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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후회목록을 있는 힘껏 늘려가는 삶_태승철

by 태승철 · 17-04-20 12:00 · 7,233
뉘우침을 통한 후회의 가치는 다시는 후회를 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후회할 일이 없기 위하여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열심과 최선이 나중에 보니 후회목록을 있는 힘껏 늘려가는 과정이었다면 어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후회를 피해 열심을 다하면 할수록 후회목록은 늘어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냥 열심과는 무관하게 사는 것 자체가 반드시 후회로 귀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왕의 후회를 계기로 후회 없이 사는 길을 생각해 봅니다.

후회목록을 있는 힘껏 늘려가는 삶

(에스더 2:1~4)

 

 

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2. 왕의 측근 신하들이 아뢰되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되

3. 전국 각 지방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으로 들여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손에 맡겨 그 몸을 정결하게 하는 물품을 주게 하시고

4.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를 와스디 대신 왕후로 삼으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겨 그대로 행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후회목록을 있는 힘껏 늘려가는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후회목록을 있는 힘껏 늘려가는 삶

우리가 후회를 하는 이유는 다시는 후회 없는 삶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열심을 내면 낼수록 후회의 목록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한 삶일수록 후회의 목록을 늘려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열심히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상관없이 후회는 운명적으로 찾아옵니다.

남자가 은퇴할 때에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은퇴남 천 명이 들려주는 은퇴 순간의 진실이라고 합니다. 천 명의 은퇴자가 무엇을 후회하고 있는가를 조사하여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제가 책을 본 것은 아니고 목차만을 살펴보았습니다만, 목차만 보더라도 공감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4부에 걸쳐 후회의 목록이 나오는데 1부가 정말 일밖에 몰랐구나.’라는 큰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그 중에 첫 번째 후회는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었더라면이라는 것입니다. 무미건조하게 일 밖에는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인생이 한창 때에 나만의 시간을 가졌었더라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일에나 최선을 다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최선을 다한 것을 후회하기까지도 합니다.

2부에서의 큰 제목은 나를 함부로 대했구나.’라고 합니다. 그 중의 첫 번째 후회는 나를 돈 버는 기계로 만들지 않았더라면라고 하고 또한 외로움과 좀 더 친하게 지냈더라면이라는 후회가 나옵니다. 외로움을 피해서 친구도 찾아보고 술도 마셔보고 이런 저런 일들을 했지만 시간 낭비였고 다 속절없는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급한 대박을 쫓지 않았더라면이라는 후회도 있습니다.

3부에서의 큰 제목은 나와 가족의 간격이 이렇게 넓었다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후회는 자식의 투자에 상한선을 정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은퇴남들의 스물다섯 가지의 후회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이 책의 제목만을 놓고 볼 때에 아직도 은퇴한 남자들이 진정으로 후회할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언할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스물다섯 가지를 후회했지만 이 후회함 자체를 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혹은 인생을 되돌려서 다시 살게 한다고 할지라도 이번에는 서른 가지로 더 늘어난 후회의 삶을 살게 될 것을 확언하고 예언합니다.

이처럼 후회는 운명적으로 인간의 삶에 따라오는 지독한 것입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딸이 연탄가스를 맡고 의식을 잃자 서대문의 적십자 병원으로 급하게 옮겨지게 됩니다. 의사가 보기에 이미 숨을 쉬지 않았기에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대로 시신이 냉동실로 옮겨지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딸의 엄마가 연탄가스에 의식을 잃으면 억지로 동치미 국물을 먹인 후에 땅에 엎어 높으면 하루 만에도 깨어나고 삼일 만에도 깨어난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적십자 병원에 데려가는 바람에 딸이 살아날 기회를 없앴다며 후회하면서 날마다 딸의 무덤에 가서 울면서 손톱으로 무덤을 긁습니다. 온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버린 상황을 본적이 있습니다. 후회에는 상실감과 아쉬움이 함께하기 때문에 이렇게 무섭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왕의 후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앞선 말씀에서 아하수에로 왕이 백팔십 일간 잔치를 벌인 후에 칠일 간은 일반 백성들까지 불러서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지 못해서 왕후 와스디를 백성들 앞에서 자랑하고자 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아람어 역본인 탈굼 성경의 주해부분을 보면 왕후 와스디를 면류관만 쓰고 벌거벗고 오게 했습니다. 아마도 아내의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와스디가 수치와 모욕감을 느껴서 어명을 거역하였고 그로 인해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을 보면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라는 구절로서 왕이 후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말에는 칼로 나무에 글자를 새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지금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속에는 와스디에 관한 일이 또렷하게 떠오른 상태입니다.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에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킨 것이 과한 행동이었음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재임 3년째에 잔치가 벌어지고 이후에 에스더를 왕후로 간택한 것은 BC 479년인 재임 7년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재임 6년째인 BC 480년에 그리스와의 전쟁이 일어나서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의 그 후에라고 하는 후회를 하는 시점을 고려해보면 백팔십칠 일 동안의 잔치가 끝나고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2년 뒤에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직후였습니다. 백팔십칠 일간 잔치를 할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때에는 왕으로서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잔치를 벌였지만, 지금은 패전으로 인해 상실감과 패배감에 젖어버린 상태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폐위한 왕후 와스디가 생각나고, 그 처분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던 것입니다. 자신이 내렸던 명령이 관례와도 상반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거부했다고 폐위를 시켰으니 그에 대한 후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후회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하여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간신들의 말대로 새로운 왕후를 뽑게 함으로서 와스디 왕후에 대한 후회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를 왕후로 삼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선민에 가까운 왕이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하수에로 왕의 악한 후회를 선용하셔서 에스더를 간택된 것이지 왕은 결코 선하지 못했습니다.

