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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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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가짜 가리는 가나안 정탐 효과_태승철

by 태승철 · 25-09-06 06:52 · 547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짜 가짜 가리는 가나안 정탐 효과>의 줄거리 :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탐한 결과 출애굽 1세대의 장정 60만 명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가 다 광야에서 죽습니다. 이처럼 정탐을 해보면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진짜와 열 명의 정탐꾼과 그들을 따르는 599,998명 같은 가짜가 가려집니다. 이것이 가나안 정탐 효과입니다. 우리도 실제 우리의 가나안을 정탐했나요? 그랬다면 그 결과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왔나요? 아니면 아직도 진입을 못 했나요? 이제 우리도 우리의 가나안 정탐을 마친 상태에서, 내가 진짠지 가짠지 결판을 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진짜 가짜 가리는 가나안 정탐 효과

 

(민수기 13:1~33)

 

25.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26.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본문에는 가나안 정탐 후 보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진짜 가짜 가리는 가나안 정탐 효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함으로써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결과적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탐한 결과 출애굽 1세대인 장정 60만 명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가 다 광야에서 죽습니다. 이처럼 정탐을 해보면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진짜와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과 599998명과 같은 가짜가 가려집니다. 이것이 가나안 정탐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우리의 가나안을 실제로 정탐한 결과 이미 가나안에 들어왔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진입하지 못했습니까? 이제 우리도 가나안 정탐을 마친 상태에서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결판을 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가나안 복지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요? 가나안은 단순히 건강이나 재정을 비롯한 삶의 모든 상황이 잘 이루어져서 아무 걱정이 없는 상태나 여기에 보태어 자연환경과 기후조건조차도 잘 제공되는 상태에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흔히 오해하듯이 가나안은 천국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이 있지만 우리가 정탐해야 할 가나안은 죽은 다음에나 가는 천국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가나안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어지는 상황입니다. 쉽게 말해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입니다.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의 상태가 바로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서 사는 상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달리 표현하여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정리하자면 가나안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써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절대라는 말이 붙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족과 평강과 감사는 결국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은 밀착한 대상을 통해 만족과 평강과 감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나안을 상징하는 절대라는 말이 붙는 만족은 육체적 만족이 아니고 환경적 만족이 아닙니다. 평강 또한 육체적 평강이 아니고 환경적 평강이 아니며, 감사도 육체적 감사가 아니고 환경적 감사가 아닙니다. 육체와 환경에는 난리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서는 절대 만족하고, 절대 평강하고, 절대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복지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 가나안의 상황을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날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여 천국 일일생활권의 삶을 사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했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면서 생기는 일이 바로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있고 이 땅에 남아 있는 몸에는 하나님의 마음이신 성령님이 내 몸을 장갑으로 끼시고 살아가십니다. 또한 나의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는 삶의 상황들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다 채워 나가십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기 때문에 절대 만족과 절대 평강과 절대 감사가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가나안이란 십자가 생활화의 가장 이상적 상태를 말합니다. 또 천국 일일생활권의 가장 완벽한 형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가나안 땅을 정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때 진짜와 가짜는 가려집니다. 출애굽 1세대 중에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 열 명의 정탐꾼의 말을 들었던 모든 20세 이상 성인은 한 명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맙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인구는 장정만 60만이었기에 총인구는 200만 이상을 헤아립니다. 이처럼 200만 중에 단 2명이 진짜 선민으로 판가름 났고 나머지는 가짜로 드러난 사건이 가나안 정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탐 효과는 우리 삶에서도 나타나야만 합니다.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정탐의 단계를 거칠 때 알게 됩니다. 정탐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단계는 긍정과 동의이고, 두 번째 단계는 갈라짐이고, 세 번째 단계는 거부입니다. 먼저 첫 번째 단계인 긍정과 동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과일을 제시하며 모세의 말대로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임을 긍정하고 동의합니다.

