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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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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약속,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_태승철

by 태승철 · 25-07-03 08:49 · 725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축복 약속,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의 줄거리 :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하나님이 주신 규례와 계명을 지키면 주시겠다는 세상 축복의 리스트가 길게 이어집니다. 그동안 기독교 종교가 복음과 신앙의 진리에 대해서 오해한 내용들이 참 많지만,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바로 구약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세상적 축복 약속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오해하면 자신을 스스로 속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중과는 상관 없이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적 축복 약속의 진의를 살펴봅니다.

 

 

축복 약속,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

 

(레위기 26:1~46)

 

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2.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4.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5.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7.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8. 또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9.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를 번성하게 하고 너희를 창대하게 할 것이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한 내 언약을 이행하리라

10. 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으로 말미암아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

11.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13.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 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우리가 읽은 1~13절에는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할 때 받게 되는 축복처럼 보이는 일들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4~39절까지는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어겼을 때 받게 될 형벌의 목록이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집니다. 40~46절에는 회개하고 돌이킬 때 다시 회복하리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축복 약속,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참 축복 약속이 있고,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이 있습니다.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을 참 축복 약속으로 오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으로 우리를 속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에 스스로 속아 넘어갈 뿐입니다.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에 대한 오해는 기독교 종교 역사상 복음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에 대하여 종교인들이 갖는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13절은 다양한 축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처럼 보입니다. 본문에는 직접적으로 축복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본문과 같은 의도에서 기록된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축복이라는 표현을 쓰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이 등장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축복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고 해서 하나님 마음에서 그것들을 참 축복이라고 여기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표현은 선민들의 언어가 아직도 이방인의 언어와 똑같은 상태임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민들이 이방인의 가치관과 축복관을 따르는 상황에 대해 너희가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 내가 이렇게 하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마치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들은 구약을 살펴보는 동안 반복하여 등장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을 접할 때는 자동으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규례와 계명을 준행함이란 문자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규례와 계명의 준행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섬김이란 곧 재물을 무척 좋아함입니다. 좋아하기에 갖고 싶어 하며 노력과 수고를 통해 추구하고 가졌어도 더 많이 갖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똑같이 하나님께도 적용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물에 대한 열망을 죽이지 않은 사람이 본문의 말씀을 보았다고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지키면 축복을 주신다고 하니 그대로 하고자 합니다. 마음으로 재물을 섬기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지키려는 의욕이 발생합니다. 설령 문자대로 규례와 계명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몸담았던 기독교 종교의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 대신에 이 세상 것들을 좋아하면서 섬겼습니다. 항상 세상 것을 더 많이 갖고 싶어 했습니다. 기독교 종교는 이러한 상태를 묵인한 채 계속해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것만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전해왔던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을 보면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것을 좋아하는 마음 상태를 조금도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돈을 좋아했고, 성공을 좋아했고, 건강과 장수를 좋아했습니다. 기독교 종교는 이러한 세상의 가치를 얻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지킬 것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라고 외쳐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교인들이 들은 대로 행하려다 전부 나가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나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좋지만 실제로 순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축복에 대한 말씀을 들어도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이방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것을 바라고 갖고 싶어 하는 중에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하려는 일을 잘되게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이 지켜질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지켜져야 합니다. 규례와 계명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안식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안식이란 곧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천국 보좌 앞에서 성회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는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당신의 몸을 우리 마음이 입도록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리스도로서 하신 일입니다. 성경에는 요셉이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같은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의 몸을 우리가 입을 옷으로 줄 수 없기에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예수님만 가장 완벽한 믿음의 모습으로 사셨고 동시에 그리스도로서 당신의 몸을 우리가 입을 수 있게 제공해 주셨습니다.

