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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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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하나님 보려면 가만히 있기_태승철

by 태승철 · 25-01-09 08:36 · 97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에서 하나님 보려면 가만히 있기>의 줄거리 :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 말고 혹시 삶의 현장에서 아예 하나님 자신이 움직이시는 일은 없을까요? 왜 없겠습니까. 우리는 내 삶의 현장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변이 아무리 급박하게 요동치더라도 내 몸과 내 마음이 가만히 있을 수 있다면 삶의 현장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째야 우리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삶에서 하나님 보려면 가만히 있기

 

(출애굽기 14:1~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 직후 바로는 다시 마음을 완악하게 먹습니다. 애굽 경내를 빠져나간 이스라엘을 추격하여 포로로 잡거나 멸절시키려 군대를 동원하여 진격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앞에 두고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 중심으로 삶에서 하나님 보려면 가만히 있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앞서 본대로 선민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마주 보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가 되시는 상태이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수 없기에 건성건성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건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납득하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인도하심의 특징은 우리가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로 나가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내가 하늘을 향하여 주체적인 총력을 다 쏟아부을 때 이 세상에 대한 태도는 건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건성으로 행동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아예 행동을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중에 내가 건성으로라도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예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하나님 자신이 내 삶에서 움직이시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만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움직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가만히 서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가만히 있기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마음에서 첫 번째로 모시는 일을 주 업무로 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은 두 개의 내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르는 것으로써 이 세상에 대해서는 건성이지만 하나님의 치밀한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나는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시고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치밀한 인도하심을 따라 나는 건성으로 행동함으로써 내 삶의 내용을 채우고, 또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시면서 내 삶의 내용을 채우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움직이실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 시선을 의식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움직이시고자 하실 때는 내가 보조를 맞출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보조를 맞추는 방식이 가만히 있기입니다.

 

본문 13~14절을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의도를 갖고 활동하시는 것을 가만히 서서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은 필요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가만히 있음으로써 하나님이 전적으로 움직이려고 하실 때 보조를 맞출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가만히 있지 못하면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서서 하시려는 계획을 수행하실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기는 단순히 겉으로 몸만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며 요동칠 때, 내 마음은 그것에 반응해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내 몸도 움직일 일이 없습니다. 가만히 있기를 할 수만 있으면 내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가만히 있기를 해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기가 하나님의 보조 맞추기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움직인다면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움직이시려는 순간에 멈칫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내 겉과 속이 모두 가만히 있을 수 있다면 내 삶의 현장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몸은 잠깐이나마 움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속까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속은 언제나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을 요청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속을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것이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몸도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은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데 어떻게 속을 시끄럽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셨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가만히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미력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고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내가 움직여서 피해야 한다. 방법만 알면 피할 수 있다.’라고 여기는 중에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전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면 두려움조차 없어집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기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이 아무것도 없는 전적으로 고갈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을 때 마음에서 두려움조차 없어지고 삶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되는 상황을 만드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되는 상황을 만드십니다. 우리는 두 상황의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재판에서는 두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그것을 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두 경우를 대비시키며 가만히 있어서 하나님을 보는 상황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가만히 있기에 무엇이 필요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4절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라는 부분이 참 특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초토화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애굽에 내리실 때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것은 바로만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하들과 관리들도 다 들었기에 애굽 전역에 하나님에 대한 소문이 났을 것이고, 애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애굽 사람들은 열 가지 재앙을 받으며 그동안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본 것은 이러한 재앙을 가져오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애굽 사람들은 소중한 것들이 없어지는 상황만을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러한 재앙을 내리신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았겠지만 마음에서는 전혀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장자를 잃고, 물과 식량을 잃으며 소중한 것들이 없어지는 상황만을 보고 있었을 뿐이지, 그 재앙을 내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이유를 그들의 군대에서 발견하십니다.

