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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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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태세 전환_태승철

by 태승철 · 25-07-05 08:34 · 652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태세 전환>의 줄거리 :

레위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천국 보좌의 하나님 최측근 자리에 앉히시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려면 대전제가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다만 이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과 규례들이 힘겹도록 무겁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이런 힘겨운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과 지시를 가볍게 이루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태세 전환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와 지시와 명령에 대하여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로 지키려 하지 말고, 대신에 하나님 자신을 향한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으로 태세를 전환하라 하십니다.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태세 전환

 

(레위기 27:1~3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레위기 마지막 장에는 내게 주어진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절에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할 때 당시 노동력의 가치를 따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자녀나 여자에 대해서도 그 값을 매겨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9~13에는 재물로 대표되는 가축에 대한 서원의 방법이 기록되어 있고, 14~15절에는 집을 서원하여 드리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16~25절에는 밭을 서원하여 드리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이처럼 소중한 것을 예물로 드리는 서원에 관한 말씀 이후에는 초태생에 대한 말씀, 온전히 바침에 대한 말씀,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처음 난 가축을 드리고, 온전히 바치고,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기에 자발적인 예물을 드리는 서원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레위기 마지막 장의 주제는 하나님을 향한 선민의 자발성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태세 전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태세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기존의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멸하고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태세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로부터 영적인 승리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서원에 대한 말씀 이후에는 가축과 집과 토지의 서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원(誓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데르(נדר)맹세하다, 다짐하다, 헌신하다와 같은 뜻입니다. 이러한 뜻을 염두에 두자면 떠오르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3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맹세란 하나님을 향한 자발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약속을 잘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내 생각이나 말이 절대로 옳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나의 신실함이 변함없을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서원이란 나 자신에 대한 맹세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자발성을 뜻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를 드림이란 하나님을 향한 자발성의 표현입니다. 레위기 27장은 이러한 서원의 의미와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원은 정언명령(定言命令)이 아닙니다. 정언명령이란 조건과 단서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지켜야만 하는 확정적인 규칙을 의미합니다. 서원이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자발적인 행위이기에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바치지 않는다고 해서 탓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표현할 다른 길이 없어서 내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서원입니다. 쉽게 말해 나는 하나님이 너무 좋습니다.’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민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했던 초태생을 드리고, 온전히 바치고, 십일조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리는 서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서원은 하나님을 좋아하여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서원은 경제성만을 따진다면 완전히 낭비이고 소모입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이 루스 들판에서 머물렀던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험악한 시기였습니다. 야곱은 꿈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특이합니다. 21~22절을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서원이 아닌 하나님과의 거래입니다.

서원은 하나님을 좋아함이 바탕이 됩니다. 그저 하나님으로 기뻐서 아무것도 바라는 바 없이 내게 소중한 것을 예물로 드리는 것이 서원입니다. 하나님 좋아함을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인 것입니다. 레위기 마지막 장에 서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하는 이유는 선민이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태세 전환을 이룰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계명이나 율법이나 규례와 같은 정언명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선민이라면 무조건 지켜야 하는 일입니다. 다만 선민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145절에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거룩함은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요구는 선민에게 버겁습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예이고 이것은 선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본래 죄악 됨을 염두에 두자면 선민이 하나님처럼 거룩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모든 계명과 율법과 규례는 뿌리 깊은 죄적 체질을 거스르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계명과 율법과 규례란 익숙하지 않은 일이고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함의 조건으로 제시하신 계명과 율법과 규례는 우리의 본성적 죄적 체질에 맞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로서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계시와 요구에 대해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한계를 잘 아시고 서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서원에는 태세 전환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앞서서 능동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계명과 율법과 규례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서원의 의미를 따름을 통해 소극적 태도는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태세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왜 이러한 태세 전환이 필요한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요구하시며 거룩함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대표적 방법이 5대 제사입니다. 5대 제사의 취지를 생활화하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거룩하기 위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과 율법과 규례는 죄적 체질에 반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여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입니다. 그렇기에 5대 제사로 대표되는 계명과 율법과 규례는 굉장히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버겁습니다. 문제는 죄적 체질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임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와 지시와 명령은 하나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내 속에 있는 죄의 체질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의 체질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과 관계하며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로 하나님의 요구와 지시와 명령을 대하다 보면 이윽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희석되고 소멸하고 끊어지고 맙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마지막에 하나님 자신을 향한 능동성을 말씀하십니다. 선민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율법과 규례와 같은 명령과 요구들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하는 상황입니다. 죄적 체질에 의해 거룩함을 어색하고 거북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지못해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를 붙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민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태세를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지시와 요구와 명령도 저절로 지켜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소극적이라면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도 나는 못하겠다. 해야 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수동적 피동적 소극적 태도를 보일 때, 다른 일에 대해서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죄란 죄적 체질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감입니다. 이러한 빗나감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일 수 있습니다. 빗나감의 죄적 능동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겨우 붙잡고 있는 상태는 오래 갈 수 없으며 결국 끊어지고 맙니다.

