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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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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벌거벗음 중 하나는 꼭 해야 한다_태승철

by 태승철 · 24-04-27 07:17 · 59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두 벌거벗음 중 하나는 꼭 해야 한다>의 줄거리 :

두 가지 벌거벗음이 있습니다. 각각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 안에서 가지는 벌거벗음의 두려움이 있고 하나님의 언어 체계 안에서 가지는 벌거벗음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선악과 먹은 아담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둘 다 벌거벗었습니다. 아담은 벌거벗었음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은 벌거벗은 상태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이 두 가지 벌거벗음과 두려움을 알아봅니다. 나는 어느 쪽에 속했을까요?

 

두 벌거벗음 중 하나는 꼭 해야 한다

 

(창세기 3:8~13)

 

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본문에는 벌거벗었다는 표현이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최초로 보인 증상은 벌거벗었음을 강하게 의식하였습니다. 그 결과 남녀가 서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운 곳을 가렸습니다. 다만 여기서 벌거벗음이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샤워를 하거나 목욕탕에 들어갈 때 겉옷부터 속옷까지 다 벗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 작동하는 언어 체계 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옷을 벗듯이 벗어버리는 상태가 본문이 말하는 벌거벗음의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내 마음에서 돈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돈에 대해 벌거벗은 것입니다. 혹은 돈이 있었는데 잃어버리게 되었다면 벌거벗겨진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이 말하는 벌거벗음이란 육체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육체적으로 벌거벗었습니다만,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단순히 육체에 걸치는 옷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언어적 인격을 가진 존재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언어적 인격을 가졌다는 것은, 그 안에서 작동하는 언어 체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벌거벗음이란 자기 언어 체계 안에서 좋다고 느끼는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벌거벗은 상태는 굴욕감과 수치심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 굴욕감과 수치심에 두려움이 보태진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수치심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벌거벗음이 두려움이 되는 이유는 판단과 생각의 기반이 되는 언어 체계 안에서 좋다고 여기는데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좋다고 여기는 것을 아예 갖지 못하거나 원하는 만큼 충분히 갖지 못했을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끝나버릴 때, 이미 가진 좋음을 잃어버릴 가능성 앞에서 사람의 수치심은 두려움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사람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과 나눈 첫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화가 벗었음의 문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곧 벗었음의 문제가 그만큼 중요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타락한 직접적 이유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좋아하는 가치를 옷 입듯이 갖지 못했음을 알게 된 이유는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11~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물으시되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나와는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지고 너 스스로 좋음을 판단하게 되었느냐?’라고 물으신 셈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과는 별도의 판단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좋다고 여기시는 것과는 별도로 자기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12절을 보면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셔서 함께하게 된 여자였습니다. 하와에게 책임을 돌렸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 여자를 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선악과를 먹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셈입니다. 이어서 13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살게 하신 뱀 때문에 내가 꾐을 당해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라고 변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타락한 직접적 원인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게 된 이유는 사탄의 개입이 있었고, 사탄의 개입을 허용한 것에는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서로를 들여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실 때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앞서 배필이라는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아담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위해서, 아담 외에 다른 인격적인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결혼으로 이어지기에 배필이라는 표현이 쓰였지만, 본래 하나님의 의도는 한 사람에 대한 인간관계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서 생각하신 것을 이루시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했습니다.

돕는 배필을 직역하면 눈에 먼저 띄는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도움도 내가 아닌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운동장에 학생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부모 눈에는 자기 아이만 눈에 띕니다. 자녀를 제일 눈에 띄는 대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세상에 많은 이성들이 있지만 그중에 제일 눈에 띄는 사람과 결혼해서 남편과 아내가 됩니다. 인간관계란 하나님이 제일 먼저 눈에 띄게 하신 사람과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대상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해서 마음이 밀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과 밀착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며 눈에 띄는 사람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눈에 띄게 하셨다고 해서 육체의 대상을 마음에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과의 밀착은 밀려나고 틈새가 벌어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는 바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기척을 피해 수풀 뒤에 숨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결별한 상태를 수풀 뒤에 숨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아담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벌거벗음은 수치스럽고 굴욕스러움인데 아담은 두려워합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벌거벗음 중에 하나를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먼저 두 가지 벌거벗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앞서 벌거벗음이란 언어 체계와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샤워실에 들어갈 때 옷을 다 벗는 것처럼 내 언어 체계 안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다 벗어버리고 입지 못한 상태입니다. 문제는 좋다고 여기는 가치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는 타락 후에 바뀌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좋음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음인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타락 후에는 뱀의 말대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다시 말해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음을 고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아담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벌거벗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벌거벗음이란 좋음을 벗어버렸거나 좋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는 반드시 벌거벗어야만 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을 가진 채로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이 좋으면 반드시 눈에 보이지 않는 좋음인 하나님을 벗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마음은 세상 좋음으로 옷 입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좋으면 눈에 보이는 좋음은 반드시 옷 벗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마음은 하나님으로 옷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아담의 두려움이 발생합니다.

