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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이 눈에 안 보여 천만다행>의 줄거리 :
하나님이 육체의 눈에 안 보이시고 귀에 안 들리시는 것이 너무 천만다행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직접 뵙고 귀로 직접 들으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즉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눈이 직접 보고 직접 듣는 대신에 우리에게는 선지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직접 보고 직접 들으셔도 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 안에서 보고 들으면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선지자는 예수님을 전할 때 반드시 하나님을 오감으로 직접 대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함께 전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여 천만다행
(신명기 18:15~22)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오늘은 2025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이 눈에 안 보여 천만다행>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안 보이시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눈에 보였다면 큰일 날 뻔했다는 의미입니다. 제목에서 하나님이 눈에 ‘안 보여’라고 존댓말을 쓰지 않은 것은 제목이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언급하신 뒤에 이어서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 용납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체가 주권자 하나님을 등지고 버렸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가증한 것으로 여기시며 13절에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 하거나 삶의 상황을 완전하게 하려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는 나를 완전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두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 순간에 선지자가 처음 나타납니다. 선지자의 역할을 알 때 하나님과 선민이 맺는 관계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이란 하나님과 선민의 관계의 특성에 맞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을 알면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 어떤 특성이 있는지도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는 말씀 속에 선지자의 역할도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복습을 해봅니다. 우리는 삶에서 문제를 대할 때 마음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는 중에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완전하게 되는 길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만족과 평강의 바로미터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 때문에 내 마음의 만족과 평강이 깨졌습니다. 이로부터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거나 걱정과 불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제와 상관없이 마음의 만족과 평강의 상황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삶의 문제로 인해 내 마음의 만족과 평강이 깨졌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로 인해 깨진 만족과 평강을 회복하여 지켜지게 하는 것이 나의 과제입니다. 이것이 완전함을 지향하는 선민의 삶입니다.
내 마음의 만족과 평강이 문제와 상관없이 회복되어 지켜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문제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 앞으로 가서 하나님을 마주 봅니다. 이로부터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써 문제는 좌로 흐르든 우로 흐르든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잘 되든 못 되든 상관 없이 마음에는 만족과 평강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완전함을 꾀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삶에 오래 풀리지 않는 고질적 문제가 있다면 저는 오히려 그러한 상황이 대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고질적인 문제가 상관없을 정도로 완전함에 이르려고 발버둥 치는 동안에 영적으로 엄청나게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면 마음에 부담을 갖거나 거부하지 말고 이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문제가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갖는 완전함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용할 수 있다면 문제는 대박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선지자가 언급됩니다. 15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완전함을 위하여 제사장과 레위인뿐만 아니라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세 이후 구약의 역사 속에서 때마다 선지자들이 출현할 것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며 사도의 역할과 함께 선지자의 역할을 언급했습니다.
한편, 본문에는 하나님과 선민의 관계에서 선지자가 등장하게 하신 배경이 언급됩니다. 16~17절을 보면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라고 했습니다. 호렙산은 시내산입니다.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천국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고 빛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내려오시는 임재하심은 선민이 바라는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선민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간구합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간구합니다. 눈으로 직접 하나님의 임재 상황을 접하고, 귀로 직접 임재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확고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이 말을 옳다고 하시며 선지자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선지자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국 보좌에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직접 내려오셔서 내 눈과 귀로 대면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 나타나는 것이 문제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선지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시는 임재하심의 상황을 직접 보고, 하나님과 마주하는 상황에서는 피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나의 마음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는 돈을 벌고 싶고, 건강하고 싶고, 삶의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 것들을 공백의 마음인 영 안에 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면 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공백 상태이기에 상대가 누구든 무엇이든 빨아들이고자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내 앞에 계시면 마음의 빨아들임의 작용은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빨아들이려고 하는데, 내 마음에 이미 세상 것들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더럽고 악취 나는 상태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접하려 하기에 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출애굽기 19장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실 때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데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세상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을 문제시하고 세상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담음으로써 문제시하고 해결하려는 태도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임재하심이 일어난다면 즉사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어서라도 끊임없이 마음에 세상을 담는 죄적 체질이자 세상 친화적 체질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보좌를 떠나 내려오시지 않는 것이 다행입니다.
