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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증험과 성취함으로 가득 찬 새해>의 줄거리 :
증험이란 증거가 되는 경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취함이란 목적하거나 뜻한 바를 이루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선지자가 하는 말씀에서 증거가 나타나야 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선민들에게서 성취함이 나타나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렇게 선지자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증거가 무엇이고, 선민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성취함이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증험과 성취함으로 가득 찬 새해
(신명기 18:20~22)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본문 중심으로 <증험과 성취함으로 가득 찬 새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염두에 두자면 복이란 증험과 성취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증험은 증거가 될 수 있는 경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취함은 목적하거나 뜻한 바를 이루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증거가 되는 경험과 목적한 바를 이루는 성취함이 가득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성취함이란 나의 목적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갖고 계신 목적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는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목적과 뜻이 성취되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21절입니다.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보내신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말씀을 전할 때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임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제가 말씀을 전할 때 ‘과연 하나님이 시키셔서 십자가 복음 방송을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당을 다니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단에서 목사님이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설교를 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이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는 것일까 아닐까?’ 혹은 ‘태 박사는 하나님이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멋대로 전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22절을 보면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말씀에 증험이 없고 성취함도 없다면 여호와께서 보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일 때는 반드시 성취함이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며 선민에게 갖고 계셨던 목적과 뜻과 의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증험과 성취함이 실제 삶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0절을 보면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면 증험 곧 증거의 경험이 말씀 속에 나타납니다. 말씀 자체에서 증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0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말을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분명히 언급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인지를 알려면 선지자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선지자의 역할이 그 계기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이라고도 하는 시내산에 임재하셨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이때 모든 선민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즉사할 것을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선민의 반응을 옳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직접 땅에 내려오셔서 선민을 만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동시에 선민이라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없어야만 한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선민이라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하지만 하나님과 마주하면 즉사해야만 하는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선지자는 마음이 세상에 머무는 상황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죄악과 저주가 우리 마음에 스며들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마주한다면 즉사할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혀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자꾸 세상 것을 좋아해서 마음에 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로는 마음이 더러워져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에 아예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증거가 선지자에게 어떻게 나타날까요? 선지자의 마음은 하나님과 가까운 상태여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과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선민을 향하여 갖고 계신 마음과 선지자의 마음이 이심전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선민을 향하시는 하나님과 이심전심이 될 수 없다면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의 말씀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말씀이 들리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하나님과 이심전심의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선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요? 선민은 세상에 사는 동안 자꾸 하나님을 빗나가서 마음에 세상을 담습니다. 이러한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한 가지입니다. ‘선민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와서 나를 마주하는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십니다. 선민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 것에 붙잡혔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다양합니다. 사업가는 사업에 붙잡히고, 정치가는 정치에 붙잡히고, 엄마는 자식에게 붙잡히고, 몸이 안 좋은 사람은 건강에 붙잡힙니다. 마음이 이래저래 붙잡혀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사람에게 전달되는 표현은 다양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단 한 가지입니다. ‘세상을 빠져나와서 내게로 오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과 이심전심이 된 선지자가 전할 수 있는 말씀은 단 한 가지입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은 건강에 붙잡혀 있고, 사업에 붙잡혀 있고, 자식에게 붙잡혀 있다. 그것은 선민이 아니다. 선민이라면 마음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마주해야 선민이다. 따라서 당신이 땅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부르는 대로 하나님이 오신다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마주하고 싶다면 마음이 깨끗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마음이 세상에 묶여서 세상을 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깨끗해져서 하나님께로 가야만 한다.’라고 말씀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가 하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신다면 우리는 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이 내려오시지 않기에 우리가 올라가야 합니다. 다만 올라가려면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있는 투명성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업가의 마음에는 사업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오로지 사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이런저런 부분에 마음이 조금씩 매여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은 부분 부분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셨지만, 이것이 가능한 상태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사업가에게 ‘사업에 가고 있는 그 마음만이라도 정화하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사업에 대해 완전히 죽음으로써, 사업에 가고 있는 마음 부분이라도 투명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올려보내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빼앗는 모든 부분들을 십자가를 통해 투명하게 만듦으로써 다 하나님께로 보내라 제시하는 것이 선지자의 일입니다. 