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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먼저 단절하라, 들으라, 말하라>의 줄거리 :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을 처음으로 대면하여 말씀을 듣는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이제 사무엘이 입 밖으로 내는 모든 말은 땅에 떨어짐이 없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이런 하나님 관계가 오직 사무엘에게만 주어진 일일까요?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 모두 다 이런 관계에 초대되었습니다. 사무엘의 하나님 관계는 세 단계로 정리가 됩니다. 먼저 세상과 단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상을 향하여 그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먼저 단절하라, 들으라, 말하라
(사무엘상 3:1~21)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사무엘이 세 번째 부르심을 받고서야 엘리는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다시 부르실 때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여호와의 네 번째 부르심에 사무엘은 올바르게 응답했고, 여호와께서는 대제사장 엘리의 집이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엘리의 부탁대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이후 여호와께서는 나타내시지 아니하시다가 실로에서 다시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내십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먼저 단절하라, 들으라, 말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먼저 단절합니다. 그러고 나서 듣습니다. 그러고 나서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남자아이가 성전과 관련된 의무에 참여하는 나이는 12세였습니다. 사무엘이 성막에 관련된 일들을 도맡아 하게 되던 때가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이러한 근거로부터 학자들은 당시 사무엘의 나이가 12~13세 정도였으리라 추정합니다. 한편,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면 언어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본문에 근거하자면 여호와의 말씀은 언어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상으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이란 환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드러내시고 전달하시는 것이 계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환상을 수단으로 삼으십니다. 환상이란 내 몸이 놓인 주변 상황과 차단된 상태에서 내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내 의식을 스크린 삼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영상처럼 투사하시는 것입니다. 몸으로 있는 물리적인 형편과는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극장에 가서 영화 볼 때를 생각해 봅니다. 깜깜한 극장 안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입니다. 밖에서는 비바람이 쳐도 극장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는 창문으로 비바람이 치는 것을 알 수 있기에 바깥과의 연결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 극장은 창문조차 없기에 외부 환경과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지고 관객들은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환상이란 우리 몸이 있는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내 의식이라고 하는 스크린에 하나님의 말씀이 영상처럼 비치는 상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네 번씩이나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이 음성도 우리의 고막을 울리는 물리적인 소리가 아닙니다. 물리적인 소리라면 엘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엘리가 98세나 되어 눈이 어두웠다는 표현은 있지만 귀가 어두웠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눈이 어두울수록 귀는 예민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무엘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득달같이 엘리에게 달려갔다는 것은 이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엘리는 98세가 되어 거동이 불편하여 필요한 일이 있으면 사무엘을 불렀을 것입니다. 엘리가 거처에서 사무엘을 부르면 성막 안에 머물던 사무엘은 늘 그 소리를 듣고 달려가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입니다.
엘리는 두 번이나 자신을 찾아온 사무엘을 돌려보내고는 ‘도대체 무슨 소리가 들렸다는 것인가?’라고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엘리는 세 번째 소리와 네 번째 소리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거리상으로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엘리가 부르는 소리를 사무엘이 들을 수 있었기에, 사무엘에게 무슨 음성이 들린다면 엘리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어떠한 음성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음성을 물리적으로 고막을 울리는 소리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의 의식 안에서 생생하게 들린 것은 외부와는 차단된 환상으로써의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1장 10절을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갇혀서 완전히 외부와 차단된 상태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들었던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은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상황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내게 들리려면 단절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직 사무엘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말씀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사무엘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환상과 실제 상황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이 들리는 것은 사무엘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여호와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셨고 엘리 집안에 내릴 심판의 결정 사항을 알려주십니다. 다만 이것은 사무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십니다. 당신이 세우신 뜻과 계획을 당사자에게 숨기시는 일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을 때를 기억해 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알려주시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 관심이 있었지 자기 미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들을 낳으리라 하셨고, 자손이 하늘의 별과 해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당신의 뜻을 말씀하시고 알려주시는 일에 적극적이고 굉장히 다정다감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14절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들려주시고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듣지 못하고 우리가 알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보려고 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할 때 하나님께 말씀을 해달라고 하고 응답을 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시고 있는데 정작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만 말씀하시고 제 말씀이나 좀 들어보세요.’라고 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기도라고 하는 일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21절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손을 벌렸음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의 현장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시장이든 학교든 놀이터든 여행지든 어디든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시는 한 항상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면서 나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다 갖고 계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대한 생각을 이미 다 정해두셨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이 한순간도 예외 없이 나를 향해 계속 말씀하고 계신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독백을 원치 않으십니다. 