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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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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치기'에 담긴 복음적 철학_태승철

by 태승철 · 25-08-24 18:08 ·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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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바치기'에 담긴 복음적 철학>의 줄거리 :

앞에서 나실인 규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실인의 세 가지 규정은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기 위하여 내게서 나타나야 할 태도에 관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내 삶 자체를 통째로 가지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앞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전방위적으로 온전히 가지시는 것이 내게는 최상의 삶의 상태임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내 삶을 끌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송두리째 가지시게 하면 됩니다.

 

 

'바치기'에 담긴 복음적 철학

 

(민수기 7:1~89)

 

10.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지휘관들이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12. 첫째 날에 헌물을 드린 자는 유다 지파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라

13. 그의 헌물은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14.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그것에는 향을 채웠고

15.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16.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17.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의 헌물이었더라

 

 

1~9절까지는 성막 봉헌식이 있을 때 열두 지파의 대표가 힘을 모아 헌물을 드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성막을 옮길 때 수레가 필요했고 소 두 마리가 수레 하나를 끌게 하기 위해서 헌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 중에서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과 고핫 자손은 각각 성막을 옮길 때 내용물이 달랐습니다. 그 내용물에 따라서 분배를 했는데 고핫 자손에게는 수레와 소를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고핫 자손이 담당하는 내용물은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또다시 열두 지파의 대표가 예물을 드립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열두 날을 각 지파의 대표가 번갈아 가며 똑같은 내용물을 드린다는 이야기가 88절까지 반복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유다 지파의 대표가 먼저 예물을 드렸다면 그다음부터는 이하동문으로 모든 지파 사람들이 똑같은 내용물을 하나님께 드리되, 매일 하루에 한 사람씩 12일 동안을 드렸다.’라고만 해도 내용은 충분히 전달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굳이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7장은 하나님께 바치기 그 자체를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바치기에 담긴 복음적 철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일에 철학적 물음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철학적 물음이란 그러려니 하고 당연시하는 일에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왜 태어나서 사는가? 인간은 왜 코로 숨을 쉬어야 하는가? 인간은 왜 밥을 먹어야 하는가?’라는 말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들을 바보처럼 묻고 그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 철학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께 바치는 자도 없고 바침의 의미를 아는 자도 없습니다. 도대체 바침이 무엇이기에 본문은 하나님께 바치는 일 자체에 조명을 비추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통해 자꾸 바치라 말씀하시고, 자꾸 남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반 종교에서 바치는 것은 일종의 투자입니다. 바치면 신이 기뻐해서 더 많은 것을 되돌려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해는 다릅니다.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한 투자 의식이 담겨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자꾸 바치라는 말씀이 조금 짜증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꾸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또한 귀에 거슬립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예 이러한 말씀에 대해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나 남에게 주라는 말씀을 의식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각 사람의 상황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하나님이 만들어 쓰시면 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우리에게 바치라 말씀하시고 남에게 주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넉넉하게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넉넉하게 주시지도 않으면서 대체 무엇을 바치라고 하시고 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마가복음 1241~44절을 보면 두 렙돈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44절에서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대체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2035절을 보면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9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꾸 바치라 하시고 주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무엇인가 필요하시기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다른 사람을 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선 나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나 하나님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는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치라는 말씀, 주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복음적 철학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목표 의식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다른 사람에게 준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만드시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바치고 줌으로써 내 것이라 여기는 소유의식을 찢어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들에 대해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바침이란 돌아올 결과물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 줄 때도 갚기를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바침과 하나님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 줌이란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의 정반대되는 행동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바침과 줌의 성경적 요구에 담겨있는 철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에 충돌을 일으키라는 요청입니다. 소유의식이 일종의 장막이라면 장막 안에 갇혀있지 말고 장막을 찢고 바깥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유의식이라는 장막을 찢어버려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소유의식이라는 장막 바깥으로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모든 영역을 남김없이 가지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자면 본래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내 삶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 것들에 대해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권리는 침해받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마당 삼아 소유권자의 권리를 물 샐 틈 없이 행사하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 대해 소유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당에 별개의 권리 영역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발동할 때 나만의 울타리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전방위적으로 내 삶을 가지시려는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권리행사는 방해받게 됩니다. 창조적이고 자발적이고 계획하신 그대로 나의 삶을 가지실 수 없게 됩니다.

