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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아바타의 말과 행동>의 줄거리 :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에는 천 냥 빚을 갚는 말과 행동이 있습니다. 즉 말 한마디 행동하나가 천 냥의 값어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하면 할수록 천 냥씩 빚을 지는 악하고 해로운 말과 행동들, 또한 그냥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말과 행동들을 무한정 쏟아내고 있습니다. 선민인 우리는 이 대열에 끼면 안 됩니다. 선민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예외 없이 천금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완전함 속에서 하나님의 아바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바타의 말과 행동
(신명기 17:14~20)
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 아바타의 말과 행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몸으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분신으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의 제목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귀중한 값어치를 갖고 있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악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해로운 말이 있으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 말들도 범람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의 80억 인구가 악하고 해롭고 쓰레기 같은 말을 쏟아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 냥의 값어치가 있는 말이나 행동으로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악하고 해롭고 쓰레기 같은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선민으로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분신으로 하는 말과 행동이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정해놓으셨습니다. 그 뜻을 담고 있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자면 ‘그걸 누가 할 수 있나? 너무 이상적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치워버립니다. 이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온 방법입니다. 현재 나의 상태를 정상으로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엄연한 사실들을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으며,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멀쩡하고 정상이라면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이상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포기하고 버린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현재 상태를 정상적 기준으로 붙잡고 있기에 믿음의 발전이 없습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설교조차 내가 정상이라는 상태에 맞춰져 있습니다. 예배당 조직을 위한 헌신이나 헌금 혹은 충성이 모자란다고 말할 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자람을 지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명기 17장을 통해 ‘완전함’이라는 화두를 주십니다.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이 완전함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화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완전함은 언약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나는 살아있으며, 너를 보고 있고, 너를 알고 있고, 너를 사랑하고, 너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나만 상대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시내산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만을 상대함이란 채움을 필요로 하는 공백의 마음인 영이 하나님만을 마주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영이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하나님만을 빨아들이고, 하나님만을 희망하고, 하나님만을 욕구하는 것입니다.
완전함에는 목표가 있고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완전함의 과정에서 벗어났다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 보는 상태가 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을 빨아들이고 욕구하는 상태가 재현됩니다. 이것이 반복해서 재현되고 하나님을 마주 봄이 길어짐으로써 내 마음에서 하나님은 점점 커지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커지시기에 상대적으로 세상 것은 티끌처럼 작아집니다. 이것이 목표로 해야 할 완전함이고 과정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성경이 말하는 완전함이란 수련을 통한 자기완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함을 목표로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오직 예수님께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완전하지 못한 나의 상태를 깨닫고 포착할 때마다 나를 부인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옷 입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감으로써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을 빨아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수행해야 할 완전함을 위한 과정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완전함에서 중요한 것은 완전함의 도상에서 벗어났음을 빨리 깨닫는 것입니다. 17장 앞부분에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신을 섬김이란 완전함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 돈, 자녀의 형통, 승진, 좋은 아파트, 명품 자동차 같은 것들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함의 도상에서 벗어나 다른 신을 섬기게 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바라는 것들이 있으면 십자가에서 죽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함으로써 내가 바라는 것들이 티끌처럼 여겨질 정도로 하나님을 많이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존재의 완전함입니다.
