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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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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는 대신 침뱉으시는 때_태승철

by 태승철 · 25-09-04 07:12 · 624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말씀하시는 대신 침뱉으시는 때>의 줄거리 :

왜 쉬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나를 향해 쉬지 않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이란 이러한 하나님을 내 의식이 쉬지 않고 마주함이며, 그럼으로써 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임입니다. 이런 마주함과 수용함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유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온유함과는 달리, 하나님을 등진 채, 하나님의 말씀을 모조리 땅에 떨구면서 항상 자기가 스스로 생각한 것만을 말하는 강퍅함을 유지할 때. 하나님은 계속 땅에 떨어지게 되는 말씀을 계속하시는 대신에 침을 뱉으십니다. 가증하게 여기셔서 관계를 끊어내시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대신 침뱉으시는 때

 

(민수기 12:1~16)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버지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이레 동안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말씀하시는 대신 침 뱉으시는 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신에 침을 뱉으시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제목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 질문을 해봅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나를 향해 쉬지 않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함이란 이러한 하나님을 내 의식이 쉬지 않고 마주함이며 그럼으로써 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주함과 수용함이 바로 성경에서 반복되어 언급되는 온유함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온유함의 반대는 어떤 상태일까요? 하나님을 등진 채 하나님의 말씀을 모조리 땅에 떨구면서 자기가 생각한 것만을 말하기에 급급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면 하나님은 계속 땅에 떨어지는 말씀을 지속하시는 대신에 침을 뱉으십니다. 침을 뱉음이란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계속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을 말하기에 급급한 상태는 하나님께 있어서 가장 가증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모세가 구스 여자와 재혼하게 된 사실에 대해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비방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두 사람의 비방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진격해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족속의 여자를 아내로 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자기의 신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도록 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가 지금의 에티오피아인 구스 출신 여자와 재혼을 했기에 비방했던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이 기록된 2절을 보면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것을 알면서도 흑인 여자와 재혼을 했다. 이러한 수준의 모세가 하나님과 마주하여 말씀을 한다면 우리도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러한 비방 앞에서 한 마디도 자기변호나 자기방어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을 나병에 들게 하실 정도로 모세의 편을 드십니다. 이것을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이 하나님 마음에는 하나도 걸리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아내 십보라가 죽은 뒤에 구스 여자와 재혼합니다. 구스 여자가 흑인이다보니 너무 눈에 띄어서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했다고 추측됩니다. 다만 이러한 비방의 근본 원인은 흑인 여자와의 결혼에 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모세에게만 국한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김에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는 표현에는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대한 비방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한 근본적 동기입니다. 이러한 불만이 흑인 여자와의 재혼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늘 하나님과 마주하며 말씀 듣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랐는지부터 물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당신에게 늘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스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시더이까?’라고 비아냥거릴지라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비방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던 시절에 가장 마음이 답답하고 어려웠을 때는 목회에 대한 정책을 이야기하면 장로님들이나 교인들이 그것을 단순히 저만의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목사가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목회를 하려고 해도 그 정책이 잘못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목사가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근거로 삼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는 우리의 전통적이고 습관적인 지식을 따라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정할지라도 교인들은 목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예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나중에 그 이유를 생각해 봤더니 본인들이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기에 목사가 하나님과 교통함에 대해서 모른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수용하는 온유함으로 하나님을 대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마주하여 수용하는 온유함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도를 내 생각을 하나님께 강요하고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마주하고 수용하는 온유함이 바탕이 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등을 돌린다면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 모든 말씀은 땅에 떨어지고 수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온유함의 예를 살펴봅니다. 우리는 흔히 온유함을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인격적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 언성을 높이셨고, 대제사장들을 향해서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극단적인 모욕을 하셨습니다. 또한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뒤엎으시는데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권세자 대제사장 눈앞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과 행동을 하신 이유는 온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이란 하나님을 항상 마주함이며 하나님 말씀을 항상 수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마주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시는 온유함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게 온유함으로 받아들이신 내용 가운데는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지적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대제사장이 창녀들보다 천국에 늦게 들어가리라 모욕하라는 지시도 있었으며,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라는 말씀도 들어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바리새인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듣고도 인간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품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온유가 아닌 하나님께 강퍅한 마음을 품은 것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라고 말씀을 하셨음에도 예수님이 배려심과 따뜻한 마음으로 대제사장과 장사꾼들을 대하시느라 채찍을 들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온유가 아닌 하나님에 대해 강퍅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함이란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수용함입니다. 이러한 온유함은 사람들이 볼 때 너무나 거칠고 너무나 광폭하게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모세의 경우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모세에 대한 비방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한 것도 맞는 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모세와 차이점이 있다면 온유함의 여부입니다. 만약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처럼 늘 하나님을 마주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수용하였다면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모세를 향하여 비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향해 항상 쉬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 항상 말씀하셨어도 등을 돌린 채 말씀을 온전히 들으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이 모세처럼 하나님과 마주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수용하고 있었다면 모세를 비방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항상 하나님을 마주하며 모든 말씀을 수용하는 인물이었다면, 구스 여자와의 결혼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와는 달리 하나님께 등을 돌린 채였고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온유함과 대비되는 강퍅함입니다. 강퍅함의 원인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합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들에 반응하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떠오르는 자기의 생각을 따라 말하기에 바쁩니다.