벗었음과 연관된 두려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 아담에게는 언어 체계가 필요했습니다. 이로부터 사탄의 언어 체계를 채택합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음과 나쁨을 구별하게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언어 체계의 특징은 마음의 공백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들어오셔야만 채워지는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은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는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아무리 가져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좋음을 찾는 언어 체계를 갖는다면 절대로 마음의 공백은 채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사탄의 언어 체계의 특징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채울 수 없으므로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항상 부족한 것을 찾아내는 족집게 언어 체계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채워지는 마음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채울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구조이기에 사탄의 언어 체계로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은 것을 찾는다면 마음은 언제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게 되자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십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하나님이 실제로 동산을 거니시며 아담을 찾으셨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느낀다면 정말로 큰일이 벌어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있다고 느껴지면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존재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하기 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들과 밀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타락한 후에 벌어지자 아담은 하나님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며 살게 된 아담에게 하나님은 제일 무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처럼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사탄의 언어 체계가 작동하는 중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은 누구나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건강이 좋다고 여기는 것은 사탄의 언어 체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고 마음으로 끌어안는다면 마음은 건강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거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옷을 벗어 던지듯이 건강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좋아해서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게 되면 돈은 더 이상 가질 수 없고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돈이라는 옷을 마음이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건강이 제일 중요한 사람, 돈이 제일 좋은 사람, 가족이 제일인 사람, 승진이 최고인 사람을 비롯하여 세상에서 좋다는 가치들을 좋아하는 상태에서 제일 큰 원수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면 모든 세상의 가치를 더 이상 좋음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 세상 가치를 마음껏 좋아하게 만든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마음으로 관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적 생활 습관으로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관계하는 대상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가 작동하는 중에 성경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이름도 부릅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 놓고 좋아합니다. 이것이 종교가 가진 위험성입니다.

아담이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진 뒤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아담은 바로 눈을 떴기 때문에 자기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가까이 오심을 느꼈습니다. 그 하나님과 밀착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면, 지금 당장은 없지만 앞으로 갖고 싶고 가져야 되겠다는 것들에 대한 마음 자체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탄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여서 돈이나 건강이나 형통이나 명품 등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만 좋음이다!’라고 느끼고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더는 돈, 건강, 승진, 형통이라는 가치는 하나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이로부터 두려움이 생겨났고 아담은 숨었던 것입니다.

벌거벗은 상태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들로 옷 입고 싶은 욕망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그러한 희망과 욕심과 소원을 좌절시키는 분이십니다. 타락하기 전처럼 하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과 밀착한다면, 지금 가진 희망과 욕심과 소원은 벗어버려야만 합니다. 아담은 이것을 두려워하여 숨어버린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좋음과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의 좋음은 상극입니다. 하나를 붙잡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놓아야만 합니다.

 