열 가지 재앙이 임해 온 나라가 초토화 된 가운데서도 아직 건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군사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애굽의 군대에는 손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로부터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객관적 대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열 가지 재앙이 진행되는 중에 애굽 사람들의 마음에서 객관적 대상으로 보았던 것은 소중한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군대까지 없어지고 나서야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객관적 대상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아직도 자기들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가만히 있기를 할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도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애굽 군대는 홍해를 건너려고 하다 물에 빠져 몰살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 뒤에 애굽 사람들은 적어도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는 자기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는 힘이 없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고 나서야 이스라엘을 위하여 애굽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움직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군사력을 이유로 스스로 꿈틀거릴 수 있다고 믿는 동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군사력까지 완전히 제거되자 비로소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뼛속까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이 객관적인 대상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이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상황은 다르지만, 이스라엘에도 똑같은 일이 요청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샌드위치 위기의 상황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라고 불평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애굽 사람만 하나님을 못 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났지만, 이스라엘 또한 객관적으로 하나님을 못 본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열 가지 재앙이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가는 상황만을 보았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열 가지 재앙으로부터 소중한 것들이 온전히 보호받는 상황만을 보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재앙으로 소중한 것들을 잃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소중한 것들이 지켜지는 상황을 기뻐하고, 즐기고, 누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것은 정반대의 감정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못 보는 것은 똑같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라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죽을 바에는 차라리 노예 생활을 하다 죽는 것이 나았으리라 원망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역사하셨음을 완전히 망각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샌드위치 위기 상황에서 자기들의 힘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깨닫고 뼛속까지 통감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능력 있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떤 능력도 홍해 앞에서는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노예 생활만 하던 오합지졸이었고 어린이와 노인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애굽 군대가 분기탱천하여 달려오는데 이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다를 접한 사막은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싸울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을 요청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므로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보고 있는 상황이 삶의 절반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서 건성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가만히 있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가만히 있음이란 단순히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움직이지 않더라도 속으로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계획을 짜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내가 이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를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정말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아버지가 보입니다. 우리의 속이 시끄러운 이유는 내가 아직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상황에 대해 내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아직도 나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태도를 완악함으로 보고 문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로 인해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을 하실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가 깨져야만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도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을 때 주어진 상황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내가 건성으로 대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생각을 떠올리게 하시고 길을 열어주셔서 움직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건성으로라도 움직일 생각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가만히 있을 뿐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직접 움직이시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내용으로 삶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두 사이에 낀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서도 이 상태가 생활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스스로 움직이셔서 이루시려는 계획을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기의 생활화가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출애굽을 통해 교회가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홍해와 애굽 군대는 처음으로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선민이자 교인들에게 이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제로 상태입니다. 대처 능력이 완전히 제로 상태가 되자 하나님이 전적으로 움직이시는 거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선민은 생활 속에서 홍해 앞에서의 가만히 있기를 생활화하는 자들이며,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따름을 생활화하는 자들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왔더니 홍해에 도착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위해 끌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움직이시려는 상황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선민의 삶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상태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삶은 건성으로 살며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삶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움직이시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다 또 삶에서 건성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하시고,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으시기를 반복하십니다. 그러는 동안 마음은 오로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 총력을 기울이고, 땅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두 가지 패턴으로 선민의 삶의 내용을 채워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상태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해 생각의 기능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손과 발이 못 박히신 것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손댈 수 없고, 발을 움직여 방향을 잡고 일을 진전시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옆구리 즉 배를 창에 찔리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소원조차 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살갗이 채찍에 맞아 다 찢어지신 것은 모든 감각이 다 죽어서 세상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머리가 죽고, 손과 발이 죽고, 배의 소원이 죽고, 모든 감각이 다 죽는 상태가 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나를 대입하고 나와 동일시하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이란 홍해와 애굽 군대 사이에 끼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계속해서 만드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세상 삶을 향한 우리의 힘을 완전히 빼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급박하고 요동칠지라도 마음에서 십자가를 뚜렷하게 바라봄을 통해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상태를 만듭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을 뿐이다.’라고 여기며, 속된 말로 될 대로 되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 자발적이기에 가만히 있게 됩니다. 타의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가만히 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못 박혔기에 가만히 있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기를 하면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 돈이 무척 안 벌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다가는 거덜 나겠다.’라는 생각이 들고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께 나를 대입합니다. 가시 면류관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적용해 나갑니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힌 상태를 재현하며 가만히 있는 동안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업이 안 될 때 내가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사업을 잘 되게 해주시겠지.’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완전히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홍해 건너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심을 통해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만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의 체질을 버리지 못하여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지 못합니다. 이들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세상 쪽으로 되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직전에 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될 대로 되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이 움직이시기 시작하셨고 이들은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죄의 체질로 인해 하나님을 보려 하다가도 결국 육체의 눈에 보이는 세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서도 발생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가만히 있는 상태를 만들었는데, 죄악의 습관은 가만히 있는 동안에도 자꾸 이 세상의 삶을 향하고자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듯이 세상 삶의 상황이 뚫리고 극복되고 해결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볼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 동안 세상일이 해결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기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세상의 관점에서 망하는 쪽으로 흘러가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나가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내 삶이 뚫리고 형통하게 되는 것을 바란다면 하나님은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마음이 하나님 쪽으로 가다가 세상으로 돌이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가만히 있지 못한 채 삶을 향하는 동안 문제의 해결을 소망하고 바라게 됩니다.

가만히 있기란 이 세상의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원하는 형통의 방향으로 나가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형통을 위해 써먹는 것은 가만히 있음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기란 내 삶의 방향이 어떻게 되더라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삶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문제를 잘 해결해 주실 것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세상에서 망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면 할 수 없다고 여길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될 대로 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대로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대로 될 것이라고 여길 때 두려움은 없어집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악의 체질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세상으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형통하게 해주실 것이다.’라고 기대하는 것은 죄악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결국 십자가에서 죽는 것도 내 형통을 위해 애쓰는 한 방식이 되어버립니다.

 

가만히 있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될 대로 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고 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과 형통의 기준을 따라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을 바란다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동원하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가만히 있기의 포인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끝났기 때문에 나의 상황이 어떤 모양과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될 대로 되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여길 때 가만히 있기는 이루어집니다. 그 상황이 세상의 관점에서 잘 되든 안 되든 나는 하나님을 보겠다고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하여 세상을 사는 것이지, 세상에서 형통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작게라도 올바른 가만히 있기의 경험을 하다 보면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제 경험입니다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나쁘다고 여기는 일일지라도 다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 열 번 중에 단 한 번도 나쁘게 인도하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백 번을 세상에서 보기에 좋게 인도하셨어도, 백한 번째는 세상에서 볼 때 안 좋게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를 따라 될 대로 될 뿐입니다. 세상 기준에서 나쁘게 되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으므로 가만히 있을 수 있고 두려움조차 없어집니다.

가만히 있기는 우리가 꼭 해내야 할 십자가를 붙잡는 방식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되 어떤 방식으로 붙잡는지가 중요합니다. 가만히 있기를 하면서 붙잡고, 하나님의 뜻대로 될 대로 되라는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좇으며 세상의 삶은 건성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십자가 붙잡고 가만히 있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될 대로 되라는 선언을 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올 한해는 하나님이 직접 이루시는 내용들로 온전히 채워지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