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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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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드림이 막히는 자 빗나가는 자_태승철

by 태승철 · 25-01-11 09:13 · 10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 드림이 막히는 자 빗나가는 자>의 줄거리 :

믿음은 마음의 행위입니다. 인격의 심장인 마음을 꺼내 어떤 대상에게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드림으로써 그 대상을 통해 마음은 채움을 기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문제는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마음을 드리느냐? 하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복음 신앙은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마음 드림이 아예 막혀버린 사람이 있고, 마음은 드리는 데 하나님을 빗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 드림이 막히는 자 빗나가는 자

 

(출애굽기 14:15~31)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30. 그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본문은 그 유명한 홍해의 기적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른 땅을 건너지만 그 뒤를 쫓던 애굽 군대는 물살에 휩쓸려 몰살당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중심으로 마음 드림이 막히는 자 빗나가는 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3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을 점검하고 본문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언급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라틴어로 크레도(credo)’라고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크레도는 심장을 뜻하는 코르(cor)와 준다는 뜻의 도(do)의 합성어로서, ‘심장을 꺼내 드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에게 마음을 드리게 되는 이유는 그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채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라틴어에서는 이렇게 마음을 드리는 모습을 믿음이라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채워지리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마음을 드리는 대상의 좋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좋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대상에게 마음을 드리는 법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613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이란 결국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믿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좋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채워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믿음을 갖고 삽니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좋음의 대상이 있다면, 크레도의 의미대로 내 인격의 심장인 마음을 꺼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좋음을 믿고 그 좋음으로 내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는 대상에게 마음을 드리게 됩니다. 돈을 좋다고 여긴다면 돈에 마음을 드리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에 직접 마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은 예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려면 그동안 다른 대상에게 마음을 드리느라 더러워진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깨끗해져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갈 수 있어야만 마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러워진 마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이러한 역할을 하기에 히브리서 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려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복음 신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를 통해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특이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18절을 보면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홍해에 다 빠져 죽은 뒤에야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알았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깜깜한 어둠에 묻혀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태양신 라를 주신으로 믿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잡신들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열 가지 재앙을 겪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감은 의식의 어둠 속에 묻혀있었습니다. 그런데 홍해에서 군대가 멸절 당하는 사건을 통해 애굽 사람들의 의식의 무대에 여호와 하나님이 서게 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조명이 비치므로 의식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막강하심과 강대하심과 위대하심을 일등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하나님이 언제나 일등이 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에서 일등이 될 수 있는 후보들을 끊임없이 쳐냄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내 의식의 무대에서 다른 모든 대상이 어둠에 묻히고 오직 하나님께만 조명이 비추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홍해의 기적을 통해 애굽 사람들의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서 영광을 받으신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좋음으로써 영광을 받으셨다면,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막강하심과 강대하심과 위대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영적인 진보를 위해 권유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셨듯이 저도 교인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 강하게 느끼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직원들이 모여서 사장님의 뒷담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사장님이 나타나면 더는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사장님 몰래 뒷담화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실제 내 앞에 있는 대상으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장님은 눈에 보이기에 실제 대상으로 느끼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을 실제 대상으로 느끼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살아계신 실제 대상으로 느끼는 상태는 신앙이 탁월하게 발전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 대해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강대하심과 위대하심에서 애굽 사람들의 의식의 무대에서 일등이 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애굽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참 이상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살아계신 실제 대상으로 느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것이 된다면 발전한 영적 단계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홍해에서 군대가 멸절하는 사건을 통해 분명히 하나님의 강대하심과 위대하심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계에 도달했음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야기가 뒤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도 믿지 못한 이유는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로, 유일한 좋음으로, 온 세상을 지배하시는 유일한 주권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진행 되어온 2,000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그 어떤 탁월한 신학자나 목사, 신부나 추기경까지도 하나님을 속속들이 아는 일에 있어서는 마귀만큼 뛰어나지 못합니다. 모세조차도 이론적으로는 마귀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는 것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할머니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이론은 마귀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도 절대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설령 하나님을 의식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이러한 마귀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선민이자 교인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원죄로 인해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려고 합니다. 죄와 저주 속에 갇혀 있기에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만 이상하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받으시려고 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를 예로 들자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받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지 않고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붙잡고 사는 동안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깨끗해진 마음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날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음은 마음을 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이 내게 오도록 허락하였다. 네 마음이 내게 오기를 기다린다. 네 마음이 내게 오면 그 마음을 나로 채울 것이다.’라고 결정하시고 뜻하셔서 예정하셨기에 마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정과 뜻하심이 없다면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뜻하시고 예정하신 존재가 아니라면 사장님의 뒷담화를 하는 직원들 같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의 강한 존재감을 느끼면서도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받으시고자 작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한편 31절을 보면 선민의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과는 다르게 믿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믿음에 대한 언급이기도 합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말씀드렸듯이 믿음이란 결국 마음을 드림입니다. 믿었다는 표현이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받으시고자 결정하시고 기다리시지 않는 한 누구도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으며, 드려진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랄 수도 없으며, 하나님으로 채워짐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사람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도록 정해놓으신 사람들 중에서도 비극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선민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향을 꺾어지게 하고자 집요하게 역사합니다. 