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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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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오래 우려내야 하는 사골이다_태승철

by 태승철 · 23-08-31 09:25 · 368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는 오래 우려내야 하는 사골이다>의 줄거리 :

야고보서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하십니다. 들어야 하고, 말해야 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육신을 입고 온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신 십자가 죽음과 그에 이어지는 연쇄 과정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 십자가 복음은 긴 시간 우려내야 하는 사골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십자가 복음을 들음과 전함 사이에 뚜렷이 구별 되는 두 단계가 있음을 드러내 밝혀주십니다.

 

 

십자가는 오래 우려내야 하는 사골이다

 

(야고보서 1:19~27)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본문은 언뜻 잠언의 형식으로 별개의 주제들이 연이어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19~20절의 내용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소의 다리뼈인 사골은 한두 번 우려서는 맛을 다 끌어낼 수 없습니다. 세 번, 네 번 우려내야 안의 골수까지 다 흘러나오게 됩니다. 뽀얀 국물이 나오는 사골은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사골은 어느 정도 우려내면 맛이 옅어지지만, 십자가는 반대로 우리면 우릴수록 짙어집니다. 죽을 때까지 우려내도 짙어지는 사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이 말씀을 단순한 윤리적인 덕목에 대한 조언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단순한 구절에는 심오하고도 방대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듣기는 속히 하며,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일단 성경 말씀 전체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전하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신 말씀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야말로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고 기본입니다.

이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 나오고 천국에 대한 현실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 몸을 장갑 삼으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증언이 또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 나가서 예수님과 함께 삶의 현장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으로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골처럼 우려내는 일입니다. 실제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십자가의 맛은 우러납니다. 그 맛은 하나님 좋음의 맛이고 천국 현실감의 맛입니다. 의식으로 십자가를 기억하고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생활을 하면 십자가가 우러나면서 내 인격 안에는 하나님 좋음의 맛과 천국 현실감의 맛이 점점 짙어지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한다면 십자가의 맛은 우러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이 오셔서 내 몸을 장악하여 움직이십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한편 이러한 이해로부터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하나님의 맛과 천국 현실감의 맛이 점점 더 짙어지게 될 때, 내 인격이 맛보는 국물을 다른 사람에게 퍼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속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사골에 비유하자면 듣는 것은 곧 먹는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누군가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우러난 국물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사람은 국물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속히 하라는 것은 유보함이 없고 주저함도 없고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은 잘 우러난 국물이기에 말씀 먹는 일을 즐겁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들어야 하는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는 더디 하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0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십자가로부터 시작되는 연쇄 과정 속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기에 본문의 맥락과 일치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절을 떠올려 보면 들은 말씀을 전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전함에 있어서는 더디 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고보 장로는 말씀을 들음과 전함을 별개의 두 과정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듣는 과정에서는 속히 하고, 전하는 과정에서는 더디 하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 생활화의 특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려낸 국물을 먹고 맛있다고 이야기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라는 사골을 우려내기는 나에게서도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려낸 국물을 먹고 맛이 있음을 알았다면 이제 스스로 십자가 사골을 우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함에 있어서는 더디 하라는 말씀에 담긴 내용입니다.

식당에서 먹어 본 음식이 맛있으면 집에 와서 그 맛을 따라 해보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생활화할 것을 요청합니다. 십자가 생활화에는 반드시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라는 사골을 맛보았으면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라는 생 사골을 내 안으로 받아들여서 생활화를 통해 우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인격 안에서 십자가를 우려낸 국물이 만들어질 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지 않고 듣기만 해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십자가라는 생 사골을 직접 우려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우려낸 국물만 받아먹어서는 실제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직면하여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우려낸 국물이 맛있고 좋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 스스로 국물을 우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활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그 어떤 존재감보다도 우선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좋음을 들을지라도 하나님을 실제로 만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분들 중에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천국인데 생활 속에 돌아가면 지옥이 펼쳐집니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말씀 듣기는 남이 끓인 국물을 먹는 것입니다. 태승철이라는 사람이 우려낸 십자가 국물은 하나님 좋음에 대한 증언이고 천국 현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러한 국물을 맛보는 일은 쉽고 좋습니다. 국물을 맛보는 동안에는 천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 나가면 이것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나 또한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생 사골을 우려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말씀을 잘 듣다가도 결국은 생활 현장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떠나갑니다.