하늘에서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때,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면하시는 대로 나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느끼시는 존재감을 나도 느끼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느끼시는 만족감을 나도 느끼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느끼시는 전능하심과 사랑하심과 주권자 되심을 나도 느끼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으면서 내게도 전달되는 것입니다. 다만 화목제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마음은 세상 것을 좋아함이 비곗덩어리처럼 붙어서 체질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시는 느낌이 수용되는 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점점 예수님이 상대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이 가지시는 모든 생각과 감정과 느낌을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다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는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전달되고, 내 언행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열매로 맺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축복에 대한 말씀의 내막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무르며 하늘로 올라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좋아하는 세상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니 결국 포기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순종도 예배당에서 제시하는 생활 원칙이나 의무감이나 과제를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목사님들도 강단에서 순종을 외치지만 결국 예배당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바를 따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이해입니다.

우리는 참 축복 약속과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5절을 보면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수확이 3월경에 이루어지고, 포도 수확은 7월경에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으로 3월 초부터 보리를 수확한다고 치면 4월이면 수확이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7월까지 보리를 수확할 상황이라면 엄청난 풍년이 든 것입니다. 포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 수확은 7월경에 이루어지고, 보리 파종은 10월에 이루어집니다. 7월부터 거둬들이는 포도를 10월의 파종기까지 거두는 상황도 엄청난 풍년이 든 것입니다. 누구나 바랄만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마치 세상에서 축복이라고 여기는 상황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선민을 하나님께서 더욱 자극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 축복을 열망해도 되는구나! 세상 축복을 받을 수 있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무조건 잘 지켜야 되겠다.’라는 충동을 불러일으키시려는 의도를 갖고 하신 말씀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3월부터 4월이면 끝날 보리 수확을 무려 7월까지 해야 할 정도로 풍년이 들 수 있다고 하니 이러한 풍요를 받을 수 있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풍요를 위해서 하나님의 규례나 계명도 지킬 것이다.’라는 마음을 갖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아도 부자만 될 수 있다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이해이며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입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과 친해져서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반면 종교생활이란 세상 것들을 마음에 담은 채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본문 말씀은 세상을 향한 축복의 약속으로만 보입니다.

 