바치라 하시고 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성에 의해서 소유자이신 하나님의 권리를 무시하고 나의 소유의식을 장막처럼 울타리처럼 세우려고 하는 의도를 찢으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소유의식에 대한 충돌을 일으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침과 줌에 담긴 복음적 철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바치라 하시고 왜 주라고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치라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에게 필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주라고 하시는 이유도 내가 줘야 할 사람에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일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일이기에 바치고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나실인의 세 가지 규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규정은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가지시기 위한 방법입니다. 나실인은 결국 나를 바치는 것이고 나를 헌신하는 것입니다. 독주를 마시지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시체에 접촉하지 말라는 규정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됩니다. 나실인의 세 가지 규정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내게서 유지되어야만 하나님이 실제로 나를 가지실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나를 바친다고 말해도 바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서 나실인의 세 가지 규정이 상징하는 의미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실제로 나를 가지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전방위적으로 가지시기를 원하십니다. 내 삶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아 뜻하고 계획하신 대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자꾸 이것은 내 것이다. 저것은 내 것이다.’라는 소유의식을 갖는다면 하나님의 소유권은 발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방위적으로 내 삶을 온전히 가지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나에게 엄청난 손해입니다.

내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관계하는 물건, 내가 관계하는 사람, 내가 맞닥뜨리는 상황과 문제와 변수들, 나의 과제와 의무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소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실 때 내 삶은 에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삶을 전방위적으로 온전히 장악하시는 상태, 하나님이 나와 내 삶을 가지시고 이끌어가시는 상태가 바로 낙원이고 에덴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은 하나님이 가지셔야만 합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에게 바침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본문의 말씀은 성막을 제작할 때 필요한 재료를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믿음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애초에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믿음의 함정입니다. 성막을 제작하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성막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목숨도 하나님의 것이고, 백성이 바치는 성막의 재료도 하나님의 것이고, 그들의 시간이나 재능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복잡하고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림 그리신 대로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막은 꽤 복잡하고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생각해 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호랑이를 보면 휘황찬란한 겉모습에 속에는 몇 개의 뼈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 마디의 연결과 살과 내장의 구조를 보면 성막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복잡할 것입니다. 나비의 날개는 성막의 장식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있으라는 말 한 마디로 있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9절에서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대로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막을 제작하실 수 없어서 재료를 요구하셨던 것일까요? 빛이 있으라, 바다가 있으라, 생물이 있으라 말씀하신 것처럼 성막이 있으라 하시면 하나님께서 그림 그리신 대로 성막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바칠 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막 제작을 위해서는 시간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고, 각종 재료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들은 본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바치라고 하신 이유는 엄청나게 큰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 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을 내게 주실 때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이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내 삶 자체를 하나님이 전방위적으로 온전히 가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가지시고 소유권자 된 권리를 행사하셔서,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입니다. 이 세상 것을 내 소유로 받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 삶에 있는 것조차 전부 다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려서, 하나님이 가지시는 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이것이 바치기와 주기에 담겨있는 복음적 철학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가 똑같은 예물을 반복해서 드리는 모습이 기록되었습니다. 모든 지파의 대표가 예물을 드릴 때까지 12일이 걸렸습니다. 이 기간에 백성은 오늘은 우리 지파의 대표가 예물을 드리는 날이다.’라고 여깁니다. 또 자고 일어나면 이웃끼리 오늘은 어느 지파의 대표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날이지?’라고 묻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성막 봉헌식 기간은 바치기 이벤트였습니다. 열두 지파가 따로 예물을 드렸다고 해서 각 지파의 특성을 따라 특산물을 바쳤던 것이 아닙니다. 열두 지파가 똑같은 예물을 바쳤기에 무엇을 드리는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바치기 자체가 이슈이고 관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일을 시키셨는지 그 의도가 본문의 마지막 절인 89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성막이 완성되고 봉헌식에서 예물을 드리는 일까지 마무리 되고 이제 모세가 성막에 들어갑니다. 법궤 위에는 속죄소 뚜껑이 있고, 뚜껑 위에는 두 천사의 날개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 사이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은 성막이 이스라엘 영내에 존재하는 한, 살아계신 하나님이 실시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현장에 오셔서 함께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은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서 조정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 삶을 전방위적으로 완전히 가지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될 일 중의 하나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며칠 전에 7분 설교로 임마누엘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조건이란 하나님께 내 의식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본문과 합쳐서 생각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삶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동전의 앞뒷면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집중됨이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과 함께하려 할 때 내가 소유의식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뜻입니다. 그 대신에 몸으로 살고 있는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이 완전히 가지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가져야 되고, 하나님은 이 땅에서 진행되는 내 몸과 내 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삶을 다 가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몸 때문에 생긴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이 가지셔야 하고, 내 몸 때문에 생긴 물건과의 관계를 하나님이 가지셔야 하고, 내 몸으로 맞닥뜨리는 상황과 문제와 모든 여건과 조건들을 하나님이 다 당신 것으로 가지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것으로 내 삶을 전방위적으로 가지셔야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하시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그 일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소유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에 어차피 내 삶에서 하나님의 소유권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자꾸 하나님의 소유권의 마당 위에서 따로 텐트를 치고자 합니다. 내 영역이라는 말뚝을 박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의식을 갖고 소유의식의 울타리를 치고자 합니다. 이러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 나의 생각은 본래 소유권자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과 뜻에 대해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소유권자로서 내 삶을 보시기에 좋은 목표를 향해 이끌어가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내 소유의식을 발동한다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은 하나님의 소유권 행사를 방해하고, 충돌하고, 찢고, 가로막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선민에게 깨우쳐 주시고자 바침과 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치고 줌을 통하여 내 것이라 여겨서 끌어당기려는 소유의식에 스스로 충돌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격자로서 세상 것들을 내 것으로 여기는 소유의식을 가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자발적으로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세상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며 아까워하고 소유의식을 발동하는 것이 얼마나 막대한 손해를 가져오는지 스스로 깨달으라는 의도가 있습니다. 나의 소유의식이 어떤 손해를 가져오고 어떤 막대한 손실을 입힌다는 것일까요? 소탐대실이라고 소유의식을 발동하여 작은 것을 붙잡고자 하지만 그 결과 내 삶 전체를 하나님이 가지시는 일을 방해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1억을 투자하면 내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람이 있다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라도 시도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확실하다면 1억이 아닌 10억이라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영끌족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없는 젊은이들이 영혼까지 끌어모으는 심정으로 대출을 받아 갭 투자로 집을 삽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인생을 아름답게 이끌어 주겠다는데 확실하기만 하다면 10억이라도 투자 못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 내 삶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끌고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다만 이 엄청난 일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소한 일에 사로잡히는 나의 소유의식입니다. , 물건, 자녀 등 각종 상황과 문제를 내 것으로 여기는 소유의식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하심으로 보시기에 좋도록 이끌어가시려는 내 인생을 막아버립니다.