아담이 사탄의 언어 체계 안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아무것도 갖지 못한 벌거벗음의 상태와 똑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아담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아담과 예수님 모두 벌거벗은 상태였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세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실제 십자가형에 그러한 배려는 없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발가벗겨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벌거벗은 상태의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담처럼 두려워하기는커녕 요한복음 1930절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언어 체계 안에서 중요한 일과 가치 있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아담도 세상의 가치를 좋다고 여기는 사탄의 언어 체계 안에서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상태를 수치스럽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를 다 빼앗기고 완전히 벌거벗었어도 수치스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똑같이 벌거벗은 상황에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탄의 언어 체계를 채택하여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음을 찾고자 했던 아담에게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좋다고 여길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똑같이 벌거벗었으나 아담은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벌거벗음을 받아들였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는 만족감으로 벌거벗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치가 하나도 없는 벌거벗음을 이상적인 목표로 정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에 세상 가치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목표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하여 사탄의 언어 체계가 돌아가게 된 아담이 목표로 했던 것은 달랐습니다. 세상의 좋음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목표로 삼기는커녕 세상의 좋음이 없음을 엄청난 수치심으로 느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가지겠다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극히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고 세상 가치가 아무것도 없었던 예수님과 똑같은 위치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벌거벗음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세상에 대한 벌거벗음의 상태를 통과해야만 하나님이라는 좋음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의 좋음을 옷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형벌을 가한 자들은 모두 사탄의 언어 체계에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탄의 언어 체계 안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예수님으로부터 강탈하였습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육체의 목숨은 가장 소중했습니다. 그 목숨을 오래 지속시키는 건강도 중요한 가치입니다. 세상을 잘 살게 해주는 돈은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아내, 능력 있는 남편, 형통한 자녀도 너무나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좋게 여기는 사탄의 언어 체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벌을 내린 자들은 사탄의 언어 체계 안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다 강탈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를 다 없애버린 자리가 바로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를 목표로 합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눈에 보이는 가치들을 다 빼앗기고 벌거벗겨진 자리를 나의 자리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 것들이 조금이라도 없어지거나 없어질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마음에서 난리가 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돈이 없어지고, 건강이 없어지고, 자녀의 형통이 없어지고, 명품을 사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정말로 십자가에서 이 세상 가치가 완전히 벌거벗겨진 예수님을 믿고 연합하고자 한다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가치들은 사탄의 언어 체계가 있어야만 좋게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가치들이 없음을 두려워하고, 없어질까 두려워하고, 미래에 얻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죽어도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겠다는 아담의 마음 상태와 같습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에 의해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 상태가 되자 벌거벗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갖고 싶은 세상의 가치들이 없음을 느끼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이 가까이 오심을 느끼자 도망가서 숨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세상에서 얻고 싶은 세상의 가치들을 얻기 위해서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과는 절대로 관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만들어 낸 종교는 이러한 진실을 교묘히 숨깁니다. 세상 것을 마음껏 좋아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종교가 없던 시절의 아담은 이것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상태에서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그런데 이전처럼 하나님과 직면한다면 이것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다.’라고 하는 아담에게서 하나님은 제일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진 채로 눈에 보이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 앞에 나타나셔서 네가 좋아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은 좋은 것이 아니다. 내가 진짜 좋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피한다는 것은 나는 죽어도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과 밀착했던 최초의 안식 상태로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은 괜찮지만 세상 가치를 잃거나 얻지 못할 처지에 놓이는 것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의 언어 체계를 채택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일이 살아계셔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스스로 생각하시며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벌거벗겨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벌거벗겨진 예수님과의 동일시입니다. 예수님이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환경적 여건이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17절에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세상 가치로 잔뜩 옷 입었으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세상 모든 가치에 대해 벌거벗었으나 하나님을 옷 입은 자였습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이 욥에게서 세상의 모든 가치를 다 빼앗아 갑니다. 이때 욥은 욥기 121절에서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고 말합니다. 알몸은 곧 벌거벗겨진 상태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대해 벌거벗고, 하나님 한 분으로만 옷 입고 있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지 나사로의 벌거벗음과 욥의 벌거벗음을 십자가를 통해 이루려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옷 입으려면 눈에 보이는 좋음을 완전히 벌거벗어야만 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벌거벗은 것처럼 벌거벗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형편이 대단치는 않더라도 예수님의 처지에 비교하자면 많은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완전히 벌거벗기 위해서 다 내다 팔아야 할까요? 우리가 벌거벗어야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세상에 대해 벌거벗으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내 몸부터 시작해서 가족관계, , 재산, 자동차 등을 비롯한 삶의 환경 속에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타락한 후의 아담처럼 마음에서 세상의 가치들을 놓치면 큰일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당장 몸이 아프면 마음에 직접적인 느낌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사실 몸은 죽든 살든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건강을 옷 입지 못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벌거벗은 몸으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죽음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건강은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죽든 살든 건강은 하나님 손안에 있으면 됩니다. 내 마음은 육체와 건강이라는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좋아하는 가치를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샤워실에 들어갈 때 옷을 다 벗듯이 세상의 가치를 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육체도 건강도 돈도 자녀도 배우자도 승진도 명품도 다 십자가로 벗어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입을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타락 직후의 아담은 아무런 세상 가치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도 세상 가치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예수님의 마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진 예수님을 목표로 합니다. 샤워실에 들어갈 때 마지막 옷까지 벗는 것처럼 세상의 가치를 싹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벗어버린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것들은 살아계셔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생각하시는 아버지 손에 들려있는 것이 보입니다. 몸조차도, 건강조차도, 재산조차도, 가족조차도, 살아계셔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생각하시는 하나님 손에 들려있으면 됩니다. 내가 그것을 마음으로 입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져야 하고, 붙잡아야 하고, 잃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가졌던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벌거벗음 중에서 반드시 한 가지를 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벌거벗길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 가치를 벌거벗길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 가치를 잃을까 두려운 이유는 우리 안에 사탄의 언어 체계가 작동하기 때문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눈에 보이는 세상 가치를 샤워실에 들어가고 목욕탕에 들어갈 때처럼 완전히 벗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고 하나님이라는 유일한 좋음으로 옷 입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세상 가치를 벌거벗은 그 상태가 내 마음의 상태도 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십자가가 내 심장 옆에 꽂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