이제 본문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아 봅니다. 다시 3~4절을 보면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보리를 타작할 때와 포도를 수확할 때 풍년이 되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삶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 또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만 들어도 펄펄 뛸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말씀입니다. 9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를 번성하게 하고 너희를 창대하게 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죽지도 않고 잘 자란다니 이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으로 말미암아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햇곡식이 너무 많이 나와서 묵은 곡식은 치워야만 하는 풍요로운 상황이라니, 요즘으로 말하자면 돈이 자꾸만 들어와서 주체할 수 없는 상황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을 하시기에 앞서 규례와 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규례와 계명을 지키려면 마음이 안식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안식이란 마음이 천국 보좌 앞에서 성회에 참석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친해져서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만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은 지켜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규례와 계명을 지키라 말씀하신 후에 내려다보시니 정작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지 않고, 하나님의 측근이 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진짜 축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대표로 하나님 곁에 계시면서 하나님을 좋아하시고, 하나님의 있음의 존재감으로 충만하시고, 하나님의 좋음으로만 만족감이 충만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하심과 주권자 되심을 충만하게 느끼고 계십니다. 이것은 선민에게도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올라와 있는 선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짜 축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규례와 계명이 지켜지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측근이 되어야만 합니다. 규례와 계명이 지켜지는 것은 증거입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진짜 축복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축복이란 규례와 계명의 결과가 아닙니다. 축복을 받은 증거가 규례와 계명이 지켜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측근이 되었다는 증거가 규례와 계명이 지켜짐인데 정작 선민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가 하고 보시니 밭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일에 마음이 전부 가 있습니다. 보리를 수확하고 포도를 수확하는 일에 모든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삶을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가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원수와 라이벌로부터 삶을 지킬 수 있는가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손과 하는 일이 형통하고 번영할 수 있는가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마음을 전부 세상에 쓰고 있기에 하늘에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이방인들과 축복의 개념이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염두에 두시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축복을 언급하십니다. 마음이 천국에 올라와야 할 사람들의 상태를 보니 세상 사람들의 언어 속에서 축복으로 여기는 것들에 마음이 매여있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일일이 언급하시면서 그런 일들은 내가 할 것이다. 너희는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지 말아라. 그런 것에 마음이 묶여서 진짜 축복을 잃지 말아라. 내가 주는 진짜 축복이란 너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와 나를 만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선민이라면 전능하시고, 사랑하시며,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측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민에게 주어진 진짜 축복입니다. 그러나 선민이 이러한 진짜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일일이 언급하시며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선민이라면 세상에서 축복으로 여기는 일들에 집착하고 매여서 마음이 땅에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상황은 다양합니다. 농사일이란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대표합니다. 일에 신경 쓰는 동안에는 마음이 하늘로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잘되게 하실 것이니 마음은 하늘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또 삶에는 안정적인 토대가 필요합니다. 평화가 임해야 하고 원수나 라이벌이 없어야 합니다. 행여나 원수가 생긴다면 다섯이 백을 쫓고, 백이 만을 쫓는 것과 같은 승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니 마음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늘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또 햇곡식이 많아서 묵은 곡식을 치워야 할 상황은 삶의 풍요로움을 대표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니 신경 끄고 마음은 하늘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양한 상황들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읽고 ! 규례와 계명만 지키면 이 모든 것들을 다 주신다니 정말 좋다. 돈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판인데 규례와 계명만 지키면 된다니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한다면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마음으로 붙잡았습니다. 그것을 이루려니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 율법을 따르고자 했고 실제로 잘 지켰습니다. 이처럼 지독하게 율법을 지킴으로써 돈을 벌려고 했던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주권자 하나님을 움직여서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 말씀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이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것들에 대해 완전히 신경을 끄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축복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 이후의 신약시대 교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지켜졌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란 본문에서 언급된 내용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보리를 7월까지 수확해야 할 정도로 풍년이 들었던 것도 아니고, 백 명이 만 명의 원수를 쫓는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으며, 평화와 안정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햇곡식이 너무 많아서 묵은 곡식을 치워야 하는 풍요로움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당했고, 끊임없는 박해와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300년 가까운 세월을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 카타콤에 들어가서 대를 이어가며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본문 말씀대로라면 원수를 쫓아내듯 로마를 쫓아내야 했으며,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쫓아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와 유대인의 박해는 그대로 허용되었고 더는 도망칠 곳도 없어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구약의 약속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애초에 말씀을 잘못 이해했기에 모순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감히 구약과 신약이 모순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아예 따로 이해하려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는 본받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구약에서 규례와 계명을 지키면 세상 축복을 받는다고 했으니 그것은 그것대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설교와 삶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상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아직도 이방인의 언어로 축복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시고 세상일은 내가 책임질 것이니 너희는 세상일에 신경 쓰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시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염두에 둔다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세상의 삶이 망하거나 흥하거나 너희와는 상관이 없다. 