나를 향해 세우신 뜻을 알려주시고 대화하기를 원하시지 독백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1절의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라는 구절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꺼이 들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은 온 세상에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온 세상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희귀하다는 것입니다. 희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지구 위에서 80억 인구가 살아갑니다. 80억을 향해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은 말씀으로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80억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면 어떨까요? 버려지는 말씀은 세상에 차고 넘치는데, 받아들여지는 말씀은 너무 희귀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서 희귀하기 이전에 나 한 사람 안에서 희귀합니다. 하나님께서 24시간 들려주시는 말씀이 내 안에서 희귀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내 말씀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오감을 통하여 대상을 의식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며, 피부로 접촉하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오감을 통해 의식하는 것들에 마음이 가닿으므로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좋음을 흡수하기 때문에, 마음이 가닿을 때 저절로 좋고 나쁨을 판단합니다. 좋다고 판단하면 당기려고 하고, 나쁘다고 판단하면 피하려고 합니다. 이로부터 소원과 바람이 생깁니다. 그 소원과 바람이 뜻대로 안 되니까 걱정, 염려, 불안이 생깁니다. 불평불만이 생기고,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고, 질투가 나고, 미워합니다. 이러한 모든 감정들은 우리에게 생각을 자아냅니다. 이것이 내 말씀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대로 의식하는 모든 것들에 마음이 가닿아서 좋고 나쁨을 느낍니다. 그에 따라서 각종 감정의 발생과 더불어 생각이 돌아가니까 내 안에 내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루 종일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는 이유는 내 말씀에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만지는 대로, 냄새 맡는 대로, 맛보는 대로 마음이 반응합니다. 마음이 반응하면 감정이 나타나고 생각이 돌아갑니다. 그 생각이 전부 내 말씀입니다. ‘이래서 되겠어? 저래서 되겠어? 저 사람 나쁜 사람이다. 저런 정치인은 없어져야 돼. 우리나라가 중국 때문에 큰일 났다. 미국 트럼프가 우리나라를 괴롭힌다. 이거 안 좋다.’라고 온 세상 것을 듣고 볼 때마다 내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솔로몬은 20세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며 듣는 마음을 구합니다. 예배당에서는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것처럼 일천 번 헌금을 드리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만 일천 번제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20세 때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이제 나라의 모든 분야에 대해 알고 판단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라는 제사의 성질은 자기 죽음을 이루는 것으로써, 단순히 하나님께 일천 마리의 소를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 자기를 죽였던 것입니다.
왜 일천 번씩이나 자기를 죽여야 했던 것일까요? 속이 너무 시끄러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말씀이 일어나는 나를 일천 번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루 종일이라도 들려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루 종일 말씀하시는데 내가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솔로몬은 그 준비를 위해 자기를 일천 번 죽인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싸움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무엘은 젖을 뗀 후 성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12~13살이 되어 성막의 일을 도맡아서 하게 될 때까지 완전히 세상과 차단되었습니다. 사무엘이 태어난 후 자아의식을 갖기 시작한 후에 접한 물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하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있었고, 그 휘장 안에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휘장을 보면서 ‘이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휘장 앞에는 분향단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분향단은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배웠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떡상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떡상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배부름을 의미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등잔대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등잔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세상에서 말과 행동을 하여 빛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마음이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번제단에서 죽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짐작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에서는 5살부터 12살까지 율법을 암송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10살이 되면 생활 속에 적용하는 법을 가르쳤고, 12살이 되면 랍비와 마주 앉아서 대화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은 12살이 되도록 하나님에 관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성막에서 하루 24시간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기구들로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해당하는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내용을 살펴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12살이 되어서 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여겨질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 의식하는 것, 귀로 들으면서 의식하는 것, 손으로 만지면서 의식하는 것들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마음이 세상 것들에 붙은 상태에서 걱정, 염려, 불안, 분노, 시기, 불만으로 만들어진 내 말씀으로 가득 차서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들을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무엘 혼자 성막에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세상 것을 의식할 기회조차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은 들을 수 없습니다.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눈으로 의식하고 귀로 의식하는 것들에 마음이 가닿으면, 이로부터 좋고 나쁨의 판단이 생기면서 생각이 돌아갑니다. 각종 감정으로 규정되는 갖가지 생각들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말씀은 하나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주파수만 맞추면 라디오를 들을 수 있지만 정작 라디오가 없는 상황과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본문에는 참 희한하고도 잔인하게까지 여겨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가 가능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전체에 폭탄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직 사무엘의 의식 속에서만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들린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 대제사장 엘리 집안의 멸망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타락했는지 안 했는지의 관점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에게 엘리는 자기를 양육했으며 자기에게 일을 맡긴 대제사장이자 스승이자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첫 번째 말씀은 엘리 집의 멸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성막에서 세상과 단절되었던 사무엘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이 몸으로 제일 먼저 관계하는 대상을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엘리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엘리도 익히 들어 아는 바대로 가문의 멸망이었습니다.