전해진 국물을 맛봤다면 나도 십자가라는 생 사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속에서 십자가를 우러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좋음의 맛, 천국 현실감의 짙은 국물이 나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일단 좋은 국물을 맛보는 것이 중요하기에 말씀 듣기를 속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국물을 맛봤다면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내 속에서도 국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들을 때 느꼈던 하나님의 좋음과 천국 현실감을 직접 만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우려낸 천국 맛과 하나님 맛이 잔뜩 들어있는 국물을 전하는 대신에 십자가 복음 방송이라는 차선책을 소개합니다. 이것도 유튜브라는 영상 매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야고보 장로가 글을 쓰던 당시에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내가 들어서 좋았던 복음을 전해야 하는 방법은 내 말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스로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우려냄 없이 말씀을 전한다면 잘못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야고보 장로는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처음 접한 사람은 그 복음의 맛이 너무 좋기에 금세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 장로는 여기에 일단 제동을 겁니다. ‘지금 네가 전하려는 말씀은 네 안에서 우려낸 말씀인가 돌아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빈번히 만난 오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성도님들이나 목사님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십자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좋게 여겨집니다. 물론 십자가 복음을 듣고 좋음을 느끼는 것도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엄청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께서 십자가 복음 방송의 말씀을 듣고 좋아서 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말씀을 전해야 하는 당사자이기에 들은 십자가 복음 방송 말씀을 강단에서 다시 전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보신 목사님들의 반응은 거의 동일합니다. 교인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맨날 십자가만 말한다고 불평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십자가 복음을 들으실 때는 어떤지 물었더니 스스로는 분명히 똑같은 말씀임에도 날마다 새롭게 들린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귀에는 듣기 좋은 말씀인데 왜 교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고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말씀이 목사님 안에서 우려낸 국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은 태승철이라는 사람이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실제로 생활화하면서 우려낸 국물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목사님이 그것을 좋다고 느껴서 교인들에게 전하는 말씀은 목사님이 우려낸 국물이 아닌 상태입니다. 교인들에게 마치 생 사골을 주며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우려낸 국물로써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우려낸 국물로써만 전할 수 있습니다. 남이 우려낸 국물을 먹고 맛있다고 느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는 내게서 우려낸 국물이 아니라면 생 사골 뼈를 받아먹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짐승처럼 피가 묻어 있는 생 사골을 받자마자 물고 뜯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일반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들을 때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우려낸 하나님 좋음의 맛, 천국 현실감에 대한 맛을 느끼게 됩니다. 먹어보고 좋음이 느껴지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그대로 전하고자 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들은 말씀만을 전하는 것은 생 사골을 제시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자녀에게 십자가 사골을 먹이려면 먼저 부모가 십자가 사골을 잘 우려내야 합니다. 자녀들은 가정에서 십자가가 우러나는 모습을 통해 십자가를 대하게 됩니다. 부모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 좋음의 맛과 천국 현실감의 맛을 간접적으로 맛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품지 않고 생활화하지 못해서 십자가가 우러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골은 어느 정도 끓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지만, 십자가는 생활화할수록 깊이 우러납니다. 생 사골 같은 십자가를 전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 또한 이러한 바탕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의 마음이 십자가를 기억하고 생활화함으로써 십자가를 우려낸 국물을 전할 뿐입니다. 이러한 국물을 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좋은 맛을 알리고, 스스로 십자가의 국물을 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돈이란 가져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돈을 해결하는 방법은 돈을 졸업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우려냄으로써 하나님의 좋음을 맛볼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는 당장 좋음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돈을 졸업해야 한다는 표현 자체가 신기하고 신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말씀을 전하고 듣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맛을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맛을 느꼈다면 하나님의 맛이 우러나는 상황을 나에게서도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직접 생활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실제 생활 현장에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많이 갖는 것뿐이다.’라고 고백하기를 직접 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는 우러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생 사골로 놔두고 남이 우려낸 국물만을 먹으려고 한다면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개별적 친분은 쌓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들을 때만 좋을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실제로 하나님과 개별적인 친분을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성령님의 장갑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십자가를 우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나도 십자가를 우려내야겠다.’라는 마음을 먹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말씀을 전할 때 내가 십자가를 어느 정도로 생활화하여 우려낼 수 있는지에 대한 수준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제가 앞서 우려내면서 아직 덜 우려낸 분들에게 더 우려내세요. 더 우려내세요.’라고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음이 정말 대단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다른 사람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우려낸 국물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십자가 복음은 내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우려낸 국물로만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나는 말씀을 전하지 않아도 되겠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안에서 국물을 우려내지 않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서 십자가를 우려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개별적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십자가를 우려내서 하나님의 좋은 맛을 전하더라도 듣는 분이 실제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의 개별적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에서 그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 좋은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스스로 십자가 사골을 우려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골을 우려낸다면 그 국물을 다른 사람에게 퍼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도 야고보 장로가 말하기를 더디 하라 한 것은 말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이 우려낸 국물 맛을 보았다면 식당에서 먹은 음식 맛을 집에서도 내보려고 하듯이, 나의 삶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국물을 우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려낼 때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관계, 성령님과의 개별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고 실제로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국물이 우러나면 말씀을 전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절 마지막 절에서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합니다. 20절에서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내는 것은 스스로 삶의 핸들을 쥐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전개되거나 발전되지 않을 때 성이 납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이 내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들은 사람이 삶에서 성이 난다면 십자가를 기억하고 생활화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쉽게 말해 십자가를 우려내는 작업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성이 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우려낼 때 일어나는 가장 큰 특징은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우려냄이란 곧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모든 삶의 현장에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모든 사건 앞에서 죽은 자이기에 스스로 인생의 핸들을 잡을 수 없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낼 수도 없습니다.

