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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神같이 될래? 王같이 될래?>의 줄거리 :
모세와 바로의 대결이 서서히 달아오릅니다. 그런데 이 대결이 특이한 것은 그냥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세는 신같이 되어 바로를 상대하고, 바로는 애굽의 왕으로서 모세를 상대합니다. 용쟁호투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모세와 바로의 싸움은 굳이 말하자면 신쟁왕투 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싸움에 대해 구경꾼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이 둘 중에 택일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하여야 합니다. 모세처럼 신같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나는 왕같이 됩니다. 그러면 본의 아니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神같이 될래? 王같이 될래?
(출애굽기 7:1~13)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2.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3.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6.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7.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이제 모세와 아론은 바로 앞에 나갑니다. 이에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달라는 모세를 도발하며 여호와가 강한 신임을 보일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모세는 아론으로 하여금 지팡이를 던지게 하고 지팡이는 뱀이 됩니다. 한편 이러한 모습을 본 바로는 애굽의 요술사들을 불렀고 이들 또한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학자들은 애굽의 요술사들이 최면제 같은 것을 사용하여 뱀을 뻣뻣하게 만든 후에 다시 움직이게 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이때 아론의 지팡이였던 뱀이 요술사들의 뱀을 삼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神같이 될래? 王같이 될래?’라는 제목의 하나님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시기에 앞서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여호와로 제시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지금도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판단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판단해서 좋아하는 것은 있게 하려고 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없게 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원초적이고 명백하고 간단한 요구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면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내가 판단하는 대로 좋아하는 것들을 있게 하려 하거나, 나쁘다고 판단해서 없게 하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고백 속에 들어있는 우리의 의무 조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와 상반되는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있게 하고자 하고 싫어하는 것은 없게 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틀림이 없이 살기 위해서는 신같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같이 되어 살거나 왕같이 되어 살 수 있을 뿐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앞세우신 모세와 애굽을 통치하는 바로의 대결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이라는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용쟁호투(龍爭虎鬪)라는 중국 영화가 있습니다. 용과 호랑이의 싸움이라는 이름처럼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두 고수가 누가 더 강한지를 겨룹니다. 모세와 바로의 대결을 용쟁호투에 대입해 보자면 신쟁왕투(神爭王鬪)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과 호랑이의 싸움이 아니라 신같이 된 자와 왕과의 싸움입니다.
본문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앞서 4장에서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아론에 대해서도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같이 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 중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만이 영원한 신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에게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더군다나 바로는 왕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바로를 마주할 때 왕인 바로가 신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효과 안에 놓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빈틈없는 밀착 상태를 유지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애굽의 바로 앞에서 모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모세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히 모세를 통과하여 바로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밀착해 있는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그렇기에 모세에게서 나오는 말은 ‘모세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있게 하시는 말’입니다. 모세의 행동 또한 ‘모세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있게 하시는 행동’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를 믿으며 산다는 것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있게 하시는 말과 스스로 있게 하시는 행동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하는 자가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있는 자에 의해서 있게 하신 말과 있게 하신 행동을 한다면, 내가 마주하는 사람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신을 마주하는 효과 안에 놓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신같이 되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 존재가 신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말과 행동의 기능이 신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10장 34~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는 말씀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입으로 말할 때,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신을 마주하는 효과 안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같이 되는 것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의 장자의 자리에 머물 게 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유일한 방식이 바로 신같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마주하고 있다면 단순히 배우자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상태에서 배우자를 마주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한다면 나는 배우자를 마주할 때 신같이 됩니다. 배우자 앞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장자라면 내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하시는 말과 있게 하시는 행동을 하게 되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신을 마주 대하는 효과 안에 놓이게 됩니다.
신같이 되기는 내가 약속의 명단에 있는 하나님의 장자로서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입니다. 그럴 때 나를 만나는 사람은 대박이 나든 쪽박을 차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대박과 쪽박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모세는 신같이 되어 바로를 마주합니다. 바로는 대박이 아닌 쪽박을 찬 대표적 경우입니다. 바로가 쪽박을 찬 이유는 완악함 때문입니다.
바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자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자기를 있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저항합니다. 그리고 바로의 저항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바로에게 있어서 애굽이란 통치의 영역입니다. 바로의 입장에서 애굽이란 자기가 판단하여 좋다고 하는 것을 있게 하는 곳이고, 자기가 판단하여 나쁘다고 하는 것은 없앨 수 있는 곳입니다. 이것이 왕으로서 사는 자들의 완악함입니다.
온 세상에는 스스로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은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유독 인간만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면서도 스스로 판단하여 좋고 나쁨을 결정합니다. 좋다고 판단하는 것은 있게 하려고 합니다.