 

경우는 달랐지만 다윗조차도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 회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하수에로 왕처럼 후회하지 말고 다윗처럼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후회는 잘못했다고 뉘우치지만 여전히 악한 상태입니다. 와스디를 대신할 새로운 왕후를 찾았습니다.

은퇴한 직장인들이 돈 버는 기계로 살았음을 후회하고 일만 알고 살았음을 후회합니다. 그 시간에 악기라도 배워서 풍요로운 삶을 살았어야 했다고 합니다. 후회는 이 세상의 것으로 인한 아쉬움을 마찬가지인 이 세상 것으로서 대체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함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침 흘리면서 부러워할 모든 가치를 가진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가지면 분명히 마음에 만족과 기쁨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데 이것이 가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세상의 가치들을 다 누렸던 왕의 마음에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불균형이 생겨났고 왕의 포악함과 변태적 성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와스디를 벌거벗은 채로 대중 앞에 세워서라도 자랑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대중들이 부러워할 것이고 그 때에 혹시나 채워지지 않았던 마음의 빈구석이 채워질 수도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후회는 운명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신뢰하여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삼으려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악기 하나쯤 다룰 수 있었다면 삶이 풍요로웠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사람들은 악기를 다룰 수 있었어도 후회합니다. 다른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들에게 다 쏟아 부은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라면 다시 인생을 살더라도 또 후회합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가는 것이 후회로 나타나지만 이러한 방식에서는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 크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후회를 했으면 하나님으로 채워야 하는데 계속해서 이 세상의 다른 것을 모색합니다. 이것이 후회의 한계이고 악함입니다.

반대로 회개는 이 땅에 있는 어떤 것들로 기쁘고 만족하려 했던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도 회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마음에서 돈을 벌면 기쁘고 만족할 것이라고 여겨서 돈을 붙잡았습니다. 돈이 신이 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대로 돈이 잘 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돈을 못 버는 이유로 십일조를 안 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봉사충성 안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은 헌금 충실히 하지 않고 새벽기도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와 마음의 공백은 돈으로 채우려 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합니다. 헌금을 덜 하고 봉사충성 안 해서 돈을 못 버는 것을 회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돈을 벌어 만족하겠다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죽음을 먹는 회개가 없이 계속하여 후회를 하며 살아간다면, 결코 그 후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후회의 목록을 끝없이 늘려갈 뿐입니다. 진정한 후회는 죽은 후에 알 수 있습니다. 지옥이야 말로 후회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연탄가스를 맡고 죽은 딸을 두고 후회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심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절박하고 애절하고 불붙는 후회가 영원토록 지속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를 폐위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정한 가치를 손에 쥐고 있는 상태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이 기쁨과 만족을 줄 것이라고 믿고 추구하는 상태에서의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후회거리가 됩니다.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이 모셔져야만 합니다.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을 모신 상태에서의 생각과 판단과 말과 행동에만 후회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이 세상 것을 끌어당겨서 만족하고 기뻐하려는 세상의 신뢰를 함께하고 공감하고 동참하려는 기질과 성향이 나타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어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려는 기도와 간구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노력으로서의 기도와 간구가 없다면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후회하지 않으려 할지라도 후회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심으로서 생기는 판단과 생각과 행동만이 진리이고 기준이 됩니다. 그 외의 모든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은 후회를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보건대, 지옥에서 천당에 갈 수는 없지만 그곳을 볼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자가 지옥에 떨어졌을 때에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다시 돌아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처럼 살면 안 된다고 말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를 바라며 후회합니다. 그러나 그 후회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영화로우신 예수님과 천국의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일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져도 만족할 것도 없고 못 가졌다고 해서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하늘이 좋고 하나님께 빠질 수밖에 없고 좋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로서의 삶은 하나님을 사랑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다 놓친 자들이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만족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옥에 간 자들은 하늘에서 선민들이 하나님 품에 안겨서 영원 전부터 주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기쁨을 성령님을 통해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를 갈며 후회할 것입니다.

후회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중단하고 이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와스디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면서도 새로운 왕후를 뽑아 극복하려는 아하수에로 왕처럼 살지 않고, 세상 것을 후회해야 될 시점에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는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을 가지므로 후회의 감정을 극복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