 놓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앞에 제3의 대상이 제시될 때 그 대상 앞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관계하느냐가 문제시되는 것입니다. 3의 대상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3의 대상 때문에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로 겁내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겁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카크는 본래 부드럽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적군이라는 제3의 대상 앞에서 마음이 부드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1의 대상이고, 내가 제2의 대상이라면, 내 앞에 나타난 적군은 제3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양자관계에 제3의 대상이 등장한 상황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겁내지 말라는 말씀은 제3의 대상에 대해 내 마음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으로 제3의 대상이 아무 저항 없이 쑥 들어오는 상태가 된다면, 하나님은 나를 도구로 쓰셔서 제3의 대상에 대한 당신의 뜻을 펼쳐 나가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놓되, 3의 대상에 대해서는 굳건한 철문으로 막아야 합니다. 우리의 철문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제3의 대상에 대해 무척 온유하고 부드럽습니다. 어떤 대상이 나타나면 환영하듯이 속으로 쑥 받아들입니다. 옛날에 드라큘라 영화에서 십자가를 들이대면 드라큘라가 도망가는데, 3의 대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의 양자관계에서만 온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앞에 나타난 제3의 대상에 대해서는 철벽을 쳐서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마음으로 제3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펼쳐 나가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겁내지 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카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두 번째로 두려워하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레는 마음이 짓눌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3의 대상은 적군을 포함하여 내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펼치시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포함됩니다. 두려워함이란 이러한 대상을 너무 크게 보는 상태입니다. ‘야레는 제3의 대상의 존재의 무게에 내 마음이 짓눌리는 상태입니다. 3의 대상을 너무 크게 느끼는 나를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나의 양자관계에서 제3의 대상이 크게 느껴진다면 얼른 십자가에서 죽어서, 3의 대상에 대한 존재의 느낌을 하나님 존재의 느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은 나를 도구로 쓰실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제3의 대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돈 문제가 너무나 크게 보여서 마음이 짓눌려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돈 문제에 대해 갖고 계신 뜻을 이루어 가실 수가 없습니다. 내게는 제3의 대상이 티끌처럼 여겨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나를 도구로 쓰셔서 뜻을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떨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떨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파즈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에 혼비백산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넋이 나가서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선민의 말과 행동이란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이 주어짐으로써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이 내 안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혼비백산하여 아무런 판단과 생각도 없이 넋이 나가버린 상태입니다. 3의 대상의 모습이 너무 강력해서 마음에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이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비백산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제3의 대상 앞에서 십자가에서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겁내지 말며라는 표현을 통해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제3의 대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됨을 말씀하셨고, “두려워하지 말며라는 표현을 통해 제3의 대상의 존재감에 짓눌려서는 안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떨지 말며라는 표현은 제3의 대상에 대해 요동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제자들이 혼비백산했던 것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부로서 배 타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닥친 풍랑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판단과 생각이 죽고 넋이 나간 상태가 된 것입니다. “떨지 말며는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로 놀라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놀람이란 제3의 대상에 대해 의지와 기세가 꺾여서 아무 말과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제3의 대상에 대해 당신의 뜻을 밀고 나가시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지 자체가 죽어버린다면 나에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담길 수 없고 어떤 시도도 감행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섰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만약 모세가 바로의 권세에 눌려서 의자와 기세가 꺾였다면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은 온전히 실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의지란 나의 의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라고 하신 단계를 지나면서 마음이 부드럽게 제3의 대상을 받아들이거나, 3의 대상의 존재를 크게 느끼고, 3의 대상 앞에서 혼비백산하거나, 3의 대상 앞에서 기가 죽어서 주눅이 든다든지 하는 모습이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쓰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리해 봅니다. 3절을 보면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사장이 전장에 나가는 이스라엘군에게 전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네 가지 요소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3의 대상에 대하여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나를 죽임으로써,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쓰실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한편, 5~9절을 보면 전쟁에 내보내서는 안 될 자들을 말씀하십니다. 새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하지 못한 자,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지 못한 자,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지 못한 자는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싸워서 이기게 하신다고 하고서 죽을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이 말씀은 집을 짓고 낙성식을 못했다고 해서 징집에서 면제하라는 법적 효력을 언급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다소 냉소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집이 다 지어졌는데 낙성식을 못했으니 마음이 아쉽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아쉬워하고 아까워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는 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살인이란 내가 주체적으로 마음에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거부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하나님께서도 내가 마주하는 제3의 대상에 대한 뜻을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실 수가 없습니다. 3의 대상 앞에서 내 주체성이 죽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나를 도구로 쓰셔서 제3의 대상에 대한 뜻을 펼쳐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는 거부함과는 반대되는 상황입니다. 세상에서 눈앞에 나타난 있음이 좋아서 놓치기가 싫고 너무 아깝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전쟁으로 상징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구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말을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옆에서 도움을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함께 일할 때는 파트너의 능력을 따져서 일을 맡기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내가 파트너가 되는 경우에 내가 하나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판단, 생각, 능력, 계획 어느 부분을 보아도 내가 더 나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내가 파트너가 되었을 때 최선이자 최상의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나는 무조건 죽어야 합니다. 내 능력도 죽고, 내 생각도 죽고, 내 기준도 죽고, 내 평가도 죽고, 내 바람도 죽고, 내 소원도 죽고, 다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소원으로 내 삶을 이끌어가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나의 주체성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향하는 일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체성이 빠져나간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을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게 됩니다. 이때 거부하는 것과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여 끌어당기려는 성향입니다. 세상 것을 끌어당기고 아쉬워하는 자들은 겁먹고, 두려워하고, 떠는 것과 똑같이 도구로 사용될 수 없는 자들이니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낙성식을 못한 자를 비롯하여 법적으로 징집하지 못하는 자들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구로 쓰시는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자들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거지 나사로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재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까지도 없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보다 무엇이라도 더 갖고 있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없어질 때 아쉬운 것, 놓치기 싫은 것, 거부하는 것과는 반대로 끌어당기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게 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대상들을 십자가에서 처분하는 기준이 거지 나사로입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사셨던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 1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지심으로써 세상에서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지는 상태가 되고 세상에 대해서 아쉽고 아까운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될 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아까워서 바치지 않았다면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져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아까워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아까워하셨다면 십자가 사건도 없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몸을 아까워하여 건강하고 장수하기를 바랐다면 순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의 삶도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아까워하는 것이 없어야 하나님은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내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내 인생의 시간과 내게 주어져 있고 내게 두신 모든 것들을 마음껏 활용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2026년은 주체적인 삶이 종식되고 도구적인 삶이 시작되는 원년으로 삼고 한 해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2026년은 도구적인 삶의 원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적재적소에서 붙잡고 온전히 죽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하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올 한 해는 정말 주체적인 삶이 나타나는 시간이 한 시간도 없게 하시며, 온전히 도구적인 삶만 충만한 한 해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