본래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태도가 죄적 체질로 인해 빗나가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비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첫눈에 반해버릴 만큼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게 되자 생각에 변화가 생깁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과의 결혼을 바라게 됩니다. 결혼에 대한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이 생겨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놀기만 좋아하는 아이를 공부하라고 야단칩니다.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습니다. 방에 들여보내기는 하지만 정말로 마음을 써서 공부를 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소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는 것은 소의 일입니다. 그런데 공부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극적인 아이가 게임을 할 때는 밤을 새울 정도로 적극성을 보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을 향해서는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빗나감의 죄적 체질입니다. 이 죄적 체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으로써 나의 존재감의 대상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으로써 나의 만족감의 근거가 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향한 적극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과 지시와 요구의 정언명령이 나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쉽게 지켜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세상에 대한 적극성을 유지한다면 하나님의 지시와 요구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지시와 요구는 굉장히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모든 규례에 대해 이것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라고 여기고,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도 어떻게 내가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 있느냐?’라고 버겁게 여기게 됩니다. 마음의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와 요구는 무겁게만 느껴지기에 어떠한 율법이나 계명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레위기를 살펴보며 말씀 전체를 감싸는 하나의 분위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는 5대 제사를 중심으로 각종 율법과 계명과 규례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대 제사의 취지를 생활화할 때 선민에게서 나타나는 모습과 거룩하게 구분됨을 말씀하십니다. 선민이라면 거룩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들이 지켜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레위기의 주제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레위기 전체에는 하나님의 지치심이라는 분위기가 깔려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에 지치시고 힘들어하신다는 것일까요?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민들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습니다. 마치 물먹은 솜뭉치처럼 축 처져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인도하시는 상황을 마치 졸도한 사람을 일으켜서 끌고 가는 것처럼 답답해하십니다. 죄적 체질을 가진 것은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선민들을 하나님 최측근의 자리로 부르시고 앉히시고자 끌어당기십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자꾸만 하나님의 기대를 벗어납니다. 레위기에는 물먹은 솜뭉치처럼 답답하게 구는 선민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지치심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전체를 보며 하나님도 힘들어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263~4절을 보면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 내가 너희에게 철 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축복처럼 여기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니 세상에 대한 신경을 끊고 하나님을 향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씀에는 어떻게 하든지 선민의 자발성을 끌어내고 동기를 부여하시려고 안간힘을 쓰시는 하나님의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수가 무대에서 공연을 합니다. 그런데 객석의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가수는 마치 공동묘지에서 공연을 하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가수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며 비지땀을 흘립니다. 바로 이러한 안쓰러운 가수의 공연 상황이 하나님께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선민을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최측근 자리로 앉히시려고 수고하십니다. 레위기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지치심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서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이 하나님 자신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향해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을 요구하시며 레위기를 끝내십니다. 본문은 마치 하나님께서 중요한 부분은 다 마무리하시고 살짝 끼워두신 내용 같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중간까지는 참 재밌었는데 마무리가 시시하고 진부한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식으로 이해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26장까지는 하나님의 지치심의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선민은 물먹은 솜뭉치처럼 되어서 천국에 계신 하나님 대해서는 소극적입니다. 마지못해 하나님을 따르는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선민들을 거룩함으로 끌고 가시려고 하나님께서는 5대 제사로 대표되는 각종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마무리 짓는 27장에는 선민을 향하신 하나님의 속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을 향한 자발성입니다.