이어서 21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십자가를 우려내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는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악이란 곧 스스로 핸들을 잡고 주권자의 놀음을 할 때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보면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심어졌다는 것은 이미 온유함으로 받은 것입니다. 즉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우려낸 국물을 받아먹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한 증언이 좋게 느껴졌다면 이제 온유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란 노예의 낮은 자세를 가리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주인이 명령하신 것으로 알고 지켜나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우려낸 말씀을 들었는데 너무 좋았다면 마음에 심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심어진 말씀에 대해서는 노예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처럼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라는 요청입니다.

22절 이하의 말씀들도 이러한 이해의 연장선상에서 펼쳐지는 내용들입니다. 경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이와 관련하여 혀에 재갈을 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혀에 재갈을 물리라 함은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 헐뜯는 말을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이 눈앞에 계시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앞에 계신 것처럼 느끼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스스로 우려내야만 합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제 앞에 계시다는 느낌으로 살면서 갖게 된 생각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립니다. 그러한 말씀이 맛있게 느껴진다면 맛보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대로 하나님이 눈앞에 계신 것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경건입니다. 그 방법은 내가 맛있게 먹은 국물이 십자가를 우려서 된 것임을 알고, 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사골을 우려내듯이 십자가를 우려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눈앞에 살아계신 것처럼 존재감을 느낄 수 있고, 실제로 천국의 현실감을 내 안에서 만들어 낼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좋음과 천국 현실에 대한 국물입니다. 그 국물이 맛있게 느껴졌다면 여러분도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국물을 우려내며 하나님이 실제로 눈앞에 계신 것처럼 좋음을 느끼고, 천국의 현실감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 장로는 바로 이러한 심정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라고 말했습니다. 우려낸 국물을 먹을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유보함 없이 주저함 없이 받아먹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맛을 깨달았다면 스스로 십자가 사골을 우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우려낸 국물을 다른 사람에게 퍼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전도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그 짙은 맛의 끝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씀을 들은 우리도 똑같이 그 맛을 끝까지 우려낼 수 있게 하여 주셔서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