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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최측근 되는 제1조건>의 줄거리 :
예수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기에 사는 동안 날마다 천국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친해지는 바람에 하나님의 측근이 되어야만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측근이 된 자들만 몸이 죽어서도 천국 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언제까지 천국 국외자(局外者)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까? 인생은 다름 아닙니다.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기간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내내 마음이 천국 국외자로 살면서 하나님과 거리를 두던 사람이 몸이 죽었다고 갑자기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 최측근이 되는 조건을 알아봅니다.
하나님 최측근 되는 제1조건
(레위기 21: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2.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3.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4.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10.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11.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12. 그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의 하나님의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본문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주검에 대해 지켜야 할 규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제사장에 관한 규례와 대제사장에 관한 규례를 각각 떼어내 두 차례에 걸쳐서 살펴볼 것입니다. 1~4절에는 제사장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고, 10~12절에는 대제사장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 최측근 되는 제1조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제1 조건이 있다면 제2 조건도 있습니다. 다만 제1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2 조건도 불가능하고, 제2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1 조건도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상호유기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기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된 순서대로 먼저 등장한 내용을 제1 조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제1 조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재는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의 직분은 없기에 우리와 무관한 말씀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근본 취지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이 글을 기록하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입니다. 당시 지구에 살던 사람들 중에서 하늘에 살아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최측근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제사장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모든 선민이 자신처럼 하나님의 최측근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측근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5대 제사입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통해 선민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하나님과 친해지고 최측근이 될 수 있도록 교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제사장은 대제사장과 함께 모든 선민을 하나님의 측근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먼저 스스로 하나님의 최측근이 되어야 했습니다. 한편,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임을 통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5대 제사의 의미를 완성하신 사건입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우리는 제사장이자 하나님의 최측근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는 강릉에서 1시간 30분 떨어진 태백영락교회에서 일일 사경회로 십자가 온라인교회를 대신했습니다. 어떤 말씀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첫 번째로 입 밖으로 내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일성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란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져오신 천국에 맞추어진 회개입니다. 십자가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것들은 예수님이 가까이 가져오신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마음을 묶어버립니다. 이러한 세상 것들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십자가 회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회개를 통해 날마다 천국으로 가서 할 일은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묶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면, 마음이 육체를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가 일어납니다.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냄이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마주하고 계시기에, 예수님의 몸을 입은 우리 마음도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늘로 올라간 우리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최측근의 모습입니다.
최측근이 있다면, 그보다는 못하지만 측근에 들어가는 자도 있을 것이고, 알기는 하지만 측근이 아닌 자도 있을 것이고, 아무 관계 없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중심되는 인물과의 거리나 제약으로 결정됩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마주하여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천국 일일생활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마주 보는 최측근으로서 하나님과 날마다 친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간단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복음에 대해서 다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제로 천국 일일생활권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친해졌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실제로 하나님과 친해졌는지 또 친해졌다면 얼마나 친해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제가 말씀을 전한 태백영락교회 성도들은 천국 일일생활권이라는 말 자체를 처음 접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친해져야 하고 하나님과 친해짐이 두터워질수록 하나님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나 하나님 재벌이 되자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처음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실제로 하나님과 친해지는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의 말씀이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본 적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날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들으며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십자가 가족들은 과연 얼마나 하나님과 친해졌을까? 얼마나 하나님의 측근다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백영락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제 하나님과 친해지는 출발점에 선 분들도 있을 것이고 말씀을 들었지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날마다 천국 일일생활권의 삶을 살면서 십자가로 회개하여 세상에 대해 죽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친해지는 과정을 겪은 지 수년이 흘러가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친해졌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최측근입니다. 또한 모든 선민을 하나님의 최측근이 되도록 이끄는 자들입니다. 우리 시대에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들의 직무에 담긴 영적 의미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최측근이라면 최측근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1조건은 주검을 만짐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음식물에 대한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규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때 음식물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낼 만큼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민족과 나라마다 먹는 음식이 다르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음식은 마음의 문제를 상징하는 요소입니다. 