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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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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킹메이커와 해결사_태승철

by 태승철 · 25-12-29 07:05 · 197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킹메이커와 해결사>의 줄거리 :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 온 지파 사람들을 이방 민족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 등과 비교를 합니다. 레위인은 킹메이커이고 이런 이방의 각종 술사들은 해결사들입니다. 레위인은 선민을 이 세상에서 해방되게 하는 반면, 이런 이방의 술사들은 사람들을 더욱 이 세상에 예속되게 합니다. 레위인은 사람을 완전하게 하려 하고 술사들은 삶을 완전하게 하려 합니다.

 

 

킹메이커와 해결사

 

(신명기 18:1~14)

 

6. 이스라엘 온 땅 어떤 성읍에든지 거주하는 레위인이 간절한 소원이 있어 그가 사는 곳을 떠날지라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이르면

7. 여호와 앞에 선 그의 모든 형제 레위인과 같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길 수 있나니

8. 그 사람의 몫은 그들과 같을 것이요 그가 조상의 것을 판 것은 별도의 소유이니라

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5절에는 성전 봉사를 평생의 업으로 삼는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업을 위해서 마땅한 음식을 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6~8절에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이르면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국에서 48개의 성읍을 레위인이 살 곳으로 정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방에 사는 레위인이 중앙 성전에 와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9~14절에는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본문 중심으로 <킹메이커와 해결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13절을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라고 했습니다. 17장에 이어서 18장의 주제도 선민의 완전함입니다. 10절을 보면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가 언급되는데 이는 곧 자녀를 우상숭배의 제물로 바칠 만큼 삶의 문제를 해결해서 성공과 번영으로 이끌고 싶어 하는 마음의 간절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 언급됩니다.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완전하게 하고 싶어 하는 마음가짐으로 이러한 자들을 찾아가서 지침과 방향을 듣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가 언급되는데 결국 이들은 미신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공통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자들에게 답을 주는 자들이고, 미래에 대한 절실한 궁금증과 불안을 해소해 주는 자들입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인 셈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자들과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 지파 전체를 비교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6~8절에는 지방에서 일하는 레위인이 중앙 성전에 와서 일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막지 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인은 선민이 중앙 성전을 생활화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이러한 성전의 생활화란 그 이름이 실제로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언제나 첫 번째 상대자로 마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선민에게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24시간 상대자로 마주하게 하는 것이 레위인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역할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들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사를 찾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심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삶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들을 의지합니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듯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들이 존재합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 하기에 이러한 자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증한 일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점쟁이를 찾아간 사실을 가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삶을 해결하려는 태도가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기독교 종교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은 삶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점쟁이를 찾든 하나님을 찾든 애초에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태도는 같습니다.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가 아닌 기독교 종교인으로 사는 모습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강단에서 문제와 난관을 극복하고 삶을 성공과 번영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을 설교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을 잘 믿으면 능력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을 베푸심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완전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설교를 하는 목사라면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설교를 좋아하는 자들도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이러한 주제의 말씀이 이어지는 중에 13절을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미신을 따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나의 삶을 완전하게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완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내 삶을 완전하게 하고자 부르는 것이라면 미신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을 지향하되 제대로 지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없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완전함을 지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언급됩니다. 이들은 선민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도록 돕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전함에 대해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완전함이란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수련이나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완전함이 아닙니다. 스승 밑에 들어간 제자가 수련을 통해 성장하여 완전해져서 하산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 아닙니다. 13절에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24시간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바라보시지 않는 대상이 어디에 있느냐?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바라보시고, 백합화도 바라보시고, 내 머리털 하나 빠지는 것도 바라보시고, 내몸의 세포 하나까지도 다 바라보고 계시지 않느냐?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이 무슨 새삼스러운 일이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은 여느 피조물을 바라보시는 눈길과는 다릅니다. 당신 자신을 갖기를 바라시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나무를 바라보시며 나무가 당신을 갖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참새를 먹이시고 백합화를 입히시지만 참새나 백합화가 당신을 갖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바라보시고 주관하시지만 그중에서도 선민을 바라보실 때만큼은 당신 자신을 갖기를 바라시며 바라보십니다. 쉽게 말해 너는 나만 바라보면서 나를 가져라.’라는 바람을 갖고 선민을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민이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려고 바라보시는 자들이며, 동시에 하나님만을 가지려고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즐길 수는 있지만 가지려고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돈은 마음으로 빨아들이려고 바라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함이란 우리 마음의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은 채움을 필요로 합니다. 채움을 위해 있음의 존재감과 좋음의 만족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만을 마음의 존재감과 만족감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존재감과 만족감을 위해서는 하나님 외에는 물질 세상에서 아무것도 필요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선민이 이()민족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거나 종교적으로만 믿는 자들은 먼저 마음에 삶을 담고 있는 상태입니다. 영인 마음에 물질을 담음으로써 영의 물질화가 일어난 상태에서 삶의 해결사를 찾습니다. 예배당도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선민은 삶의 해결사를 찾는 자들이 아닙니다. 선민은 삶의 문제를 만났을 때 여호와 앞에서 완전한 자가 되는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삶에 문제가 생겼을 때 여호와를 바라봄으로써 완전함을 지향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상 기준에서 잘 되는 길을 우측길이라고 하고, 세상 기준에서 못 되는 길을 좌측길이라고 해봅니다. 이때 선민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잘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못될까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삶이 우측으로 진행하든 좌측으로 진행하든 아무 상관이 없을 정도로 문제가 작게 여겨질 만큼 하나님을 크게 가지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이 일을 돕는 자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선민은 삶을 완성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완성하는 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선민에게 나의 완성이란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은 삶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를 찾지 않습니다. 이 민족은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할 만큼 삶의 번영과 성공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선민은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심을 알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를 죽이는 자입니다. 자식을 불 가운데로 보낼 정도로 세상의 삶에 대해 간절했던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 성공했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던 간절함을 하나님께로 돌려서, 문제가 티끌처럼 여겨져서 좌로 가든 우로 가든 상관이 없을 만큼 하나님만을 크게 가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듣습니다.