너희는 세상에 대해 신경을 쓰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든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햇곡식이 넘쳐서 묵은 곡식을 처리해야 할 상황이 온다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도록 하시는 이유는 세상 축복을 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와서 천국 보좌 앞으로 모이고 하나님의 측근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떠나기를 바라십니다. 본문은 마음을 묶고 있는 세상 축복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의 필요한 것을 다 알고 있고 책임질 것이다. 그러니 신경 끄고 하늘로 올라오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세상에서 복을 주신다고 했으니 언제 주실지 기다려 보자!’라고 받아들인다면 완전히 잘못된 이해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안식과 절기에 대한 의미를 계속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지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순종의 대표적 사건으로 이야기합니다. 참 쉽게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마음의 첫 번째 존재감으로 느끼고 마음 채움을 위한 좋음의 대상으로 느끼면서 바칠 수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좋아했던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마음에서 이삭을 붙잡듯 세상 것을 붙잡은 사람들에게는 순종을 이야기해도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예 순종의 의미를 마음에서 붙잡고 있는 세상 것을 얻을 수 있는 조건으로 바꿔버립니다. 심지어 그 순종은 바리새인만도 못합니다. 예배당이 만들어 놓은 원칙에 순종하면 복 받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초실절이나 수장절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절기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초실절은 첫 열매를 수확하는 절기였고, 초막절이라고도 불리는 수장절은 모든 곡식을 곳간에 저장하는 절기였습니다. 이러한 절기를 수확의 축제라고만 생각한다면 매우 잘못된 이해입니다. 이러한 절기에는 모두 마음이 땅을 떠나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렇기에 초실절이나 수장절은 땅의 것들이 마음을 붙잡아 끌어당김이 강력해지는 시기를 경계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신앙의 대전제입니다.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몸부림치고자 한다면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세상 축복의 약속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대해 신경을 끄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14~39절을 보면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와 같은 뜻의 말씀이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이 어떤 형벌을 내리시리라는 이야기가 지루할 정도로 길게 반복하십니다.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준행하지 않음이란 규례와 계명을 지켜지지 않을 만큼 하나님의 측근이 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측근이 아니라는 것은 곧 마음에 세상 것을 담고, 마음이 세상에 머물며, 세상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것을 좋아할 때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일들만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는지 분명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애쓴다면 그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오히려 바라지 않는 나쁜 일이 일어나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것을 좋아함으로써 본문의 말씀을 거꾸로 오해해 왔습니다. 예전에 길거리를 보면 바둑판이나 장기판을 두고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는 야바위꾼들이 있었습니다. 야바위꾼들은 나름의 필승전략을 갖고 있기에 돈을 따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돈을 거는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하나님이 세상 축복을 약속 해주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를 기망하고 스스로 속아 넘어갑니다. 아직도 본문을 볼 때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 지키면 세상에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23절을 보면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라고 말씀하시고, 27절을 보면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늘로 가서 하나님의 측근이 될 때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청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항함이란 마음이 하늘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 삶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늘 불만과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삶이 어려울수록 마음은 세상을 벗어나 하늘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하늘로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41절을 보면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낮아져야 한다는 말씀을 뒤집어 보면 할례 받지 않음이란 마음이 높아진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음이란 마음이 육체로 만나는 세상과 잘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마음의 할례가 일어나지 않고 육체로 만나는 세상과 마음이 달라붙어 있으면 이상하게 이 땅에서 높아지고자 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선민은 이 땅에서 높아지는 자들이 아니라 아예 이 땅을 떠나서 천국으로 매일매일 들어가야 합니다. 날마다 천국에 출석해서 하나님과 친해지고 하나님의 측근이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그대로 전달되어서 세상에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축복입니다. 그럴 때 내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신약시대의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카타콤에 들어가서 살든, 본문의 말씀대로 햇곡식이 너무 많아서 묵은 곡식은 치워야 할 정도의 풍요로움이 주어지든 그것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뜻과 계획대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정리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규례와 계명이 지켜질 정도로 너희 마음이 하늘로 올라와서 측근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지 못하는 이유는 이방인들이 말하는 축복에 마음이 매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일은 알아서 하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단순히 세상일에 대한 축복의 약속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것은 세상일이 우리의 권리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망하든 흥하든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이 이방인의 언어를 갖고 있음을 염두에 두시고 세상에서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언급하십니다. 이것들을 얻고 싶어서 선민들의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오지 못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약속과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언어를 갖고 있는 너희 속에서 축복이라고 하는 것들은 내 뜻과 계획이 있으므로 알아서 할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것들이니 너희는 신경 쓰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한 신경을 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치과에서 충치를 치료할 때 심한 경우에 신경을 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을 집착하게 하고 잡아끄는 세상 것들에 대해 주님의 십자가로 신경을 꺼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망하려면 망하고 흥하려면 흥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측근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성경에 기록된 규례와 계명이 지켜지게 됩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측근 됨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참 축복을 받아 누리며,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에 대해 더 이상 오해하지 않는 수준의 영성을 유지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짜 축복을 누리게 하시고, 축복처럼 보이는 약속은 하나님께서 지켜나가시도록 우리의 신경을 끌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