나무는 스스로 판단하여 좋다고 여기는 것을 있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싹이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있게 하려고 말하고 행동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식물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자, 코끼리, 표범 같은 동물들도 자기의 판단대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있게 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태어나 철이 들면서 죽을 때까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있게 하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곧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없게 하려고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병이 났으면 어떻게 하든지 없게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없다면 어떻게 하든지 있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완악함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갑자기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미 충분히 완악한 상태였습니다. 완악함이 늘 나타나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갑자기 완악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미 충만하던 완악함을 자극하셔서 밖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가 보인 완악함이란 스스로 있는 자가 있게 한 세상에 살면서 왕의 자리에서 원하는 것은 있게 하려 하고, 원치 않는 것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바로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애굽의 왕으로서 원하는 것을 있게 하고, 원치 않는 것을 없게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 완악함을 수미산처럼 쌓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와 같은 왕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있는 자 앞에서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있게 하거나 없게 하려는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바로와 똑같은 문제가 우리에게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모두 삶에서 작게나마 바로 같은 왕이고자 합니다. 내 삶에서 원하는 것은 있게 하려 하고, 원치 않는 것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세상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동안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을 때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불행은 전부 완악함에서 나옵니다. 완악함이란 스스로 있는 자에 의해서 있게 된 것을 내가 판단합니다. 내가 판단하여 좋은 것은 있게 하고, 나쁜 것은 없게 하려는 상태가 완악함입니다. 본래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안 좋다고 판단하는 것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필요한 것들을 있게 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완악함 때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에 의해서 있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 대해서 있게 하거나 없게 하려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고야 맙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드러날 수 있는 바로와 같은 완악함입니다.
모세와 바로의 대결에서 우리는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편에 서서 신같이 되든지, 바로의 편에 서서 왕같이 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사람은 그저 사람답게 살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신같이 되거나 왕같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왕같이 됨이 완악함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있게 하시고 없게 하시는 주권을 발동하고 계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시고 이끌고 계시는 세상에서 살 때는 신같이 되거나 왕같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왕같이 되는 것은 완악함을 전제로 합니다. 왕같이 된 자는 완악한 자이며, 완악한 자가 왕같이 됩니다.
사람은 본래 신같이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자로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있게 하신 말이어야 합니다. 내 몸을 통해 나타나는 행동도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있게 하신 행동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고 내가 하는 행동은 왕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왕같이 됨이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있게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없게 하려는 완악함을 부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지구의 80억 인구는 전부 완악하여 바로의 편에 서서 왕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모세의 편에 서서 신같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말과 있게 하시는 행동만을 하는 것이 오히려 쉽습니다. 스스로 있게 하심을 거슬러서 완악함을 부리며 내가 따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로 있게 하고 없게 하려고 하는 편이 힘듭니다. 이것은 마음이 편할 날이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감사가 나오지 않고 평강이 없다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은 있게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없게 하려는 완악함 때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에 의해서 있게 하신 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까? 왜 그렇게 있게 하려 하고 왜 그렇게 없게 하려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완악함 때문입니다. 완악함 때문에 바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의식에서 천국을 켜놓는다면 신같이 되기는 쉽습니다. 문제는 의식에서 천국이 꺼져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고 백날 말해봐야 의식에서 천국이 꺼져 있다면 마음은 하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의식에서 천국을 켜놓아야 예수님이 가신 방향성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방향을 따라 의식에서 천국을 켜놓고 살면서 내 마음은 신같이 됩니다. 천국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주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천군 천사가 있고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 땅에 태어났다 떠난 모든 믿음의 선조들이 아버지 품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이 천국을 의식에서 켜놓아야 예수님 몸을 입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의식에서 천국을 켜놓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으면 내 마음은 하나님과 밀착됩니다. 신같이 됨이란 그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주어지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 상황은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있어야 되느니 없어야 되느니 생각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있는 것은 더 가지고 싶어 하고, 없는 것은 있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왕같이 완악함입니다. 돈을 있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건강을 있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공과 형통을 있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기준의 실패와 불통을 없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상태를 없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건강이 안 좋은 상태를 없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천국을 켜놓고 살면서 하나님의 있음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있게 하시는 말과 있게 하시는 행동을 하며 살게 됩니다. 