()민족은 문제를 해결하려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를 찾습니다. 그러나 선민은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티끌처럼 여겨질 수 있도록 하나님을 크게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을 크게 가져서 문제가 티끌처럼 여겨지게 되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하나님께서 내 생각 속에 가르쳐주십니다. 그렇기에 선민은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문제가 사소하게 여겨질 만큼 하나님만을 크게 가지면,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생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서점에 가면 자기계발서와 각 분야의 참고서가 즐비합니다.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삶의 완전함과 성공과 번영을 꾀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답을 주는 서적들이 있습니다. 재테크 방법,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법칙, 새벽형 인간 같은 책들이 그러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등의 인간관계를 잘하는 방법에 대한 책들도 많습니다. 이것이 다 미신을 의지하는 것과는 다르게 여겨지지만, 그 마음가짐을 보자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해지고자 한다는 점에서 미신을 찾는 자들과 똑같습니다. 각종 자기계발서, 재테크 방법, 건강과 장수의 비결, 성공하는 법칙 같은 것들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고 성전의 구조를 생활화하는 선민의 입장에서 보면, 선민은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세상에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크게 가져서 세상의 모든 문제가 티끌처럼 여겨질 때 들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선민은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에 왕입니다.

왕은 말하는 자입니다. 왕은 언행의 이유를 자기 안에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처럼 보입니다.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재테크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건강과 장수의 비결을 따르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일곱 가지 법칙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선민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듣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가 티끌처럼 여겨지도록 하나님을 크게 갖고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 왕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선민 각자가 자기 삶의 현장에서 왕이 되도록 돕는 자들입니다. 왕의 권좌에 앉도록 밀어붙이고, 권고하고, 돕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선민의 삶의 문제에 직접 끼어들어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왕의 권좌로 밀어붙여 왕이 되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누구의 말을 들으려고 하느냐? 세상에는 네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정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너는 왕이 되어야 될 팔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선민의 팔자는 왕입니다. 하나님을 크게 가져서 세상 문제가 다 티끌처럼 여겨지는 자가 왕입니다. 이처럼 레위인과 제사장은 삶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는 지침을 제공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세상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왕이 되게 해주는 자들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말씀을 듣는 분 중에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둔 엄마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아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로부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는데 넘어지면 반사적으로 손을 짚어야 하는데 얼굴부터 부딪힙니다. 또 사물이 두 개로 보이고 한쪽 발을 잘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또 다른 권사님께서는 결혼한 30대 아들이 비상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머리에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정을 받고 한 달 동안 병원에 누워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어떠셨을까요?