한편, 존재의 완전함이 바탕에 깔리면 그 열매로 나타나는 일이 판단의 완전함이고 언행의 완전함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판단의 완전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살인의 태도, 다툼의 태도, 폭력의 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나타난다면 내가 완전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살인의 태도란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있게 하신 것들을 없애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있게 하시고, 나의 머리털 하나가 붙어있거나 빠지는 것까지 있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돈이 없거나 건강이 안 좋은 것도 하나님의 ‘있게 하심’에 의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러한 상황이 없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있게 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있음을 없게 하는 것이 살인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나오면 완전함의 도상에서 벗어났음을 얼른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가정에 불만이 있습니다. 배우자나 자녀의 현재 상태가 싫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든다면 완전함의 도상에서 벗어나 살인의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어서 다툼의 태도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이익이나 손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질 수 있는 이익과 손해가 가장 큰 일로 여겨집니다. 그럴 때 내가 완전함의 도상에서 벗어나 다툼의 태도가 나타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완전함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자면 우리에게는 하나님만 보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상적으로 여겨지더라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면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재산을 다 빼앗겨도 아쉽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애초에 그것은 나의 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보물이기에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일들이 나의 이익이나 손해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천국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잃지 않고, 예수님을 잃지 않고, 십자가를 잃지 않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면 나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당해도 손해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내가 세상에서 발생하는 이익이나 손해를 크게 느낀다면 완전함에서 벗어난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폭력의 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의 태도는 내 생각과 주장을 타인에게 관철하려는 상태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맞고 저 사람은 틀렸다.’라는 생각은 우월감의 상태에서 판단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고, 나의 옳음을 강제하려는 폭력의 태도가 발생합니다. 내 생각을 어떻게 해서든 타인에게 관철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완전함을 향해 가는 도상에서 벗어난 나를 발견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이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실제로 하나님을 마주하고 나를 완전함에서 벗어나게 했던 세상의 이유가 티끌처럼 여겨질 때까지 하나님을 벌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해도 자꾸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여전히 세상 것들이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 가는 나를 십자가로 막았다면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늘로 올라가서 세상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까지 하나님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단락인 14절 이후에는 완전함과 관련하여 왕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은 듣는 자가 아닌 말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연관성에 볼 때 본문에 기록된 왕에 대한 말씀은 왕 같은 제사장인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나를 왕 취급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왕은 말을 하는 자이지 말을 듣는 자가 아닙니다. 왕 앞에 선 모든 사람이 왕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왕의 특징은 말과 행동의 이유가 자기 안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고용된 직원들은 정해진 시간 동안 근무를 합니다. 이들이 근무 시간에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의 이유는 결국 회사의 주인인 사장님이 바라는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말하는 자인 왕과 다른 셈입니다. 왕은 말과 행동의 이유가 자기 안에 있습니다. 직원들처럼 내 말과 행동의 이유가 사장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왕의 특징을 우리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선민은 하나님을 마주 봄으로써 존재의 완전함을 이루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주 봄으로써 하나님을 크게 느끼는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신이자 하나님의 아바타가 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몸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지만 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내몸을 입으셨다면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언행의 완전함입니다.
우리는 이 완전함을 제쳐놓아서는 안 됩니다. 완전하지 못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기를 반복할지언정 완전함을 이상적인 일로 무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몸을 입으신 것처럼 말과 행동을 하며 살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완전함의 기준을 포기하거나 버려서는 안 됩니다. 완전함의 기준을 포기하면 신앙을 버리는 것이고, 신앙의 발전인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내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할 수 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 앞에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말한 것처럼 반드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만 합니다. 말을 할 수 있는 권리와 들어야만 하는 의무가 같이 주어지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대통령의 권한은 말할 수 있는 권리와 들어야만 하는 의무를 주인인 국민이 부여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헌법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왕정 체제에서는 왕의 모든 말과 행동의 이유는 자신에게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선민이 왕 같은 존재라는 것은 어떤 점에서 그렇다는 것일까요? 