우리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을 빗나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31절을 읽어봅니다. 주의를 기울여 말씀에 담긴 의미를 잘 파악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믿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바꾸면 이스라엘이 그 큰 능력을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여호와를 보았으므로 여호와를 믿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문장은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여호와를 믿었고, 후자는 여호와를 보았으므로 여호와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보고 믿은 것은 여호와가 행하신 큰 능력일까요? 아니면 큰 능력을 행하신 여호와일까요? 이것은 얼핏 똑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보았다는 점은 같습니다. 다만 여호와여호와가 행하신 큰 능력은 동일한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라면 어떨까요? 진짜 좋음으로 믿고 마음을 드리는 대상은 여호와여야 할까요? 아니면 여호와가 행하신 큰 능력이어야 할까요?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이자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드렸으니 믿음이 작동한 것은 맞습니다. 마음을 드리는 이유는 좋다고 여겨지는 그것으로 마음이 채워지기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가 갈라지는 전대미문의 기적을 경험하고 난 뒤에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앞으로 보겠습니다마는 이들의 찬양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원망과 불평으로 바뀝니다. 이 찬양이 여호와가 좋아서 부른 찬양이었다면 원망과 불평으로 바뀔 이유가 없습니다. 여호와는 여전히 이들과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호와가 행하신 큰 능력이 좋아서 찬양을 했습니다. 쉽게 말해 여호와가 좋아서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큰 능력을 좋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라는 말이 무색하게 원망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큰 능력을 행하신 것을 보고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믿고 마음을 드린 대상은 여호와가 아닌 큰 능력이었습니다. 이들은 불편한 상황이 없도록 하나님이 홍해의 기적과 같은 큰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제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큰 능력으로 기적들이 계속 주어질 것이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이 마음을 드린 대상은 여호와가 아닌 기적을 일으키는 큰 능력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라는 화살표의 의미를 갖는 표적(sign)이었습니다. 지시하는 간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 내가 이렇게 홍해의 기적을 일으켰다. 이것이 나를 향하는 간판이다. 이제 너희는 이러한 기적을 일으킨 나에게 마음을 드려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표적 자체에 마음을 드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부산 240km’라는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표지판을 따라 가면 부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표지판이 귀하고 신기해서 가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표지판을 가지려 했습니다. 홍해의 기적은 하나님을 향하라는 표지판입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 하나님께로 마음이 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갖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 속에 끼어들어 와서 역사하는 마귀의 집요함에 먹힌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291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태복음 158절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인들은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로 기다렸던 대상은 메시아가 아닌 메시아가 일으킬 기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로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은 내게서 멀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드러낸 영적 유전자는 1,500년이 지난 예수님 당시까지도 이어집니다. 이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홍해의 기적을 일으키는 큰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하리라 믿었습니다. 1,500년 전의 초강대국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듯이, 로마를 비롯한 모든 이방 나라를 굴복시켜서 이스라엘이 최고의 나라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사두개인,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은 믿음을 경쟁하고 자랑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최고로 잘 믿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자, 목사, 신부, 추기경, 총회장, 장로, 권사, 집사, 교인이라고 하지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상태를 뚫고 나가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 생활화뿐입니다. 십자가가 죄 사함의 사건이라는 교리를 알고 있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해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가 있다면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을 보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천하에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해주는 다른 이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믿음이 마음을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시며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을 후손들에게 주실 것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에 반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열을 내고 계셨던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살아 볼 수는 없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에 대해 당신이 계획하신 것을 이루시겠다고 열을 내실 정도로 이 세상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질 수 없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았고, 하나님께만 마음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또한 아브라함과 같은 태도를 보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큰 능력을 행하신 상황에서 이들이 보아야 할 것은 큰 능력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들이 보여야 할 믿음입니다. 큰 능력으로 이루어진 기적은 내가 바라봐야 할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시고 강하신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표지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합화나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시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보셨습니다. 심지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권세를 주셨기에 빌라도가 재판을 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빌라도를 하나님을 가리키는 사인이자 표지판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믿도록 하기 위한 사인이자 표지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불렀던 유대 종교인들과 똑같이 기독교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능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마귀에 의해 마음이 빗나간 상태입니다. 철로의 선로전환기를 당기면 기차의 노선이 바뀌는 것처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마음의 노선을 교정할 선로전환기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 마음을 빗나가도록 조종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마음이 정확하게 하나님께 적중하여 드려지도록 만들어 줍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뒷담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여기며 예배 중에도 뒷담화 식으로 설교하고 듣습니다. 영국의 소설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H. G. Wells)가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성공회의 대주교가 습관처럼 기도를 하는데 네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들어주겠다.’라는 하나님이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꿈을 꾸었나 싶어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기도를 하는데 또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물으니 그렇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대주교는 하나님이 정말로 계셨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식적인 믿음을 풍자한 단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있음을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드릴 진짜 대상임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마치 뒷담화를 하듯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여기는 설교를 하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없다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날마다 죄 사함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소리쳐도 전부 뒷담화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대상으로 바라보며 마음을 드리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귀의 전략에 넘어간 것입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하는 동안 뛰어난 신학자들의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지 마음을 드림이 없다면 뛰어난 글솜씨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 하나님을 대상으로 바라보며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면 전부 뒷담화에 불과합니다.

위대한 신학자나 높은 명성을 가진 목사라고 해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정해놓으시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마음을 드릴 수 없습니다. 거꾸로 보자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거절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진리로 붙잡았습니다. 날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이 얼마나 굉장한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 모릅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뼛속 깊이깊이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었더라, 믿는다, 믿고 있다. 이 간단한 말에 숨겨진 놀라운 은혜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게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기다리고 계심을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을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기적 같은 특권을 마음껏 반복하여 누리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