학교에서 폭행을 당한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아서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두 명이 아이의 배를 60대를 쳤다고 합니다. 엄마 입장에서는 돌아버릴 상황입니다. 저라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당장 쫓아가서 가해자 아이들을 실신할 정도로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기를 주저하고, 아파서 입원을 해야 하기에 일단 담임 선생님께 상황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또 교육부에 진정을 넣어서 학교를 압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레위인의 역할을 하여 조언을 드리고자 아들이 계단에서 떨어져 식물인간이 될 상황이 되었던 권사님의 일화를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아들을 낫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삶에서 발생한 문제의 해결자 입장에 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것을 아셨고 그렇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자, 아들이 낫게 해달라는 말은 한마디도 못 하고 하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이 아들의 상황을 끌어안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창조주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크게 보았습니다. 결국 그 아들은 회복되어 회사에도 복귀했고 생활도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폭행을 당해서 눈도 잘 안 보이고 장작개비처럼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맞았으면 신경을 다쳐서 정상이 아닌 상태입니다. 이러한 다급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떠올려 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과 본문에 기록 된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것은 당시 많은 자식들 중 하나를 제물로 바쳐서라도 삶을 성공과 번영으로 이끌어가고자 했던 간절함의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녀를 통해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 한다면 똑같은 마음가짐을 가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은 이와는 정반대의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만을 상대해야 하는 마음에 이삭이 자꾸 끼어듭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 일등의 하나님을 보존하려고 이삭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반면 이 민족들은 삶을 성공으로 이끌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자녀를 바쳤습니다. 쉽게 말해 신이여! 소중한 자식까지 신에게 바치오니 내 삶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십시오.’라는 삶에 대한 간절함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때 레위인과 제사장은 삶에 대한 간절함을 성전 생활화로 바꾸도록 상담해주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성전 생활화는 우리에게는 십자가 생활화로 적용됩니다. 초등학생 아들이 폭행을 당해서 심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선민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이 아들로 가득 찬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맞을 것도 아셨고 때릴 때도 보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이 있어도 있을 것입니다. 당장에 아들이 죽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죽는 것일진대 얻어맞게끔 하셨다면 그것에도 뜻이 있습니다. 일단 나는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레위인의 입장에서 아들을 담고 있는 마음을 보면서 이러한 상담을 해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의 뚜껑은 속죄소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속죄가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엄마의 마음은 아들의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대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이 상태가 상번제 어린양과 함께 죽어야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구체적인 방법은 성소의 분향단과 떡상과 등잔대를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분향단의 향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떡상이 상징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만족하기를 바라며 기도하라는 것이고, 등잔대가 상징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고 행동하기를 바라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인은 선민 각자가 삶의 문제에 걸려 넘어졌을 때 성전의 구조를 통해 그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도록 상담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무당 흉내를 내서 자기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섭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만난 사람을 왕이 되게 해줘야만 합니다.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크게 가짐으로써 문제가 사소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크게 본다면 아들이 죽어도 살아도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내 하나님, 내 아버지의 주권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몸이 죽든 살든 아버지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우주 바깥으로 나가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주권을 실제로 크게 느끼면 위급한 처지에 놓인 아들에 대해서 내가 보지 않아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며, 내가 붙잡지 않아도 하나님이 붙잡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전면적으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계시는 상황이 크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크게 볼 때 마음에서 문제는 떨어집니다. 내가 주제넘게 왈가왈부하면서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돕는 것이 레위인의 일입니다. 주어진 문제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세상 안에서는 들을 말이 없고, 책을 볼 필요가 없고, 상담할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을 크게 가지는 왕이 되게끔 밀어붙이는 자들이 레위인입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역할을 잊어버린 채 종교 지도자들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듭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침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를 종교 지도자에게 가져와서 해결을 받고 싶어 하는 것도 가증하고, 그러한 선민의 삶에 끼어들어서 이렇게 해야 잘 살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는 것도 가증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선민을 왕의 자리로 밀어붙이는 킹메이커지 삶의 해결사가 아닙니다. 선민 또한 삶이 완전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완전하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함이란 하나님께 눈길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공백의 마음은 자동으로 무엇인가를 빨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내 마음의 시선을 고정하기만 하면 하나님만을 빨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는 삶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왕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을 크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크게 느껴서 세상 문제가 작아지면 세상 문제를 위해서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날마다 전하고 들음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삶의 문제가 티끌처럼 여겨질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갖고,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왕이 되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삶의 완전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내 존재의 완전함을 지향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 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잊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마주하는 일에 중단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