왕 같은 제사장이란 하나님을 독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독대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중에 세상에서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 이유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람은 마음에서는 세상 밖에 있는 하나님을 독대하고 있지만, 세상에서 볼 때는 이 사람의 말과 행동의 이유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원인으로 삼아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마주합니다. 가족을 마주하고, 돈 문제를 마주하고, 건강 문제를 마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민으로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면 마주하는 사람이나 상황은 나의 말과 행동의 이유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나의 말과 행동의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동의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몸으로 마주하는 사람이나 문제가 아닌 마음으로 상대하고 있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돈 문제를 계기로 삼아서 말하고 행동할지라도 그러한 말과 행동이 나온 이유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신이고 하나님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과 행동을 하는 하나님의 분신이자 아바타로서 사는 것이 언행의 완전함입니다. 다만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판단의 완전함과 마찬가지로 언행의 완전함 역시 존재의 완전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으로 하나님을 마주하여 존재의 완전함이 유지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이유로 말과 행동을 하는 아바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크게 느껴지는 대상은 지금 상대하여 마주 보는 하나님입니다. 땅에서 몸으로 마주하고 있는 대상들을 계기로 삼아 말과 행동을 하지만, 내가 가장 크게 보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이기에 말과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내 말과 행동의 이유가 세상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의 전형이자 모범으로써 선민의 나라에서 다윗 같은 왕은 달리 없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은 하나님께 들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약관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처음으로 한 일은 듣는 마음을 간구하며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들이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말을 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함으로써 하나님을 세상 전체보다 더 크게 보는 자들이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으로써 생살여탈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이 지난 후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다 붙잡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18~20절을 보면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재판받아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제자들은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며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고 성령이 임하시며 하나님을 크게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전에는 두려워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가 더 이상 산헤드린 공회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크기에 비하자면 산헤드린 공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생살여탈권을 가진 산헤드린 공회가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태산 같아지자 산헤드린 공회는 티끌처럼 여겨졌습니다. 지나가던 개미 한 마리가 ‘너 예수를 전하면 죽인다.’라고 해서 무서워할 사람이 없듯이,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을 태산처럼 크게 보았기에 산헤드린 공회를 개미처럼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산처럼 크신 하나님이 예수를 전하라고 하시니 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바타로서 언행의 완전함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들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크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완전함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존재의 완전함을 향해 가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안 들리기에 악한 말, 해로운 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제가 느지막하게 아들 하나를 낳고 키우면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 아들아이가 세상에 놓인 상황을 보면서 그 상황에 맞도록 가르친 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이 다 쓰레기였습니다. 많은 말과 행동을 가르쳤지만, 나중에 어떤 말이 아이의 심령에 박혔는지를 보면 결국 내가 하나님을 크게 느꼈을 때 했던 말과 행동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친구의 상담을 해줬다고 합니다. 아빠가 해줬던 이야기를 친구에게도 해줬다고 하는데 정작 자기는 그렇게 하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그 이야기가 가슴에 남아있기에 친구에게도 해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슴에 새겨진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보니 저 자신이 하나님을 크게 보면서 했던 말들이었습니다. 아들의 상황을 보고 가르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을 때 하나님을 크게 보며 했던 말들이 아이 속에 박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평소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지에 대해서 무섭게 느꼈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우리에게서 쓰레기 같은 언행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를 짚어줍니다. 16절을 보면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병마를 의지하려는 것을 금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병마는 지금의 탱크 같은 군사력의 기준이자 결정적 무기였습니다. 모든 왕들은 나라를 지키고 보존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병마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선민의 왕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민의 왕과 이방의 왕이 같은 점은 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말하는 이유가 왕 안에 있습니다. 다만 선민의 왕이 다른 점은 하나님을 이유로 삼아 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말하는 이유가 왕 안에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민의 왕은 그저 자기 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이유로 삼아 말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경계 안에서 보면 다른 왕과 같다는 것입니다.