또한 주어지는 상황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황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귀의 가르침을 받은 세상의 판단으로 보기에 불평불만이 생겨서 있게 하려 하고 없게 하려 할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이러한 마귀의 판단을 십자가에서 제거하고, 의식에서 천국을 켜놓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지속한다면 있게 하신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실패에도 이유가 있고, 불통에도 이유가 있고, 아파도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싫어해서 없게 하려는 일들이 이유 있는 은혜임을 알게 되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장자이자 신같이 된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모세가 아론에게 지팡이를 던지게 하자, 그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여 바로의 요술사들의 뱀을 삼켜버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알아볼 수 있는 증표로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이것은 모세로서도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알아보는 암호 같은 증표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뱀 표적, 나병 표적, 피 표적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지팡이를 던지자 뱀으로 변한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애굽에서 뱀은 왕권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바로의 왕관에는 코브라 형상이 있습니다. 모세와 바로의 대결에서 아론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여 바로의 요술사들의 뱀을 삼킨 사건은 신같이 된 모세가 바로의 왕권을 압도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는 이제까지 자기의 권력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전대미문인 하나님의 권력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바로의 권력은 하나님의 권력 앞에서 속수무책이 됩니다. 모세의 지시를 따라 아론이 지팡이를 던지자 뱀으로 변하여 바로의 요술사들의 뱀을 삼킨 사건은 앞으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입장에 서는 신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자는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입니다. 사람은 신같이 되어 살지 않는 한 바로의 편에 서서 왕같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왕같이 되었다면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다스림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예수님 안에서 마음이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를 유지하는 장자라면 신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신같이 된 자가 아니라면 마귀의 권세 아래에 있는 바로의 자손입니다. 나와 아무리 친한 사이에 있을지라도 영적인 관점에서는 모세와 바로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등장하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장자다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장자라면 신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세상 사람은 바로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신같이 되어서 하나님의 권세로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권세를 항상 이겨야 합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모세와 바로의 대결입니다. 신같이 되어 마주하느냐 왕같이 되어 마주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왕같이 된다는 것은 완악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세상에서, 스스로 있게 하고 스스로 없게 하려는 완악함을 드러내는 왕의 입장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약속의 명단에 들어있는 자들은 장자다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간격을 없앰으로써 신같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처럼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예속되어 왕같이 된 자들 앞에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말과 있게 하시는 행동만 하는 신같이 된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를 이기는 자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서 상대가 끝까지 완악함을 유지한다면 바로처럼 쪽박을 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완악함을 깨닫고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신같이 되고자 한다면 대박이 난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이고 이웃이고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로서 신같이 된 나를 만나는 동안 대박이 날 것인지 쪽박을 찰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신같이 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시는 말과 있게 하시는 행동을 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없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죽어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의식에서는 반드시 천국을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에서 천국이 켜져 있지 않는 한 십자가 생활화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 땅의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 상태를 죽이는 일을 무한 반복하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신같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반복되는 고된 여정이 되어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순간에도 하늘에서 아버지와 주님과 성령님께서는 교통하고 계십니다. 내 마음은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하심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마음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간격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마음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밀착을 이룬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신같이 됩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일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말과 하게 하시는 행동을 하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바로의 완악함을 따라서 왕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있게 하고, 내가 없게 하는 동안 감사는 없어집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바로처럼 살아갑니다. 신같이 되지 않는 한 죄와 저주의 체질 때문에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정복되고 장악되어서 왕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실패는 없어야 하고, 불통은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좀 아픈 것도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몸이 아픈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젊을 때도 아프고, 나이 들어가면서 계속 아플 것입니다. 이것을 천국 갈 날이 다가오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있게 하려 하고, 있는 것을 없게 하려는 것은 완악함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완악함은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성향이 아닙니다. 아주 착하게 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사람도 완악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없는 작은 것에 대해 있었으면 바라고, 자기가 싫어하는 작은 것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완악함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세상에서 눈곱만큼이라도 내가 있게 하거나 없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완악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완악함의 반대는 유순함이나 착함이 아닌 감사입니다.
이제 성탄 시즌입니다. 내가 의식에 켜놓은 천국으로 마음이 갈 수 있는 길을 만드시기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고, 이보다 더 기쁘고,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이게 있으면 이 땅에서 신같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신같이 되어 살거나 왕같이 되어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신같이 되어 사는 자들의 마음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왕같이 되어 사는 자들의 마음에는 완악함이 있습니다. 신같이 되어 사는 자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왕같이 되어 사는 자에게는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주님이 계시고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 마음이 이 땅에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밀착함으로써 누구를 만나든 무슨 문제를 만나든 하나님에 의해 있게 하시는 말과 있게 하시는 행동을 함으로써 신같이 되어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신같이 되어 살거나 완악함을 충만히 품고 왕같이 되어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며 신같이 되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대박 나게 하시고, 완악한 자는 자기 운명이 쪽박인 것을 분명히 깨달아 하나님을 만나는 효과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