 

본문의 주제는 온유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재혼을 비방한 사건을 통해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이때는 가나안 진군을 향한 초기로써 이스라엘의 통솔이 문제가 되던 시기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200만 이스라엘을 모세의 온유함을 통해서 통솔해 나가심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인간적인 상식과 지식과 기준에 근거해 볼 때는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했기 때문에 그러한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광야 생활 자체가 모든 사람이 반대할 일이었습니다. 광야 한가운데서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천막을 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온유했기 때문에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머물러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반면 지식과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일 년 동안 광야에 머물러야 하느냐? 진즉 떠났다면 가나안 땅에 도착하고도 남았겠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등진 강퍅함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할 때 자기방어나 자기변호를 위한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항상 하나님을 마주하며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 이유는 마주하고 있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이 참새 한 마리에까지 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람들이 비방하는 말조차도 어쨌든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신 상황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주하는 사람의 온유함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자기 신변에 나타나는 모든 크고 작은 일과 문제와 상황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수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비방하도록 허용하셨다면, 나를 방어하고 변호하기 위해 변명하려는 태도를 보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보인 온유함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을 나병에 걸리게 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으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과 미리암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중재를 섭니다. 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버지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이레 동안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침을 뱉으셨고, 그것이 나병으로 나타났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현대에 나병은 피부병에 불과하기에 나병에 걸렸더라도 본문이 말씀하시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시의 상황은 다릅니다. 나병은 불치병이자 하늘이 내린 형벌로써 하나님과의 끊어짐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나병에 걸린 자들은 하나님과 끊어졌다고 여겨져 진영 바깥으로 축출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병이라는 현상을 침을 뱉으신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선민에게 쉬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에게, 여호와를 믿는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선민에게 쉬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는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인격적 관계란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항상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마주해야 할 대상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를 향해 말씀하심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마주한 상태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민이라는 자들이 쉬지 않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상 것들을 향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향한 자기의 생각과 소원과 바람을 말하기에 바쁩니다. 이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등 뒤에서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러한 상태가 굳혀질 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중단하시고, 말씀하시던 그 입으로 침을 뱉으십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침을 뱉음이란 딸의 행위가 너무나 악하고 가증스럽기 때문에 더 이상 나의 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인연을 끊어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을 마주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온유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강퍅한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럼으로써 신변에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정하며 수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표현하고, 내 생각을 주장하기에 바쁩니다. 이러한 강퍅함이 지속될 경우 하나님은 침을 뱉으시듯 이젠 그만 말하겠다. 너와 나는 끝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침을 뱉으십니다. 듣지 않기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땅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침을 뱉는 행위는 인연을 끊을 때 나타납니다. 계대결혼법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형이 자식이 없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형의 이름으로 호적에 올림으로써 가문이 끊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동생이 아이가 형의 호적에 오르는 것을 꺼려서 형수를 거부하는 경우, 형수는 시동생에게 이스라엘에서 끊어져 마땅한 자라는 의미로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욥기 30장에도 얼굴에 침을 뱉는 것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10절을 보면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욥이 형편없는 처지에 떨어지자, 그동안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인연을 끊어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상태일까요? 여러분의 의식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상 것들 대신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수용하는 온유함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마주하는 가운데 내 신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믿고 다 수용하며 원망 불평을 하지 않습니까? 온유함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미리암과 아론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주해야 할 순간에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마주했습니다.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마주해야 할 순간에 귀에 들리는 대상들을 마주했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마주해야 할 순간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들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대상들을 향하여 떠오르는 내 생각을 붙잡고, 그 생각대로 말하고 주장하고 구하고 추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세월이 얼마인지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그치신 것은 진즉에 일어난 일입니다. 까마득한 세월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중단하셨을 수 있습니다. ‘너하고 나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여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어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끊으시는 표시로 우리를 향하여 침을 뱉으신 것이 오래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제시됩니다. 이사야서 506절을 보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또 마가복음 1465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손으로 예수님을 못 박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입으로 예수님께 침을 뱉게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만 마주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주장하기에 급급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향하여 이제 인연을 끊자고 말씀하시는 대신에 주님께서는 내 앞에 서셔서 그 침 뱉음을 다 가로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고 지탱되고 있습니다. 마치 미리암이 하나님과의 인연이 끊어졌을 때 모세가 중재에 나선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중재에 나섰다는 것은 미리암을 향해 하나님께서 침 뱉으신 것을 모세가 자기 얼굴로 받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침을 뱉고 인연을 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침 뱉음을 받으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막으셨습니다. 미리암이 진영 밖으로 쫓겨났다가 다시 들어온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이어주시려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보좌 우편의 자리로부터 하나님을 계속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주하면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에 대해 저절로 귀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온유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으면 지금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로써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금 강릉에는 물 부족으로 피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924일이면 저수지에 물이 한 방울도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재난 상황을 마주하면서 걱정하고 염려하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온유함을 등진 강퍅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침 뱉으실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정말 피난을 가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마음이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을 중심으로 신변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현상과 문제와 일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중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백수, 천수, 만수를 내다보시며 뜻하시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심으로써 도달하시려는 목표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나님이 마음 써주심에 감사하며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보여야 하는 온유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마주하여 모든 것을 수용하는 온유한 자들과만 인연을 맺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수용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삶의 상황과 문제와 모든 일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땅에 있으면서 마주하는 대상이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질 수 있는 것들뿐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유함은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주장하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말씀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시고 침을 뱉으시며 인연과 관계를 끊어내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주님을 붙잡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온유함을 반드시 지켜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것이 강력하고 귀에 들리는 것이 자극적이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이 유혹합니다. 그러나 주님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죽게 하시고, 주님 안에 머묾으로써 항상 하나님을 마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의 상황도 무조건 감사함으로 수용하는 온유함의 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