본래 마음 전체를 드려야 마땅하나 지금 당면한 사업에 대한 분량만큼이라도 투명하게 만들어서 하늘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서 하나님과 이심전심이 된 선지자가 선민을 만날 경우에는 이것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구체적인 계획이 있기에 따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사업가에게 사업의 문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사업에 대한 부분만큼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업에 대해서는 마음이 없어진 만큼 하나님께서 뜻을 가지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기에 사업을 어떻게 하라는 것은 선지자가 할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말씀에는 증험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20절을 보면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이나 다른 신들은 같은 의미입니다. 다른 신들이란 마음의 만족을 위한 목표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인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예배당에서 ‘여러분! 건강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잘 믿어야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건강을 다른 신으로 섬기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 마음이 가야 될 목표를 다른 것으로 정한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예배당마다 강단에서 올해의 목표가 선포됩니다. 예배당 조직의 목표가 선포되고, 각 개인의 목표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내용의 기도와 설교와 축복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일 년 동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목표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올해는 가능한 많은 시간을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가서 머무는 시간을 늘리자.’라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정과 직장과 건강과 미래의 성공과 형통을 지향하는 말을 한다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대로라면 죽임을 당해 마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말씀을 전하는데, 교인들의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일 년 동안 세상에서의 이런저런 목표와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성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잘 믿자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는 다 죽임을 당해 마땅하다는 것이 본문의 취지입니다. 죽임을 당해 마땅하다는 것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내 마음에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낸 사역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사역자로서 그 사람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죽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이심전심인 선지자가 교인들을 향하여 전할 수 있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없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시면 당신은 즉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일부분이라도 지금 차지하고 있는 세상 것이 없어지도록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보혈로 흰 눈같이 정화되어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하여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올 한 해는 세상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마음의 모든 부분이 다 십자가를 통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 십자가를 통과하고 정화해서,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지나 하나님께로 가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마주하기 위하여 하늘로 보내는 마음의 양이 다른 해와 비교해서 엄청나게 많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셨음을 증거하는 증험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는 ‘사업을 잘하려면, 건강 하려면, 아이를 잘 키우려면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해나가실 일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자꾸 그런 말을 한다면 다른 신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표인데 다른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기, 부자 되기, 형통이나 성공, 인기나 인정을 말하는 것은 다른 신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증험이란 하나님과 이심전심으로 가까이 있는 상태에서 보냄을 받았다는 증거를 듣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면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는 말씀 외에는 할 수 없습니다. 선민이라면 하나님과 관계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마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선민입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전하는 자입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정화해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어서 성취함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흔히 성취함은 기적을 염두에 두고 이해합니다. 모세를 통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렸고, 홍해가 갈라졌으며, 만나를 내렸고, 바위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때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증험과 성취함에 대해서도 기적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다양한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요엘, 오바댜, 하박국 같은 선지자들에게서 모세나 예수님의 공생애 때나 사도들에게서처럼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참 선지자가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생각해 봅니다. 모세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 기적을 보고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기적을 성취함이라고 여긴다면 이스라엘 60만 장정 중에서 두 명을 제외한 59만 9998명에게는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성취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언급한 성취함은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참 선지자임이 분명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선민은 모세를 몇 번이나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또한 선지자의 궁극적인 모델이셨던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 또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실상 기적은 실제로 선민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일에는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있음을 소개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기적으로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과 선민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표적을 요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표시가 되는 기적을 보이라 요구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39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같이 악하고 음란한 자들에게 보일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토해져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기적을 십자가에서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이 실제 하나님께로 가는 성취가 일어나는 기적이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기적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대상성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대상성을 드러냄이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네. 