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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공생애, 이젠 시작하자>의 줄거리 :
성막 안에 있는 등잔대에 항상 불이 켜져 있음은 어둠에 덮인 세상 속에서 선민이 빛을 발산함을 상징합니다. 생각 감정 의지와 말과 행동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천국 분위기가 반영되어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공생애의 상태입니다. 마치 평생 자기 개인의 일을 하지 못하고 오직 성막 봉사만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레위인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소유된 공적 신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언제 어디서나 내 지정의언행이, 하나님이 날 가지시고 내가 하나님을 가진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공생애를 사는 것이고 빛을 밝히는 등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공생애, 이젠 시작하자
(민수기 8:1~26)
1.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등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할지니라 하시매
3. 아론이 그리하여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4. 이 등잔대의 제작법은 이러하니 곧 금을 쳐서 만든 것인데 밑판에서 그 꽃까지 쳐서 만든 것이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이신 양식을 따라 이 등잔대를 만들었더라
10.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
11.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
1~4절에는 등불을 켜는 방법과 등잔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레위인을 하나님께 드려서 성막의 일을 하게 하라는 말씀이 이어지는데 10~11절에는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요제는 제물을 손에 들고 앞뒤 위아래로 흔들어서 바치는 제사법을 말합니다. 다만 아론이 정말로 레위인을 들고 흔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한 레위인을 드린다는 것은 레위 지파 전체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2절에서 레위인에게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속죄제물과 번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보면 속죄제물의 가슴 부분을 레위인으로 생각하여 흔들어 드림으로써 레위인을 요제로 드린다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동일시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너다.’라는 생각으로 죄를 제물에 옮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동일시된 수송아지의 가슴 부분을 흔들어 드림으로써 레위인을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을 행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 중심으로 ‘공생애, 이젠 시작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사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공생애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레위인이 평생 성막에 머물면서 성막을 위해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레위인에게는 개인의 삶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더 이상 나의 사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공생애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룰 수 없는 당면한 사실입니다.
본문 1~4절에서 언급되는 등잔불에 관한 말씀은 맥락상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출애굽기로부터 시작하여 레위기를 통해 성막의 기구들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이루어졌습니다. 등잔대의 의미와 등잔불을 밝히는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되었습니다. 6장에서 나실인에 대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나실인 규정은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고,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7장에서는 열두 지파의 대표가 똑같은 예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을 열두 번 반복해서 기록함을 통해 바치기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나실인의 규정이 나를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게 하는 일이라면, 바치기는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이 가지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에 대해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바치기를 통해서 소유의식을 찢어버리라는 의도의 말씀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내 삶 전체를 전방위적으로 온전히 다 가지실 수 있게 됩니다.
한편, 본문에서 갑자기 등잔불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 것은 나실인 규정과 바치기에 대한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등잔불이란 모든 사람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선민은 빛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으로부터 빛의 역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지실 때, 나는 하나님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내 삶 전체를 가지심으로써 나는 천국을 갖습니다.
본문은 이렇듯 하나님과 내가 서로 가짐이 일어날 때 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함과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공생애의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공생애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레위인을 언급하십니다. 레위인은 평생 개인적인 일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막과 관련된 일만 했습니다. 이러한 레위인을 예로 들어 등잔불의 역할을 하며 사는 삶이란 개인의 삶이 없는 공생애의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10절을 보면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라고 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안수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에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안수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과 레위인을 동일시하는 것으로써, 모든 선민이 레위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막 봉사를 하는 레위인만 공생애를 사는 것 같지만, 사적인 가정과, 사적인 사업과, 사적인 농사일을 하면서도 내용은 공생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모든 사람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된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난장판이 되고 대환장 파티가 되어버린 근본적인 이유는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지자 하나님은 우리 의식의 어둠에 갇히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생각을 하고 감정이 움직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의식이 작동하고 의지가 발동해서 말과 행동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는 ‘하나님 없음’의 상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세계를 창조하시려고 마음먹으셨을 때 하나님이 없는 세계로 피조물의 영역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피조물의 영역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내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이 어둠 속에 계시고, 하나님이 없는 상태의 의식을 갖고 있을 때 나타나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말과 행동을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샘물이 솟아나듯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콸콸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지금도 지구에는 80억 인구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살아계심과, 보고 계심과 알고 계심과 나를 사랑하셔서 생각하시며 이끌어 가신다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잠깐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꺼진 상태에서 생각과 감정이 움직이고 말과 행동이 나온다면 그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쏟아내는 일에 불과합니다. 날마다 80억 인구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쏟아내고 있으니 지구가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자녀의 모습을 보니 부모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게임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잠깐이라도 하나님이 의식에서 꺼진다면 하나님의 있음도 하나님의 좋음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 좋음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게임만 하는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감정이 움직이고 말과 행동을 하면 자녀에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쏟아내게 됩니다. 무슨 말을 해도 맞는 말이 없고, 무슨 행동을 해도 공허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게임만 해서 되겠니? 그래서 제구실을 하겠니? 사회에 나가봤자 놈팡이밖에 더 되겠니?’라고 말하는 것은 얼핏 자녀를 위한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배어 나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하나님이 계획하신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고, 내가 하나님을 갖습니다.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을 존재감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좋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마음 둘 유일한 장소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갖고, 천국을 유일한 마음 둘 곳으로 가진 상태는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움직임에 반영되고, 말과 행동에도 반영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공생애입니다.