왕에게는 신분에 맞는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역할 의식이 병마를 얻으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신분이 있습니다. 저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라는 신분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잘해내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할 의식이 말과 행동의 이유가 된다면 완전함은 깨지게 됩니다. 이미 하나님을 마주하는 존재의 완전함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에서의 신분과 역할이 더 크게 보이는 상태입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제일 커야만 합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서 주어진 신분에 어울리는 역할을 크게 보면서 말과 행동을 한다면 이미 하나님을 작게 보는 상태입니다. 누구나 ‘맡겨진 일을 잘 해내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자녀 앞에서는 엄마 노릇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회사에서는 부장으로서 일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에서 엄마나 부장이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역할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에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내가 사장이든 부장이든 말단 직원이든 하나님을 마주하는 사람은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합니다. 요셉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나 총리에 올랐을 때도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했습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포로의 신분일 때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했고,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했습니다. 왕의 신임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왕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말과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 살아계심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독대하고 하나님을 마주하는 중에 할 수 있는 말과 행동들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보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과 행동만을 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함이 깨지는 상황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고, 책에서 답을 얻으려 하고 이것을 이유로 말과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주권자이시고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다면 다른 곳에서 말과 행동의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내 모든 문제를 이끌고 계시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내게 주어진 사회적 신분에 요구되는 역할을 잘 해내고 싶어 하는 것도 나의 말과 행동의 이유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면 완전함이 깨진 것입니다.
또 17절을 보면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존재의 완전함이 깨져서 언행의 완전함도 깨진 결과로 나타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앞서 왕이 병마를 원하는 상황을 비유로 삼아 역할이 이유가 되는 말과 행동이 언급되었습니다. 한편 많은 아내와 은금을 탐하는 것은 왕으로서의 권한이 이유가 되어 말과 행동이 나타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왕은 나라에서 제일 높은 자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아내를 마음대로 갖고 은금과 같은 재물도 마음대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권한을 크게 보고 그 권한으로 가질 수 있는 것들을 크게 볼 때,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는 상태는 깨져버립니다. 본문은 그러한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왕은 왕으로서의 권한이 있기에 그럴 수 있다지만, 내게 무슨 권한이 있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앉고 서고, 가고 안 가고, 하고 안 하는 모든 것이 권한입니다. 어딘가에 갈 수 있다는 권한 때문에 갔다면 언행의 완전함은 깨진 것입니다.
왕이 아내를 많이 가질 권한이 있고, 은금을 많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이 있더라도 그 권한을 행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는 상태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권한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은 내가 쓸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그 권한조차도 부지중에라도 쓰면 안 됩니다. 내 돈을 써서 옷을 사고, 차를 사고, 명품을 사는 것은 나의 권한입니다. 그러나 권한을 이유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이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다면 아무리 많은 권한이 주어져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권한은 마음대로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 권한 내에서 하나님의 말과 행동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의 권한이 있으면 왕으로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되, 그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이니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고 싶으니까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권한대로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늦잠을 자는 것조차도 우리에게 허락된 권한입니다. 성탄절이 휴일이기에 늦게까지 잠잘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좀 더 자도 된다는 권한조차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말과 행동의 이유를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아바타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과 행동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아바타로서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18~19절을 보면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왜 율법서를 언급한 것일까요? 사람이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해도 괜찮은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 율법서에 있으니, 왕이라면 그것을 끼고 살라는 겁니다. 율법서는 결국 하나님 말씀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지금 내가 만나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시대에 말씀하셨던 하나님, 이천 년 전에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시간을 타지 않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담고 있는 것이 율법서입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느냐 마느냐를 생각하기 전에 율법이 지켜질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크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왕이 율법서를 통해서 맨 먼저 해야 할 일이란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 보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언제든지, 제약 없이, 걱정 없이, 무엇이 잘 되고 못 되고를 염려 없이 하고자 한다면 율법을 끼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 보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는 율법의 완성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끼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는 모든 것들을 등지고 떠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주하면서 하나님을 크게 갖는 일만을 의심 없이 매진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입니다. 이 세상에서 말과 행동의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이유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는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어진 신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권한을 사용하기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 권한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과 행동만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려면 날마다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하기 위하여 우리는 율법의 총화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24시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완전함을 화두로 한 해를 보내며 또 새해를 맞이함으로써, 지난해 동안 불완전했던 내 모습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새해에는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도록 이 연말에 완전함을 묵상하며 완전함의 의미가 뼈에 새겨지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