이제는 하나님만 나의 상대자로 삼겠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를 위해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악하고 음란한 이유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 기쁘고, 세상이 더 재미있고, 세상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악하고 음란한 상태에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본다면 ‘하나님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기적이라면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내 성공을 막던 모든 방해물들이 없어질 것이다. 내 미래가 장밋빛이 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대신 번영하고 성공하는 미래와 문제가 해결되는 삶을 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하여 하나님만을 마주해야 함을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번영하는 자기 미래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이러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는 아무리 많은 기적을 일으켜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로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께로 다가가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일을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기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기적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심전심이 된 선지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말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그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기적은 자기 것이 됩니다. 그 순간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은 것이다. 내가 주님과 함께 부활한 것이다. 내가 주님과 함께 승천한 것이다.’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전해진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악하고 음란한 죄악된 상태로부터 벗어나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있는 투명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세상에 마음 쓰는 부분만이라도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성취함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취함을 기적이라 부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취함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이 아닙니다. 세상을 탈출하는 기적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저 또한 참 선지자의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다만 이러한 호칭은 오해의 여지가 많습니다. 참 선지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단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그저 신학 박사입니다. 승철 씨라고 부르기는 어려우실 테니 그냥 태 박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선지자의 역할이란 여러분에게 일어나야 할 기적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전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세상이 스며들어 있는 마음의 일정 부분이라도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지나 아버지께로 갑니다. 이 일이 일어날 때 마음에서 하나님의 크기가 점점 커집니다.
얼마 전에 예를 들었던 아들이 식물인간이 될 뻔한 권사님의 상황과 아들이 학교에서 폭력을 당해 크게 다친 집사님의 상황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또 어떤 집사님께서는 딸이 갑상선암에 걸린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민이라면 스스로 나서서 자녀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에서 그만큼 주권자 하나님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를 향해서 다가서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주권이 크게 느껴지는 성취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성취는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참 선지자이자 참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여러분과 함께 2026년 12월 31일까지 갈 것입니다. 저는 모든 시간에 마음이 하나님께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이심전심이 된 상태가 되고자 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할 것입니다. 학교 폭력을 당한 엄마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하며, 그 아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심을 전할 것입니다.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은 하나님의 딸이며, 사업은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부르고 계십니다. 다만 마음에 아들을 담고, 딸을 담고, 사업을 담고, 미래를 담고, 건강을 담고서는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담은 마음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투명한 마음으로 아들과 딸과 사업과 미래와 건강에 보내던 마음만큼이라도 정화해야 합니다. 그 부분만큼이라도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해서 하나님께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 다른 세상 것에 대해서 내 마음이 매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다시 그 부분만큼을 십자가에서 죽고 투명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이것을 일 년 내내 반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내 마음이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있도록 주님의 십자가에서 바뀌는 성취함이 맺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의 기적을 말씀으로 전할 때 받아들이면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는 기적은 내 기적이 됩니다. 나에게 나타나는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적이야말로 내 마음이 하나님께 다가가서 마주하는 성취가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말하지 않는다면 본문에서 말씀하신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신들을 이야기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시간마다 분초 단위로 세상으로 샐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전할 때마다 이 유일한 기적을 말하지 않는다면 가짜 선지자입니다. 저는 선지자의 역할을 하는 동안 말씀을 전함으로써 끊임없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고 부활 승천하심이 지금 여러분의 기적이 되도록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 중에 이처럼 날마다 기적을 일으키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듣는 사람 각자가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올 한 해도 마음이 하나님께 붙은 상태에서 보냄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 기적이란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는 기적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우리 마음의 일부분만이라도 수정 같은 투명함을 회복해서 날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기적입니다. 이 성취함이 일 년 내내 반복하여 쌓일 수 있도록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저는 저대로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서 보내심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증험이 나타나는 말씀을 지속할 것이고, 하나님께로 가기 위하여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여러분의 것이 되도록 끊임없이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기적 사건으로 들어오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 여러분에게 성취되어서, 날마다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고 하나님과 마주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이 일 년 내내 쌓이고 쌓이고 쌓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또 한 해를 허락해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이 한 해를 주신 이유는 증언과 성취함으로 충만한 한 해가 되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깨달은 바대로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진심을 가짐으로써 증언과 성취함이 충만한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