마음이 더러워질 때 하나님과 끊어짐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주검을 만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람의 주검을 만졌다고 해서 하나님과 마음이 끊어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검을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는 말씀도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주검, 다시 말해 시체란 살아있으라는 주권자 하나님의 명령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레위기에는 주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사람의 주검뿐만 아니라 레위기 11장에는 곤충이나 짐승의 주검에 접촉한 자도 하루 동안 부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9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사람의 주검에 접촉한 경우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일주일 동안 부정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주권자이자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은 24시간 땅을 향해 쏟아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주검이란 더 이상 주권자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지 않는 상태입니다. 죽은 대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끝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검과의 접촉이란 하나님의 뜻이 없는 일이나 대상과의 접촉입니다. 이는 곧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없는 일을 만든다면 하나님과 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7절에서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시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필이면 죽은 사람의 뼈를 언급하신 것은 주검의 의미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연결되지 않은 채로 어떤 대상이나 일에 대해 생각한다면 하나님 뜻에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썩은 시체를 담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행태가 그러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최측근인 제사장이 갖추어야 할 제1 조건은 주검을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검에 손대지 않음이란 나의 생각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을 상징합니다.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측근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측근이 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제1 조건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한 마음은 부활 승천하심을 따라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반복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측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루어질 때는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내 의식과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속성이나 특징이 지금 내 마음에서 생생하게 의식되는 상태가 하나님의 측근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보좌 우편에서 마주할 때 내 속에서 생생하게 의식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는 전능하심과 주권자 되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측근으로써 이것을 의식하고 느낄 때 몸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을 떠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믿든 못 믿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거부할 사람은 없습니다. 교리적으로는 다 알고 있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러한 사실이 마음에서 생생하게 의식되고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측근입니다. 마음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측근에게 나타나는 증거는 세상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몸으로 살고 있는 세상에서 당장 벌어지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측근이라면 생각이 하나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몸이 당면한 상황과 문제와 사람에 대해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시고,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이란 어떤 상황이나 문제나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나에 대한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면서 내가 마주하는 대상에 대해 뜻을 갖고 계시고 미리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돈 문제를 이미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하나님의 측근이라면 이 사실을 생생하게 의식합니다. 그리고 내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이미 생각하시고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를 계획하고 계심을 압니다.
얼마 전에 강릉을 방문하신 분께서 자녀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이와 함께한 지 35년이나 되었지만 때때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기에 참고 있지만 왜 그런 짓을 반복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간섭하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아이에게 뭐라고 하고 싶을 때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와 딸을 바라보고 계시고, 딸이 왜 그렇게 하는지도 알고 계신다’라는 사실이 입을 막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너 왜 그러냐?’라고 물어보려고 하다가도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측근의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자녀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반복하면 타박부터 했을 것입니다.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내려와서 마주하는 상황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면 이미 하나님의 측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몸으로 살면서 마주하는 대상과 사건과 문제에 대해 항상 바라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여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실지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측근이라면 이 사실을 생생하게 의식하기에 생각이 하늘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행여나 세상으로 갈려고 하다가도 나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을 떠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내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배회하는 것을 막는 기능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각이 세상으로 가는 것을 막는 장벽이 되어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측근이 된 상태에서는 내가 마주 보고 있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셔서, 나와 관계된 모든 대상들에 대한 생각을 미리 갖고 계심을 생생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아무 상관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내 몸으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이끌고 가시리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이 지점을 지켜낼 때 하나님께서는 내 몸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이용하셔서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면 내 생각 속으로 하나님의 뜻이 들어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 생각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오려면 내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측근이 된 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18장 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에 앞서 아브라함에게 그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 하는지 직접 알려주시고자 할 정도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측근이었던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항상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20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은 아버지를 언제나 떠나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생각 속에 행하시고자 하는 모든 뜻을 집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몸은 아버지가 넣어주신 뜻을 따라 움직이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검에 접촉하지 않는 하나님 최측근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제사장의 조건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특이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2~3절을 보면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육지친의 주검에는 손대는 것을 허락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제사장으로 살아갈 때 어쩔 수 없이 삶의 공간을 공유하고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이 그러합니다. 