 

성경은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소유의식을 갖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를 가져오는지 알라는 의미에서 귀에 거슬릴 정도로 바침과 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가지기도 모자라는 판에 뭘 자꾸 바치라 하시고 뭘 자꾸 주라고 하시는지 짜증이 날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담겨있는 철학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으레 종교에서 하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좋다. 남에게 주는 것이 좋다.’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자신과는 무관하게 여깁니다. 목회자들도 성경과는 다른 의도에서 바치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이단들을 보면 다 팔아서 교주에게 바칩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며 바치라는 말씀은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담겨있는 철학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권자이신 하나님의 권리는 온 지면을 덮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좁쌀만큼도 안 되는 크기의 것들에 대해서 소유의식을 발동시킨다면 하나님의 권리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내 것의 영역을 만들고 내 것의 울타리를 만듭니다. 내 삶을 전방위적으로 가지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도를 자꾸 충돌하고 방해하고 막아버립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내 것이라고 끌어당기려는 소유의식의 방향에 정면으로 충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의식의 장막을 찢고 나와야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성경은 바침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침을 통해 소유의식이 찢어지고 없어지면 내가 너를 전방위적으로 다 가질 것이다. 나는 너를 틈새 없이 다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너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러니 너는 이 세상에 대한 소유의식을 갖지 마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의 소유의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우리는 그 소유의식의 전부를 통틀어 하나님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내게는 몸이 있고, 몸과 관련된 일들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두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내 몸이 있어서 주어진 모든 것들에 대한 소유의식의 찢어짐이고 죽음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잘하는 사람의 특징은 소유의식이 하늘을 향해 강렬하게 발동하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과 내 천국을 잃지 않겠다. 하나님은 내 것이기에 나는 한시라도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잃지 않겠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하늘로 미치면서 잠시도 하나님을 잃지 않고 천국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세상 것들에 대해 소유의식을 갖고,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것 대신 하나님과 천국을 향해 내가 결코 잃지 않으리라!’라고 발버둥 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소유의식을 거둬버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사람에게 주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어떤 일에 쓰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전방위적으로 가지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삶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는 짜증이 날 정도로 바치고 주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바치고 줌을 통해 내 소유의식과 충돌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내 소유의식의 장막을 찢을 수 없다면 하나님이 내 삶을 전방위적으로 가지시는 대박 사건은 완전히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을 하나님이 가지시게 합시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내 소유의식은 찢어지고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진짜로 내가 가져야 하고, 진짜로 내가 소유의식을 강하게 주장해야 할 대상은 천국과 하나님입니다. 천국과 하나님에 대하여 소유의식이 누그러들고, 소유의식이 완만해지고, 소유의식이 사라져 버리는 바보 같은 삶의 시간이 다시는 나타나면 안 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굳이 바치기 자체가 이벤트와 이슈가 되게 하신 이유를 우리가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세상의 작은 것들에 대한 나의 소유의식의 죽음임을 깨달아, 소유의식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서 천국과 하나님을 향하여 발버둥 치며 적용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