이 상황을 우리에게도 적용해 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에서는 여러분의 이론적 생각 앞에 날마다 가나안을 펼쳐 보입니다. 이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두루 살피는 것과 같이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인정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결국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로 여러분을 이끌어가기 위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말씀을 듣는 것은 이론적으로 제시되는 내용에 대해 긍정하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란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내가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연합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내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서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내 몸은 성령님이 오셔서 장갑으로 끼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결과적으로 하늘과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는 사위일체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 증거가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어느 것 하나 틀린 점이 없다고 긍정하고 동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두 번째 단계에서 생깁니다. 정탐의 두 번째 단계는 갈라짐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의 의견은 둘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진짜와 가짜가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정탐 효과입니다. 28~29절을 보면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본 가나안 땅은 이미 원주민들로 가득했습니다.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아말렉 사람들은 남방 땅에 거주했으며, 헷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아모리 사람은 산지에 거주했고, 가나안 사람은 해변과 요단강 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우리가 들어가서 차지할 여분의 땅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견이 갈립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올라가 싸울 것을 제안하나 열 명의 정탐꾼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31~33절을 보면 열 명의 정탐꾼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들은 오합지졸이지만 저들은 강하고 철기 문화를 보유하고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는 언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가나안 땅에는 우리가 설 자리가 없다. 가나안 복지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정탐 단계를 우리에게 적용해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면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가 주어질 것임을 이론적으로는 압니다. 또한 이것이 내 육체적 상황과 환경적 조건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임도 인정합니다. 젖과 꿀로 비유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상적인 상태를 말할 뿐이지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 삶의 영역에는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 거인들이 곳곳에 숨어서 방해를 한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는 철기 문화를 보유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한 강성한 가나안 족속들과 같은 문제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라고 여깁니다.

예를 들어 갑작스럽게 발생한 돈 문제는 육체적이고 환경적인 상황에서 아낙 자손 거인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밥도 못 먹게 생겼는데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는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열 명 정탐꾼의 생각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들은 현실을 볼 것을 주장합니다. 삶의 현장을 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육체에 걸린 병을 봐라, 환경적 상황을 봐라, 전부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 거인들이 철기 문화를 갖추고 국가 체제를 정비한 무서운 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를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들도 이론적으로는 인정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 안에 들어가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성령님이 내 몸을 장갑으로 끼시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삶을 살게 되면 절대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이것을 이론으로만 여기며 현실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육체적 환경적 문제는 아낙 자손 거인들이고, 헷 족속이나 여부스 족속이나 아모리 족속과 같은 강대한 족속들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이기고 절대 만족할 수도 없고, 절대 평강할 수도 없으며, 절대 감사할 수도 없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듯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을 완전히 포기하고 마음을 땅에 붙인 채 주어지는 만족을 추구합니다. 평강이 아닌 마음이 땅에 붙어있는 안정을 원합니다. 마음이 땅에 붙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감사를 추구합니다. 이들은 가짜입니다.

 

이로부터 세 번째 단계로 거부가 나타납니다. 못 먹는 호박 찔러나 보자는 심보로 가나안 땅을 헐뜯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 나타나는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라는 것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론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면서 천국 일일생활권을 산다는 것은 말이 좋아 십자가 복음이지, 몸으로 만나는 육체적 환경적 상황을 외면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눈 감은 무책임한 짓이라고 헐뜯고 비방하고 격하하고 끝내버립니다.

그렇다면 왜 열 명의 정탐꾼은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것일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정탐을 듣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가나안을 포기해 버립니다. 우리로 말하면 결국은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를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실감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진짜와 가짜가 가려지는 핵심 조건은 실감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실감이 세상 실감에 부서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는 옳았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의 보고가 정직하고 올바른 정탐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이고 가나안에는 거인족이 있으며 다른 족속들도 이미 국가 체제를 완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탐 평가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선민을 보고 계시고, 선민의 상황을 알고 계시며, 미리 당신이 계획하신 대로 사랑과 주권으로 이끌어가시고자 하십니다. 이들의 정탐 보고에는 이러한 하나님이 계산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상황을 보면서 계산하는데, 왜 하나님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들에게는 하나님 실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짜와 가짜가 가려지는 것은 사활이 달린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실감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 마음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실감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실감을 이기느냐 못 이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가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그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실감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실감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믿음은 실감입니다. 다만 이 실감이란 육체의 오감으로 세상에 대해 갖는 실감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갖는 실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오감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감으로 포착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실감이 오감으로 포착되는 세상 실감보다 크지 않으면 가나안 복지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따르며 우리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말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마음에서 하나님의 실감을 키우자. 가나안 족속과 싸워 이기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반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실감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실감이 보이는 세상에 대한 오감의 실감을 이기도록 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몰랐고 어떤 자들은 알면서도 싫어했습니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세상에 대한 실감이 너무 좋았기에 굳이 믿음으로 싸움을 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실감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고 가나안 땅과의 관계는 완전히 끝나버립니다.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에 대한 사실 실감이, 오감으로 얻은 세상에 대한 사실 실감을 넘어설 때 가나안 복지는 주어집니다. 사실 실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일 뿐이지 엄연한 사실로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사실입니다. 나를 보고 계신 것이 사실입니다. 내 사정을 알고 계신 것이 사실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권적으로 나를 이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눈으로 보고 귀에 들리는 것만 실감하고자 합니다.