이 원리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에게 멸망의 예언이 주어진 사건에 포인트를 둘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에게 주어진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왜 엘리에 대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무엘이 몸으로 만나는 첫 번째 관계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몸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듣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뜻을 나에게 계속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마음이 세상과 단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줍니다.
이와 관련하여 19절을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마음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의식함으로써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위되어서 하나님의 이름 외에는 의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성막의 기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고, 사무엘은 성막에서 그 상태를 유지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첫 번째 접촉의 대상이었던 엘리에 대한 말씀이 주어졌고, 다음 접촉 대상이었던 백성들과 나라에 대한 말씀이 주어집니다. 사무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훤히 뚫리듯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대로 말했고, 사무엘의 말들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 기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내려오십니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대상이 아닐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은 성막 안에서 세상과 단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무엘의 영향력이 확장되어 가는 모습이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라고 했습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였고,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남쪽 경계였습니다. 좁은 성막에 갇혀 살던 어린 사무엘의 영향력이 이스라엘 전역이라는 엄청난 영역으로 확장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무엘의 마음은 성막에 갇혀서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단절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빛과 소금은 성급한 마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세상 속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과 단절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과 단절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으로 내 의식의 스크린에 비칩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들려서 그대로 말하고 행동할 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가서 빛이 되어야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의 단절이 없으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과의 단절을 이룰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며 사는 삶이 세 단계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성막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의식이 완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포위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내 마음이 세상과 붙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내 말씀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극장에 들어가서 세상과 단절되어 스크린을 대하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세상과 단절될 때 내 의식의 스크린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됩니다. 세 번째로, 이제 비로소 내 의식의 스크린에 비친 대로 바깥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세 단계는 단절과 들음과 세상에 나가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단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단절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단절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안으로 내 마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이 철저해야 합니다. 단절이 철저하면 이제 삶은 기차처럼 레일 위를 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상태가 철저하지 않기에 세상과의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내 말씀이 들리게 됩니다. 걱정과 염려, 좋음과 나쁨에 대한 판단, 불안과 두려움, 짜증과 분노, 불평불만이 언어로 나타납니다. ‘뭐가 이래? 그 사람 때문이잖아! 대통령이 저러니 나라 꼴이 이렇잖아! 내가 잘 살 수가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말씀과 세상 말씀이 엉켜서 하나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리기 위해서는 마음이 세상과 단절되어야 합니다. 사무엘이 자아의식이 생길 때부터 성막 안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통해 자기 생각을 죽였던 것처럼, 내 말씀이 떠오르는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루에도 천 번, 이천 번이라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내 마음이 세상과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들리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은 환상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이 일 속에 담긴 의미가 이런 것이구나.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나.’라고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인식하면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누구한테 이야기하며 맞고 틀리고를 확증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십자가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들어가는 단절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의 단절, 내 몸과의 단절, 배우자와의 단절, 자녀와의 단절, 부모와의 단절, 형제자매와의 단절, 일에 대한 단절, 경제 상황에 대한 단절, 건강 상태와의 단절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모든 것과 철저하게 단절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것에 총력을 기울이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면 여러분은 24시간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실제로 경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단절하라, 들으라, 말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성막 같은 극장 같은 단절의 공간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째로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날마다 시마다 분초를 다투어 예수님 안에 들어가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완벽한 단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또렷하게 들리고 보이는 단계가 우리 삶에 지속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건강도, 재정도, 형통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한 단절만을 은혜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