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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_태승철

by 태승철 · 17-02-18 09:51 · 7,851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는데,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가 있습니다. 멀어지다 못해 끝내는 기도하는 바람에 아주 하나님과 격리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고 또한 모든 사람이 특별한 전제가 없어도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유일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길이기에 잘못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멀리 이끌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

(역대하 26:1~23)

 

 

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17.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20.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21.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22.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23. 웃시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는 나병환자라 하여 왕들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의 조상들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거리는 반드시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예수님이 기도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기도를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한 시간쯤 기도한 것 같아서 눈을 떠보면 십 분밖에는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않아서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면 반드시 증표가 나타나게 됩니다.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걱정과 근심이 산더미처럼 몰려옵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지구도 손가락으로 밀면 움직일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모든 종교에도 기도는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도 기도라는 책을 쓸 정도입니다. 또한 기도하는 것에는 특별한 전제조건이나 자격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에는 인간적으로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격이 아예 필요치 않는 것도 아닙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십자가를 붙잡은 자격이 없다면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우면 만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문제시 삼는 건강 돈 사업 자식 부부갈등 인간관계 등이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의 거리로 인해서 생겨난 것임을 절대적으로 확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없어지면 문제도 없어집니다.

기도의 백과사전이며 교본이라 할 수 있는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분의 책을 보면 스물두 가지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는 한 가지 뿐입니다. 구약으로 말하자면 성전 기도이고 신약에서는 십자가 기도입니다. 스물두 가지가 성경적으로 다 옳다면 십자가 기도는 그 스물두 가지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도 결국 주님께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것을 전제하시고 가르쳐주신 기도였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기도가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일까요? 멀어지다 못해서 아예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는데 이것을 밝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가장 강력한 길인데, 역으로 기도가 잘못 되었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강력하게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 제10대 왕 웃시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웃시야 왕은 통치기간이 무려 52년입니다만 부친 아마샤 왕과 24년을 함께 통치하였고, 나병이 걸린 뒤로는 아들과 함께 12년을 통치했기 때문에 혼자 통치한 기간은 16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웃시야 왕도 통치전반에는 선정을 베풀고 형통하다가 후반에는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징계의 심판으로 나병을 얻어 평생 여호와의 성전에서 격리되어 살다 죽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8대 요아스 왕과 9대 아마샤 왕과 10대 웃시야 왕 모두가 통치전반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정을 베풀었다가 이후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패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다른 점이 있다면 요아스는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고, 아마샤도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 후에 전리품으로 가져온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은 대내적으로 안정과 강성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잘못은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하려다가 저지당하자 제사장들에게 역정을 부렸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병을 얻게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음이 특이한 점입니다.

여기서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려 했다는 것은 거꾸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인데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성소 안에서 향을 피워드리는 분향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제사장이 분향을 하는 것은 선민들의 기도를 뜻합니다.

쉬지 않고 분향이 이루어지는 것은 쉬지 않고 기도가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즉 제사장이 향단에 향을 피워드리는 모습이 그대로 선민들에게 옮겨져서 기도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웃시야 왕이 분향을 하고자 했는데 오늘 본문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면 선민의 기도를 뜻하는 분향단에서의 분향을 제사장이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향은 제사장이 자기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선민들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곧 제사장을 통한 지도편달 없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전개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면 기도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기도가 도달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만 이런 기도를 고집한다면 끝내는 하나님과 격리되기 때문입니다.

성전 중심의 삶을 사는 선민들에게는 반드시 제사장의 지도편달이 따라야 기도가 기도다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온 나라 안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매 기도 때마다 지도편달을 받을 수는 없더라도 그 받은 내용을 기억하며 기도가 이루어져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훈수를 통해서 기도가 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의 문제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관적인 감정에 압도되기 십상입니다. 내가 느끼는 필요와 판단 또한 기분과 다급함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관적인 감정으로 기도를 드린다면, 이러한 기도는 드릴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제대로 드리기 위한 제사장의 지도편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웃시야 왕이 제사장들이 만류하는데도 분향을 하려고 했다는 것은 제사장의 지도편달 없이 자의적인 기도를 하려고 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에 나병이 걸려서 격리되는데 이를 오늘 본문 21절에서는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라고 표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지도편달 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 기도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하겠다고 달려들면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고 있다면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도를 하면 할수록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어떤 분들은 그러한 기도를 열심히 한 끝에 하나님과의 격리 수준에 도달한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들이 기도하려는 선민을 지도편달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함을 말하는 것일까요?

간단히 말해 기도하는 선민의 마음에 성전을 청진기처럼 가져다 대고 진단을 해주는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그 안에는 말씀의 돌판이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에도 지성소가 있습니다. 법궤 안에 인격적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가리키는 말씀의 돌판이 있었듯이,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와 있느냐를 체크해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는 그것을 가질 때에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생길 것이라고 믿어지는 존재들의 이름을 담게 됩니다. 제사장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체크했던 것입니다.

