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출장안마,출장마사지,바나나출장안마이미지출장안마출장마사지

(S) 네가 목마르냐? 나도 목마르다!_태승철

by 태승철 · 25-01-13 05:53 · 7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네가 목마르냐? 나도 목마르다!>의 줄거리 :

마라의 쓴 물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라는 엘림의 오아시스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곳입니다. 이 짧은 구간을 버티지 못하고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던 이스라엘로서는 무색할 상황입니다. 마라의 쓴 물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본래 이스라엘의 식수 마련을 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마름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 알려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의 완악함에 대해 갖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속량하신 이스라엘이 그런 완악함에서 벗어났기를 바라시는 목마름이었습니다.

 

네가 목마르냐? 나도 목마르다!

 

(출애굽기 15:1~27)

 

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5.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우리가 읽은 1~5절에는 모세의 노래가 나오고, 6절부터는 홍해 승리의 현장 상황을 구체적으로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서 주변 민족들이 두려워하게 될 이스라엘의 탁월한 미래를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19~21절에는 미리암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요한 사막이 떠나가도록 우렁찬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절인 22절에 마라의 쓴물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27절에는 이스라엘이 엘림에 도착하여 장막을 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 중심으로 네가 목마르냐? 나도 목마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의 26절은 좀 생뚱맞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란 열 가지 재앙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바로를 대표로 하는 모든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완악함의 성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대상이기에 이스라엘도 완악함에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모든 규례를 지키면 완악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내리신 계명이나 규례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슨 계명이나 규례를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이 말씀의 의도는 완악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유일한 있음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만물은 여호와께서 있게 하심으로 있게 된 것들입니다. 이것은 우주 만물을 관통하고 있는 일정한 방향성입니다. 그런데 인간만은 예외입니다. 바로가 보여주듯이 인간은 마치 스스로 있는 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있게 하고,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은 없게 하려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 있는 자에 의해서 있게 된 우주적 방향성을 거스르는 완악함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모든 규례를 지키라는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되는 대로 그 흐름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말을 하고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악함을 벗어난 것이고 열 가지 재앙과 같은 질병이나 삶의 고충들도 내리시지 않으리라는 뜻입니다. 다소 뜬금없이 등장한 계명과 모든 규례에 대한 언급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완악함을 피할 수 있도록 계명과 모든 규례를 준수하라는 말씀은 마라의 쓴물 사건 이후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라의 쓴물 사건은 결국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바로의 완악함에 대해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재앙을 내리시지 않기 위해서는 완악함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방법을 계명과 모든 규례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되는 방향으로만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주체가 되어서 판단하고 생각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내 판단과 생각을 받아서, 있게 된 자로서의 방향으로만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라. 그러면 너희는 완악함으로부터 치유를 받게 된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렇기에 27절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말씀이 언급된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200만 이스라엘은 고요한 사막이 떠나갈 정도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특별히 여자들은 미리암을 따라 또 하나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홍해 도하 사건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잊지 못할 기적입니다. 이제 이들은 기적의 여운을 느끼며 시나이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진행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22~23절을 보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흘 동안 약 53km를 걸어 도착한 곳이 마라입니다. 보통 성인이 하루에 25km 이상 걸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자면 하루에 18km 정도를 걷는 것은 빠른 진행 속도는 아닙니다. 노약자와 가축들이 포함되었기에 이들의 진행 속도는 더뎠습니다. 그리고 마라를 떠난 이후에는 열두 샘과 칠십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오아시스인 엘림에 이르게 됩니다. 마라에서 엘림까지는 10km 정도의 가까운 거리입니다. 마라에서 반나절 정도만 더 걸으면 엘림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리를 염두에 두자면 하나님께서 굳이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실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반나절만 더 이동하면 예비하신 엘림에 도달할 수 있기에 쓴물이 단물이 되는 것은 꼭 필요한 조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양가죽으로 만든 물통을 썼습니다. 그런데 홍해로부터 사흘 길을 걸으며 물이 떨어졌습니다. 물이 떨어지고 사흘이 된 것이 아니라 사흘 길을 걷던 중에 물이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자면 반나절만 더 걸으면 10km 떨어진 엘림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리를 염두에 두셨다면 마라에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실 기적을 베푸실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인 여호와다. 내가 열 가지 재앙을 보였고, 또 홍해의 기적을 일으켰다. 지금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물을 줄 수 없어서 마라까지 오는 동안 물을 떨어지게 했겠느냐? 10km만 가면 너희를 위해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준비해 놓았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갈증으로 불평하기보다는 기대하며 엘림을 향해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열두 샘과 칠십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오아시스를 만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림을 준비하시고도 굳이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불평하는 이들의 목을 축이게 하십니다. 그리고 기껏 반나절 진행하여 엘림을 마주하게 하십니다. 이미 목을 축인 상태였기에 이들에게는 큰 감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감격의 정도는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하신 것일까요?