한편 본문에 특이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2절을 보면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등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할지니라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이 모습이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등잔이 아니라 손전등이라면 앞으로 비추고 뒤로 비추라는 말씀이 이해될 텐데, 심지에 불이 붙은 등잔대를 어떻게 앞으로 비추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이것은 등잔대를 벽 쪽으로 세워서 벽의 반대쪽을 비추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가지실 때 나도 하나님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전방위적으로 나의 삶을 가지실 때, 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 천국을 갖습니다. 그럴 때 나는 세상에서 등불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거창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중대한 사명을 띠고 그럴싸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행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등잔불이 앞을 비추게 하라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고, 내가 하나님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가지시고, 나는 천국을 가집니다. 이러한 상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반영되고,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납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한 일을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모든 대상을 향해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부모로서 자녀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때 자녀 앞에서 하는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있음이 반영되고, 하나님의 좋음이 반영되고, 천국에 마음을 두고 있는 상태가 반영되어야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내가 어떤 문제나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맞닥뜨린 문제나 상황 앞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이 된다는 것은 막연한 개념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천국이 반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우자를 대하고 있다면 배우자에게 빛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이 되는 것은 무슨 엄청난 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야 될 사명이 아닙니다. 그 대상은 문제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지금 마주 보고 있는 대상에게 빛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좋음을 가지고, 지금 마음을 천국에 둡니다. 이러한 상태가 생각에 반영되고, 감정에 반영되고, 의지에 반영됩니다. 말에도 반영되고, 행동에도 반영됩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가 빛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빛의 삶을 레위인의 삶과 연결하십니다. 앞선 6장에서는 나실인의 규정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는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7장에서는 열두 지파의 대표가 똑같은 예물을 열두 번 바치는 것을 89절까지 반복하여 말씀하시며 바치기의 의미를 강조하셨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소유의식을 찢어버리고 하나님이 내 삶을 가지셔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일어나는 일이 내가 천국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사야 11장 9절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교리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앎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서로를 알게 됨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과 실제로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함이란 곧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고 내가 하나님을 갖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가지시고, 나는 천국을 갖는 상태에서 나오는 말이 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아내가 친구들 앞에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남편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이 지식은 남편과 연합하여 삶을 공유하는 상태에서 알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이러한 말들이 넘쳐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7분 설교도 하고 유튜브 쇼츠도 만드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역사에 의해 좌우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은 전부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나오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위해서 레위인처럼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레위인은 평생 성막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와 연결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실제 살아계심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막을 위해 봉사하는 레위인에게는 자기 일이 따로 없습니다. 이러한 레위인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식에서 꺼뜨리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대표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고, 내가 하나님을 갖습니다. 그럴 때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천국이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지만 내게서 나온 생각이 아니고, 내 감정이지만 내게서 나온 감정이 아니며, 내 의지이지만 내게서 나온 의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도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라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있음, 하나님의 좋음, 천국도 다 끊어진 상태에서 하는 생각이라면 내 생각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어진 상태에서 감정이 발생하면 내 감정입니다. 의지도 내 의지이고, 말도 내 말이고, 행동도 내 행동이 됩니다. 그렇다면 목회를 하더라도 공생애는 아닙니다. 목회를 한다고 하지만 의식과 마음에서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끊어진다면 하나님의 있음에 연결됨도 없고, 좋음에 연결됨도 없고, 마음이 천국에 있지도 못합니다. 이처럼 있음과 좋음과 천국이 반영되지 않는 상태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말과 행동이 나온다면 그것은 내 생각이고, 내 감정이고, 내 의지이고, 내 말이고, 내 행동입니다.