사람이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으로 채워지려 하는 것은 본능적 마음의 속성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 자신을 향해 자발성을 띤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만 이루어진다면 사실상 레위기 1장부터 26장까지의 모든 계명이나 율법이나 규례는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안 되기에 이 모든 말씀이 제시된 것입니다. 존재감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껴야만 견딜 수 있는 마음이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자발성을 띨 수 있다면 거룩함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선민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레위기에서 제시된 5대 제사도 필요 없습니다. 따로 거룩하라 말씀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죄적 체질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상태로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이 세상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해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을 띠는 죄적 체질 때문에 레위기 1장에서 26장까지의 각종 계명과 율법과 규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이어지는 27장은 단순히 레위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슬쩍 끼워 넣으신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먼저 말씀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에 대한 내용들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우리가 존재감을 느껴야 할 유일한 있음임을 의미합니다. 또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좋음임을 의미합니다. 시편 374절에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죄적 체질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고 하나님을 향한 적극성을 띨 수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세상 것을 좋아하여 세상을 향해 적극성을 띠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해 적극성을 띠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에녹이나 엘리야는 살아서 들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야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세상을 향해 보이는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은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이 죽음을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없이도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을 하나님께만 적용할 수 있다면 성경 전체는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죄적 체질 때문에 세상을 향해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나를 죽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마주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마주 보시면서 느끼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만 예수님이 느끼시는 하나님의 존재감에 대해 적극성을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수준의 감도를 갖기를 바라며 나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서원입니다. 서원은 하나님이 좋아서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드리는지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라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죄에 빠져있는 나는 하나님을 향한 적극성과 능동성과 자발성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적극성과 능동성과 자발성을 보이는 실제 과정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마주하면서 느끼시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똑같은 감도로 느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예수님과 같은 감도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이제까지 살면서 존재감을 느껴온 대상들이 있습니다. 기쁨의 근거로 느끼는 좋음의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마음에 살덩어리가 되고 비곗덩어리처럼 유착된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향하려는 나를 끊어버리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이제 하나님에 대한 적극성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느끼시듯이 하나님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 주님이 가지신 것처럼 하나님의 좋음으로 인한 만족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마주하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자 되심과 사랑하심을 끊임없이 의식에 켜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나의 적극성과 능동성과 자발성이 조금도 흘러가지 않도록 십자가로 틀어막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이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하며 느끼시는 존재감과 만족감과 주권자 되심에 대해 똑같은 감도로 느낄 수 있기를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서원의 의미가 충족됩니다. 세상에 남아있는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집이나 토지와 재산까지도 다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의 값을 매겨서 하나님께 드리는 경우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가축이나 집이나 토지의 값을 매겨드리는 경우에 대한 말씀도 등장합니다. 결국 몸 때문에 주어진 세상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리는 셈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는 사람이나 가축이나 집이나 토지로 나누어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발성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 자발성을 띠기 때문에 세상에서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레위기의 결론은 내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에서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좋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 적극성을 띨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바치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지시와 규례는 다 지켜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며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의 빗나감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을 마주하시며 느끼시는 존재감과 만족감의 감도가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사랑하시고 주권자 되심을 계속해서 의식에서 켜놓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힘 입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능동성과 자발성과 적극성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친해지고, 하나님을 벌어 하나님 재벌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레위기에서 제시하신 모든 규례와 지시들이 저절로 다 지켜지게 됩니다.

적극성의 방향이 빗나간 채로 내버려두고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마지못해 하나님의 계명과 지시와 요구에 응하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옅어지고 소멸하여 끊어집니다. 아무쪼록 주님을 옷 입고 하나님을 향한 적극성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는 하나님의 최측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레위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물먹은 솜뭉치 같은 선민들을 바라보시며 마음에 지치셨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이 맑은 하늘처럼 갤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힘입어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태세를 전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