더욱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 만남을 끝내시려 하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신다면 즉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을 담고 있다는 것은 뱀처럼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다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면 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야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땅을 떠나려면 마음이 땅을 담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만나시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 즉사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올라간다는 것은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고 마음이 세상을 하나도 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서 사랑하려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세상에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이 세상을 담을 수밖에 없고, 세상을 담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내려와서 나를 만나시려 한다면 나는 즉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6절을 보면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선지자의 역할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는데, 그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습니다. 옛날 유행가 중에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로 가서 만남이 이루어지려면 어차피 우리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마음은 영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려면 유리 바다를 통과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내 마음이 수정 같은 유리 바다로 들어갔는데 오점이 발견된다면 어떨까요? 내가 세상 것을 담고 있는 상태에서 수정 같은 유리 바다로 들어간다면, 내 마음에 담고 있는 물질로 이루어진 이 세상 것이 덩그러니 남아 있으면서 수정 같은 투명함에 오점을 남길 것입니다. 마치 엑스레이나 CT 촬영을 할 때 몸속이 들여다보이듯이, 수정 같은 유리 바다에 오점 덩어리가 보일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바다를 건널 수 없고 하나님과의 만남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 보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수정 같은 유리 바다로 마음이 들어갔을 때, 물질로 이루어진 피조물의 세계에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들어갔는데 수정 같은 투명함이 유지될 때 우리는 유리 바다를 통과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건강을 담고, 가족을 담고, 미래를 담고, 돈과 사업과 승진을 담고, 인간관계와 직장에서의 성과를 담고, 과제와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대로 하나님이 곧바로 응답하셔서 내려오시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찾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이 안 내려오시기에 즉사를 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나를 마주하시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시지 않았기에 즉사하지 않고 있는데, 그 상태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찾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업 때문에 걱정합니다. 노후에 대해 걱정합니다. 이처럼 마음에 세상을 담고, 인생을 담고, 미래를 담고서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천국 보좌에 계시니 망정이지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셨다면 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황이 즉사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지자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해서 ‘너는 지금 하나님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네 속을 보니 가족의 평안과 형통이 있고, 건강이 있고, 인생의 미래가 있고, 승진이나 직장 일들이 있다. 너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음을 깨달으라.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보좌 앞에 펼쳐져 있다는 영적인 사실의 의미를 모르고 하나님을 마구 불러봤자 소용이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오신다면, 너의 상태는 즉사할 수밖에 없다. 네가 선민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마주하고자 한다면 네가 하늘로 올라가야만 한다. 올라가서 유리 바다를 통과해야 한다. 네가 지금처럼 마음에 이런 저런 문제를 잔뜩 담고 있어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유리 바다에 들어갔을 때 수정 같은 투명성이 변하지 않게 유지될 수 없다.’라고 지적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완전히 세상을 벗어나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이란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세상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나는 하나님 잘 믿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기독교 종교인들이 마음에 예배당과 관계되는 것을 담으면 괜찮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도 세상 것이라면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목사든 교인이든 가리지 않고 적용해야 합니다. 목사님도 목회에 대해서 죽어야 되고, 교인들도 예배당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예배당에 충성이나 봉사 같은 명목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세상에 묶어놓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에 대한 일이라도 그것은 세상일이기에 마음에 담게 되었다면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들도 목회가 마음에 들어 있으면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아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목사라면 목회 현장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고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있는 투명성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엄마는 자식 앞에서 투명성을 회복해야 하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투명성을 회복해야 하고,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투명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들이 선민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합니다. 대통령이 선민이라면 대통령이라는 신분 의식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대통령이라는 신분 의식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직장에서 주어지는 신분 의식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완전히 죽어서 투명성이 유지되어야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을 향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신분에 있는 나를 움직여 가십니다. 그 신분에 있는 상태에서 내가 마음이 투명해져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당신의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마음이 투명성을 회복하고 유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고 하나님을 법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에 대해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 문제가 세상에서 보기에 나쁘게 진척되거나 좋게 진척되거나 상관이 없는 만족과 평강을 누립니다. 이러한 완전함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에 대해 내 생각 속으로 당신의 뜻을 넣어주십니다. 이렇게 받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세상에서 말하는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은 어떤 전문가가 말해도 다 미신입니다.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하여 하나님을 가져서 만족과 평강을 누리고, 몸으로 만나는 세상 문제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상관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내 생각에 전해지는 것만이 미신이 아닌 진정한 해답입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 마음에 세상을 담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너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고집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자들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만남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에는 선지자의 역할에 상응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역할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선민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특성을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라는 것은 선민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를 측정해 주는 자들입니다. ‘너는 지금 하나님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놓여 있다. 이 바다를 통과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보좌 앞에 있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는 영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데는 비행기로 14시간 17시간이 걸린다지만,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건너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유리 바다의 투명성이 나로 인해서 방해만 받지 않으면 됩니다. 