이론적 문제를 한번 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홍해의 하나님과 거인족을 포함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 중 누가 더 강할까요? 이스라엘 200만 명 중에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사람 중에 이 문제를 틀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이 아무리 강해도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나의 아버지이시다.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면서 내 모든 삶의 마지막 날까지 다 계획하시고 나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치고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실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돈 문제 앞에서 하나님이 절대 만족을 주실 수 있고, 절대 평강을 주실 수 있고, 절대 감사를 주실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육체적 환경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이론은 알지만 실감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실감하기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세상에 붙여버립니다. 이제 절대 만족 대신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결핍에 시달립니다. 절대 평강 대신에 늘 불안과 초조함으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절대 감사 대신에 원망과 불평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실감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의 목적은 세상에서 육체적 환경적 변화를 추구하여 삶의 조건을 최적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마음 안에서 실감의 싸움입니다. 믿음을 통한 하나님 사실에 대한 실감이 육체의 오감을 통한 세상 사실들에 대한 실감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 싸움을 하지 않고 포기해 버립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 실감을 세상 실감보다 키워나가는 선민과 교인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는 들어와 있지만 마음에서 하나님 실감이 세상 실감을 이기기 위한 싸움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왜 믿음의 싸움을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이유가 있습니다.

메일로 받은 질문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산통과 같은 통증이 기약도 없이 이어져 나가기에 어마어마한 마약 성분의 약을 투여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가 없는 병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오래전에 아이를 잃어버려서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분이 있습니다. 차라리 죽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마음이 정리될 수도 있을 텐데,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볼 수 없는 마음에 스트레스와 고통은 날로 더해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아이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두 경우 모두 얼마나 고통스러우실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다만 십자가 복음은 세상 것을 구하지 말라는 율법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주권자이시고, 사랑이신 것이 이론적으로 맞는다고 대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나름의 고통을 67년 동안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고통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나 아이를 잃은 고통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보자면 자기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크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관적으로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주어질 때 감사하지 않으면 나는 가짜다.’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주어져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거부할 수 없는 사건으로 증명되었듯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이끌어 가시는 중이십니다. 저는 이 사실을 너무 아파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바닥을 구르는 상황에서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아픔을 겪는 가운데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서 할 수 있는 간구의 총량은 이미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시는 사랑의 총량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다에 한 컵의 물을 보태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이 사실이라는 것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나를 사랑함이 보태질 수 있을까? 보태면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보태면 티가 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겪는 고통 중에도 하나님이 이미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거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차마 이 고통에서 나를 구해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 환경적 차원의 어려움의 해결을 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육체적 환경적 차원의 모든 조건은 이미 하나님과 관련된 사실 속에서 파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이고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 것을 향해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는 기도가 안 나오더라는 이야기이지, 그저 하지 말라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까? 그럼 구하세요. 다만 구하시면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사탄의 가시라고 부를 정도로 고통스러운 지병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지만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를 했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사자 밥이 되어 죽는 순간에도 하늘의 평강을 드러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러한 실감입니다. 가나안 칠족과 아말렉과 아낙 자손 거인들보다도 더 강한 상황이 육체와 환경에 밀려 들어오더라도 하나님이 더 크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라도 우리는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로 진입해 들어가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 힘들고 아이를 잃어버린 상황이 괴롭습니다. 잃어버린 아이도 내 손에 없을 뿐이지 그 아이에게도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고 있음을 실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나 대신 이끌어 가신다면 오히려 내 밑에 있는 것보다 더 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면 안 됩니다. 또한 육체적 고통을 주신 것에는 뜻이 있고 그 뜻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처절하게 외쳐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실감이 이 아픔의 실감을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루기 위하여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라는 아낙 자손 거인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로 주셨사오니, 이 육체적 문제의 실감보다 하나님의 실감이 더 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싸움을 포기하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열 명의 정탐꾼을 뒤따르는 가짜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관적으로 이럴 수는 없다.’라는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어려움과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실감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무기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런 어려운 고통 가운데 있는 저에게도 약속해 주신 가나안이 있습니다. 그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더 실감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실감이 지금 육체와 환경적 실감을 뛰어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을 이어가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의 가나안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열 명의 정탐꾼을 따르지 않게 하여 주시고, 여호수아와 갈렙 처럼 하나님 실감을 키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어떠한 육체적 환경적 아낙 자손의 거인들이 들이닥치더라도 그들을 무찌를 수 있을 만큼 하나님 실감이 강력해지기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