돈 문제로 건강문제로 기도하려는 사람이 있을 때에 제사장이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인지 체크해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지성소를 들여다보며 돈 때문에 울고 있는 상태에서 기도를 해보았자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뿐임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왜 걱정하고 기쁨이 사라졌는지 불만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이 들어와 있음이 밝혀집니다. 그것이 돈이고 건강이고 자식의 형통이고 취직이나 결혼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돈 건강 자식 등의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 담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손에 쥐지 못했기 때문에 불만은 생깁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았는데 내 손에는 돈이 없을 때 불만이 생기고 짜증이 나고 근심걱정이 생겨납니다. 그럴 때에 제사장들은 그러한 마음을 번제단으로 인도합니다.

돌판의 의미대로 말씀하시며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을 담지 못한 마음을 번제단으로 이끌어서, 어린양이 죽을 때에 그 마음의 죽음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분향단의 의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 하셨는데 이것이 곧 분향단의 의미인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으면 실제로 돈을 쥐기 위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건강이 있다면 건강을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온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실제 손에 쥐기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이것이 곧 분향단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지성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체크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면 그 자체가 죄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법궤 위 뚜껑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서 덮고 있는 속죄소가 있어서,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둘 때에 죄가 성립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을 두었을 때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 위해서 움직일 때에 다 죄악이 됩니다. 내가 살인하지 않았어도 간음하지 않았어도 도둑질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와야 하는 마음의 지성소에 다른 이름을 담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들 중에 죄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곧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신은 내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자식이 내 인생에 만족을 준다고 믿고 있다면 자식이 곧 신입니다. 이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분향단을 지나 떡상과 등대로 인도됩니다.

이전에는 돈이 없다고 울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건강 때문에 돈 때문에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서 죽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담았다면 이제 떡상이 의미하는바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배부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대의 뜻하는 바는 판단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고 있으면 좋고 나쁨의 판단의 기준이 돈이 됩니다. 건강을 담았다면 건강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와서 하나님으로 만족할 때에는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 것들을 밝히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인도해 나가는 과정이 없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분향과 기도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예외 없이 마음의 지성소에는 다른 것이 들어와 있고, 추구하는 단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함이 일어나고야 맙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우상시하는 것이고 바로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성소에서 진심으로 내가 신으로 대우하고 믿는 것은 다른 것인데 그 이름에 해당되는 존재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보다 더 큰 교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는 것이기에 이보다 더 큰 교만은 없습니다.

이처럼 분향단에서 직접 분향하려 했다는 것은 내가 이제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겠다.’는 결심이 드러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말리는 제사장들에게 웃시야는 오히려 화를 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나병이 생기고 그 당시의 나병은 격리되어야만 하는 병이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성전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격리되고, 비참하게 죽어서 왕들의 무덤에 묻히지도 못했습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돈 문제가 있습니까? 돈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돈의 이름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악 때문에 없어지는 것이 에덴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와 있으면 자연히 내 마음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추구하는 흡입력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는 기쁨의 에덴이 하나님에 의해서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삶을 허락받은 것은 그들이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죄는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을 집어넣는 것이기 때문에 죄의 상태가 극복되면 에덴의 삶은 저절로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이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가지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 그것들을 손에 쥐려고 하는데 쥐어지지 않으니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일 뿐입니다.

가지가지 문제는 문제가 아님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돈이 없는데 왜 걱정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걱정하지, 이 바보야!’라고 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면 왜 걱정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건강이 좋지 않으니 걱정하지, 이 바보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이상한 말입니다. 지금 내 수중에 돈이 없는 것과 그것을 문제로 여기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 배부르기 위해서 추구하기만 하면 돈이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닐뿐더러 문제로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제 나이를 먹으니 퇴행성관절염이 왔습니다. 그러나 관절염이 오든지 말든지 무시해버립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건강이 들어오는 것을 십자가를 보면서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몸이 아프고 다리가 부러져도 내 마음은 하나님 때문에 기쁠 수 있다고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고백하면서 십자가 붙잡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깜짝 놀랐습니다. 산책을 할 때나 소금강 계곡을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다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언젠가 또 아프겠지만 지금까지는 아프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병원에도 가지 말라는 말이냐? 병원에 가야 된다면 하나님이 가도록 환경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병원에 억지로 가지 않는 것도 독단(dogma)입니다. 독단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그것을 문제로 느끼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문제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십자가가 있지 않습니까? 먼저 마음의 지성소를 체크하고 십자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근심걱정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 따라 가는 것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어느덧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전개되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를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중단하게 하시고 십자가기도 하나에 평생 목숨을 걸고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