다만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하나님의 측근은 아닙니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남편은 하나님의 측근이지만 아내는 하나님의 측근이 아닐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대표적 대상이 가족이라는 골육지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생각하면서 주검에 손을 대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어서라도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같은 삶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주검에 손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일을 말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의 삶의 공간을 피하거나 떠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읽지 않은 5절을 보면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머리를 밀고, 수염 양쪽을 깎고, 살을 베는 행위는 애굽을 비롯한 당시 이방 민족의 풍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주검을 만지듯이 하나님의 뜻을 도외시하며 살아갑니다. 몸은 살아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상태는 시체 같은 상태에서 시체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때도 지켜야 일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원칙이나 풍습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아내는 하나님의 측근이지만 남편은 하나님의 측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선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남편은 이방인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뿐만 아니라 다양한 삶의 환경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대끼며 사는 상황을 피하지 말되 그들과 같을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남편과 함께 살아도 남편이 생각하는 원칙과 풍습을 따라서 살 수는 없습니다. 시체와 같은 사람들은 시체와 같은 일에 손을 대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때 나는 하나님의 측근 된 위치를 지켜내야 합니다.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상태를 지키며, 하나님께서 내 생각 속에 넣어주시는 뜻대로만 움직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함께 살아도 그들이 만들어 낸 시체를 다루는 것과 같은 세상의 원칙과 풍습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측근은 항상 생각이 하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 속에 하나님이 뜻을 담아주시는 대로만 움직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편, 대제사장의 경우는 골육지친의 장례조차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이것은 우리와는 무관한 말씀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사장이기도 하지만 대제사장이기도 합니다. 제사장과 대제사장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의 측근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두 단계 모습을 가르쳐 줍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제사장으로의 삶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상징하는 바는 지성소의 의미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차이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네 겹의 덮개로 덮인 성막 안에서도 법궤가 안치된 지성소는 휘장으로 구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안치된 지성소가 구분되었다는 것은 지성소가 세상과 끊어진 곳임을 의미합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듯이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갈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골육지친의 장례조차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측근의 삶은 지성소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동시에 대제사장으로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낮에는 가족이 거실에서 함께 있어도 밤이 되면 부부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제사장으로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가도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와 친분을 두텁게 함으로써만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며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최측근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그 문제에 대해 죽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따라 하나님을 마주하는 측근의 자리를 고수합니다. 그럴 때 문제에 대해 내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뿐입니다.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문제를 이미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심으로써 그 문제를 생각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측근이라면 이 생각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내가 마주 보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전능하시며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하나님께 묶여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 속에 넣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측근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이유는 우리 생각이 하나님 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늘 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생각이 세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벽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제사장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측근으로서 문제를 대하고 사람을 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 의미하는 대로 반드시 지성소로 들어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세상에 대해 죽어서 모든 관계를 다 끊어내고 하나님만 관계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마치 유체 이탈을 하듯이 내 몸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 전체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성소로 들어가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고 안식의 시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의 모든 관심을 죽이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정리해 봅니다. 제사장의 삶이란 하나님을 보고 있는 중에 삶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고, 사랑하여 생각하고 계심을 알고 내 생각을 하나님 곁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삶이란 세상에 대한 관계 자체를 다 끊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낮에는 거실에서 온 가족이 함께하다가도 밤에는 부부만 안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 중에 하나님만 대면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사장과 대제사장에게 주검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최측근이 될 수 있는 제1 조건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2 조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일을 만나든 어떤 어려움 속에 처하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나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최측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생각하려 할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마음이 절대로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 하나님의 최측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