내 마음에 세상 것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면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게 됩니다. 유리 바다가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음이 투명하면 순간에 도달할 수 있지만 투명하지 못하면 바다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시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로는 공경하되 마음이 멀다는 것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들은 다양한 표현으로 선민의 마음 상태를 지적했습니다. 다만 그 내용을 보자면 하나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네가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네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바다가 끼어 있다. 이 간격을 극복할 수 없으면 너는 하나님과 마주할 수 없고 너의 미래 또한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이 거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역할과 선지자의 역할을 비교하면 차이점이 있습니다. 레위인은 땅에 있는 마음이 실제로 하나님께 가도록 돕고 이끄는 자들입니다. 한편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께 가려고 할 때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알려줍니다. 레위인이 준비한 과정의 입구에서 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왔는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준비한 하늘로 올라가는 길로 빨리 가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역할이 필요한 이유는 선민이 가진 오해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선지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지자가 ‘네가 하나님을 찾는구나. 그럼 내가 하나님께서 네 삶의 현장에 오시도록 부탁을 드릴까?’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네! 그렇게 해주세요.’라고 대답하는 상황이라면 신앙이 무엇인지 아예 모르는 상태입니다. 적어도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아는 자라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지금 오셔서 저의 상태를 보신다면 저는 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했고, 하나님은 이들의 말을 옳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로 돌아가서 보면 하나님 경외하기를 중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 상태를 보니 하나님이 땅에 임재하신다면 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 경외의 시작이고, 이것을 깨닫게 하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이 아침마다 선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로 들어갔을 때 우리의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함을 끊임없이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알고 레위인이 준비한 성전의 구조가 의미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가려면 유리 바다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리 바다를 통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생활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끊임없이 세상이 담깁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닐 수 없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기에 선지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선민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한 번에 만 명이 들어가는 대형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뭣도 모른 채 하나님의 임재, 성령의 임재를 간구합니다.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이 실제로 임재하신다면 예배당에 있던 만 명은 다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이것을 모른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마음에는 가족이 들어있고, 나라가 들어있고, 건강이 들어있고, 자녀가 들어있고, 온갖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교인들까지 마음에 세상 것을 담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면 다 즉사할 텐데 괜찮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우리에게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세상이 담기지 않는 마음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했습니다. 소망 가운데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서 돈 문제가 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돈 문제가 있는 이 땅을 떠나서 하늘로 향하는 것입니다. 다만 돈 문제에 대해 죽었다고 해서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죽은 것은 아닙니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당장 마음은 세상에 묶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망이 요구됩니다. 십자가를 붙잡지만 내 마음에는 아직도 나도 모르게 세상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표면으로 드러난 것들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일단 그렇게 드러난 것들에 대해 죽음으로써 내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이 하늘을 향하는 상태가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께 도달하고 하나님을 가지기를 원하는 이 소망의 상태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 하나에 대해서만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해서 내 마음이 하나님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문제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방향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나를 살펴봐야 합니다. 내 마음에 담긴 것이 무엇인가를 봅니다. 그래서 투명성을 회복하여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있도록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까지도 소망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서 하나님을 갖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의 단계가 우리를 구원해 준 것입니다. 소망은 곧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꾼 것이고 하나님을 향함이 곧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떻게 기도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일어난 문제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로 여겨지지 않은 일조차 침소봉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발전했을 때조차 내 만족과 평강이 깨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구합니다. 현재는 문제로 표현되지 않은 것들 중에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은 자식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내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합니다. 그래도 만족과 평강이 유지될 것인지를 하나하나 뽑아서 기도를 합니다.
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지금은 아무 문제도 없지만 만약 수입이 없어서 경제적 난관에 부딪힌다면 마음이 깨지고 흔들릴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십자가에서 죽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매달 수입이 딱딱 들어오는 상황에서 재정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돈 문제 같은 건 관심 안 둬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돈이 안 들어와도 돈 문제에 관심이 없을지는 그 상황이 돼봐야 압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생활을 허락하신 이유는 앞으로도 광야를 기준으로 삼으라는 뜻이 있습니다. 주님이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제가 평소에 주님이 머리 둘 곳 없이 사셨다는 이야기를 수백, 수천 번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제 기도의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머리 둘 곳 이외에도 가진 것이 많습니다. ‘그것들이 내게서 다 없어질 때 과연 나는 만족과 기쁨과 평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투명성을 빨리 회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선지자의 존재 이유는 투명성을 회복해야 함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너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게 아니다. 투명성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선지자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시되,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일어난다면 나의 평강과 만족이 깨질 수 있는 문제들까지 다 찾아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투명성을 회복하는 기간을 단축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를 두신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를 우리가 충분히 알아서 하루빨리 투명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로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까지도 다 적용하여 내 마음에 숨겨져 있는 오점들을 찾아내게 하시고, 수정 같은 유리 바다로 들어가면 드러날 그 악취 나는 오점들을 다 제거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