마라의 사건은 하나님의 목마름을 가르쳐주시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네가 목마르냐? 나도 목마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엘림에 도착하기 10km 지점에 마라의 쓴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목마름을 견디지 못해 불평하는 이스라엘에 자기들의 목마름을 느꼈다면 하나님의 목마름도 생각하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에 목말라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430년간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스라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의 기적을 보이심을 통해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애굽을 초토화하시며 해방하심을 통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해 사랑과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창조주이심을 보이셨습니다. 인간이 신에 대해 느낄 수 있는 모든 매력을 뽐내시며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좋아할 수밖에 없을 만큼 하나님이 매력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마음껏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의 반응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스스로를 영광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의 교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하심과 사랑하심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라에 도착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매력을 드러내시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홍해의 기적까지 경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노래와 미리암의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하나님이 목말라 기다리신 반응이 아닙니다.

모세의 노래가 유대인에게는 그 노래라는 이름으로 전승될 만큼 유명합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노래로 중요하게 여길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노래를 들으시면서 당신의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서 영광의 조명을 받고 있던 것은 이 땅에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자기들의 미래를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14~15절을 보면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노래에는 주변의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할 것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의해 모든 민족보다 탁월한 민족으로 등극할 것이라는 핑크빛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면서 당신의 매력을 뿜어내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능력에 의해서 탁월하게 이끌려질 자기들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목마름은 극심하게 가중됩니다. 그 증거는 마라의 사건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사흘 길을 걸으며 물이 떨어졌습니다. 물을 못 마신 것은 하루가 지났을지 반나절이 지났을지 사람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이들이 사막에 있음을 염두에 두자면 반나절만 물을 못 마셔도 심한 갈증에 시달렸으리라는 예상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고작 사흘 전에 전대미문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무후무하며 경천동지할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이시며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이러한 놀라운 기적을 보이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라는 것을 계속해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10km만 더 가면 기가 막히는 오아시스까지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완악함을 벗어난 믿음을 보이기를 원하시며 목말라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했다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한 적도 없는데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을 일으키셨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시고 우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심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이 있어야 함도 아실 것이다. 비록 당장 목이 마르지만 우리는 스스로 있게 하려 하고, 스스로 없게 하려는 완악함의 기질을 보여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로부터 만물이 있게 되는 방향을 따라야 한다. 지금도 여호와가 함께 계심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알려주고 있다. 우리에게 당장 마실 물은 없지만 우리 마음이 마실 하나님은 있다. 하나님을 마시는 기쁨으로 이 갈증을 이겨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갈증을 아시니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지금 물을 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이 완악함을 벗어나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로부터 있게 되는 방향을 따르며 육체의 목마름 상태를 뛰어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 이 세상의 누구도 볼 수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미증유의 기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이신 지 불과 사흘이 지났을 뿐입니다. 이 모든 기적을 본 200만 이스라엘은 사막이 떠나가라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입으로 사흘 만에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반나절만 가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오아시스를 만날 것인데 하나님을 원망과 불평으로 상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드러낸 열 가지 완악함에 상응하여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에도 바로의 완악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을 추격했으나 끝내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홍해 도하 사건도 완악함과 연결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바로처럼 스스로 있게 하고, 스스로 없게 하려는 완악함을 벗어났음을 보여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스스로 있게 하고, 스스로 없게 하려는 기질을 보이며 내가 목마르니 지금 당장 물을 있게 하라!’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보이는 모습입니다. ‘지금 내가 아프니 건강이 있게 하라! 지금 내가 돈이 없으니 돈이 있게 하라! 지금 승진이 필요하니 승진이 있게 하라!’라고 요구합니다. 내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음을 문제시하며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이것이 완악함입니다.

바로의 완악함 때문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했습니다. 마라의 사건은 이스라엘 또한 바로와 똑같은 완악함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부탁하듯이 요청하십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 대해 갈증을 느낄 때, 그러한 너희를 보고 있는 나의 목마름을 생각하라. 이 세상 것을 향하여 왜 목마름을 느끼느냐? 나를 너희의 생수로 허락했다. 그런데 너희는 왜 나로 마음의 목마름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 것을 찾느냐? 네가 이 세상 것에 대해 목마름을 느낀다면 그러한 너를 보는 나의 목마름을 먼저 기억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것이 마라의 쓴물 사건이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계명과 모든 규례에 대한 요청이 등장합니다.