그러나 내가 목사는 아닐지라도 직장에 있든 가정에 있든 내 앞에 있는 대상을 향해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슬픔을 느끼더라도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천국이 반영되고 있다면, 그것은 내 감정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감정입니다. 어떤 사람을 앞에 두거나, 어떤 문제를 앞에 두거나, 어떤 대상을 앞에 두었을 때,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공생애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고, 나는 하나님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가지시고, 나는 천국을 가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 내 말, 내 행동이 없어집니다. 내 모든 지정의 언행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천국이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하나도 없기에 공생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신 성막에서 일하는 자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항상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의식하며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삶은 공생애입니다. 그 공생애의 의미가 앞서 언급된 나실인의 규정과 하나님께 바치기를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서로를 가졌을 경우에는 바로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의 공생애가 되고, 우리의 레위인으로서의 단계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5절 이하에는 레위인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정이 언급됩니다. 먼저 정결 예식을 통해 속죄의 물을 뿌렸습니다. 이것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모든 털을 다 밀었습니다. 이는 곧 몸에 붙어 있던 과거의 모든 습관을 다 제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의복을 빨았는데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사적인 신분을 갖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남편이었고, 누구의 아빠였고,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형이고 동생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적인 관계가 내 지정의 언행을 좌우합니다. 아들로서 생각할 때가 있고, 남편으로서 말할 때가 있고, 형으로서 감정이 움직일 때가 있고, 아버지로서 의지가 발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공생애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마음을 천국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의복을 빨았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 갖는 신분으로서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 갖는 신분으로 사니까 자녀에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감정을 표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지와 말을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누구를 만나도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공생애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드려지는 레위인의 삶을 두 가지 특징으로 정의합니다. 바로 초태생과 요제입니다. 이것은 레위인으로서 공생애를 사는 사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먼저 초태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초태생은 출애굽 때 유월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으로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을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는 살았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장자에 대한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신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소유권을 주장하시지만 실제로 각 가정에서 장자를 데려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레위인을 장자 대신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러한 장자가 초태생입니다. 장자라는 특징은 하나님께 첫 번째 대상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공생애를 사는 사람들은 등잔불로써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빛을 발하며 삽니다. 이들의 특징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첫 번째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첫 번째 대상이 되고,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첫 번째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 되신다는 것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성취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생애를 사는 사람이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만 명이든, 일억 명이든 모든 사람을 첫 번째 대상으로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도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태생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확언해 주시는 요소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네가 첫 번째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하나님께는 항상 예수님이 먼저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첫 번째인 이유는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해서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기에,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첫 번째로 여기십니다. 그런데 10억 명이라도 다 예수님을 옷 입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은 10억 명이라도 동시에 첫 번째로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듯 초태생은 하나님이 첫 번째로 마주하는 대상이 됨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 남아 있는 몸으로 사는 삶은 빛을 발하는 등잔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반영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첫 번째로 상대하려고 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가 아니라면 어떨까요? 마음으로 자녀를 붙잡고 있고, 마음으로 배우자를 붙잡고 있고, 마음으로 몸을 붙잡고 있고, 마음으로 노후를 붙잡고 있고, 마음으로 과제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가 아닌 상태에서는 나도 하나님의 첫 번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반영되지 못하고 막혀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 내가 첫 번째 대상이 되고, 내게 하나님이 첫 번째 대상일 때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반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첫 번째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은 반드시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마음은 십자가 예수님을 놓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막힘없이 반영될 수 있고, 천국이 반영될 수 있습니다.
한편 초태생에 이어 요제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요제는 희생 제물의 가슴 부분을 앞뒤로 흔들고 위아래로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법입니다. 요제(搖祭)는 영어로는 웨이브 오퍼링(Wave offering)으로써 직역하면 ‘물결치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제의 제사 방식은 이 세상의 삶을 근본적으로 요란하게 파도가 치는 바다 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함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파도 위에서 진행된다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둔 비유일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현재 강릉은 심각한 가뭄 상태입니다. 수도계량기를 50%까지 잠갔는데, 이제 며칠 뒤에는 75%까지 잠가야만 합니다. 정말로 물이 쫄쫄 나오는 수준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삶이 가뭄이라는 파도에 요동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정 상태나 가족의 문제가 답답하게 쫄쫄 흐르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다 파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파도가 요동치더라도 마음은 휩쓸리지 않아야 합니다. 삶에 어떠한 파도가 치더라도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의 첫 번째 대상이 되고, 아버지가 나의 첫 번째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초태생이 뜻하는 상황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세상에서 등잔대와 같은 빛의 삶을 살며 그럼으로써 공생의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천국이 반영되어서 지정의 언행이 불을 밝히는 심지가 될 수가 있을까요? 몸이 살고 있는 세상에는 건강의 파도, 재정의 파도, 환경의 파도, 홍수나 가뭄 혹은 폭염 같은 기후의 파도를 비롯한 다양한 파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파도가 출렁이고 내 마음을 휩싸고, 감싸고, 덮칠지라도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부활 승천하시는 그 수직 상승의 길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파도를 뚫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첫 번째 대상인 초태생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첫 번째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 공생애를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초태생의 삶을 살고 초태생의 관계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 요제를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좌우로 흔들리고, 앞뒤로 흔들리고, 위아래로 흔들리는 삶의 파도 속에 있을지라도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이어지는 수직 상승의 길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지정의 언행에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반영되고, 내 마음이 천국에 있음이 반영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빛이 되며 우리의 삶은 공생애의 삶이 될 것입니다.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공생애의 삶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천국이 지정의 언행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조금도 미루시면 안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초태생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의 파도에 의식이 휩싸이고 마음이 휩싸여서 여전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쏟아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더는 미루지 말고 하늘로 치솟아 하나님의 초태생이 되며, 어떤 파도가 임해도 하늘로 치솟을 수 있는 추진력을 유지함으로써 공생애의 삶을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