 

온 지구 위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목마름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 주신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것입니다. 바로의 완악함 속에 놓여있고 당신 자신을 매력덩어리로 드러내 보여주지 않은 사람에게는 목마름을 갖지 않으십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본 아브라함은 마음의 일등 자리에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해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마음에서 제거합니다. 아내 사라를 마음에서 제거합니다. 자기 인생의 미래를 마음에서 제거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모든 것을 마음에서 제거합니다.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도 마음에서 제거합니다. 최종적으로는 독자 이삭까지 마음에서 제거합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유일한 옹달샘이었습니다.

이제는 200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옹달샘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도록 마음껏 매력을 뿜어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보이시지도 않았던 놀라운 기적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매력을 뿜어내셨으니 이제 이스라엘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200만 이스라엘 중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줄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을 하나님으로 축이면서 고작 반나절 육체의 목마름을 견디며 엘림에 도착할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 사건은 이러한 하나님의 목마름을 드러내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통해 당신의 매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기적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드러내시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렇기에 선민이 좋음으로 여겨야 할 대상은 기적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선민은 기적을 좋아합니다. 그 결과가 마라의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음이 완악함입니다. 육체의 목이 마르자 그 완악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지금 내가 목이 마르니까 물을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완악함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능력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을 부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물을 마시려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때에 물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트집을 잡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목마름을 해결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목마름을 가르쳐주십니다. ‘얘들아,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기억하지? 그것은 바로의 완악함 때문에 내려진 재앙이다. 그런데 너희도 마찬가지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되는 대로만 살라는 뜻입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말과 행동을 한다면, 너희의 마음과 삶 전체를 치료하시리라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쓴물에 던지게 하셔서 단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쓴물 상태에서 단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본래 마라의 쓴물은 이스라엘이 마실 물로 준비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마실 물은 엘림에 있습니다. 마라의 쓴물은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기 위한 소재입니다. 육체의 목마름을 느낄 때 하나님의 목마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마르십니다. 나를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나를 들여놓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쓴물에서 단물로 변하기를 바라십니다. 완악한 쓴물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마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가리키십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등장합니다.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떨기나무, 모세가 손에 든 하나님의 지팡이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나무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된 유명한 나무들은 다 의미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쓴물처럼 마실 수 없는 선민의 완악함을 단물로 바꾸는 나무는 십자가 나무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만 이 세상을 향한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 있게 하고 없게 하려는 완악함은 죽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대로만 살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나무를 통해 스스로 있게 하고 없게 하려는 완악함의 쓴물은 하나님께서 달고 시원하게 느끼시는 단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과 뜻으로만 있게 되는 삶을 사는 선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목마르게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십자가 나무를 붙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내려다보실 때 아무도 있게 되는 방향을 따라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만이라도 가정에서, 나만이라도 직장에서, 나만이라도 지금 타고 있는 전철에서, 완악함이 제거되어 있게 되는 방향을 따라 사는 시원한 단물이 되어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십자가 생활화의 한 요령을 가르쳐주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 목마름을 느낄 때마다 나를 향해 목마름을 느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 느끼는 나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것은 완악함입니다. 그것은 반나절만 걸으면 해결되도록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강하게 목마름을 느끼는 순간에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시고 하나님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소원하는 이유는 마음이 목마르고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한 목마름과 굶주림은 반나절만 지나면 해결되도록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지금 그것을 있게 하려는 완악함을 보이는 대신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밀착하여 하나님으로 흘러나오는 뜻대로 살려고 하는 고백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바람이 생깁니다. 마음에 목마름과 굶주림이 생깁니다. 본문은 그 목마름과 굶주림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을 향해 목마름을 느낄 때 불과 반나절 거리에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엘림이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대신에 우리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좋으심을 마음으로 마음껏 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세상 것이 없어 불편하고 모자라는 것을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대체하면서 엘림의 10km 구간을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걱정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10km 뒤에는 엘림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갈증이 느껴질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게 하시고, 나의 옹달샘 되시고 내 마음의 엘림이신 천국의 아버지를 향하여 날마다 올라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 마음은 아버지로 충만하게 되고 갈증이 해결됨으로써, 아버지 또한 나를 보시며 목마름을 해결하시는 기쁨의 역사가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