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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잠언의 ‘자기계발서 무용론’_태승철

by 태승철 · 18-04-24 09:38 · 6,421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적합한 자기 자신으로의 변신을 꾀하려는 것이 자기계발서를 쓰고, 읽는 핵심적인 취지입니다. 성공을 위한 율법서인 샘이지요. 그러나 잠언은 이러한 자기계발서의 무용론을 선언합니다. 좀 더 내용을 확장 적용하자면 세상의 모든 성공론의 무용성으로도 적용이 가능하지요. 요약하자면 사람은, 혹시 가능해서, 어떠한 자기로 변화를 하든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절대로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겁니다.

잠언의 자기계발서 무용론

(잠언 16:1~33)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잠언의 자기계발서 무용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잠언의 자기계발서 무용론

발명왕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서 천 번 이상의 실패를 거듭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웬만한 자기계발서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그의 친구가 실패할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에디슨은 실패는 일을 진행해가는 과정이야. 나는 실패할 때마다 전구를 만들지 못하는 방법 하나를 발견해 성공하는 것이지. 이렇게 나는 늘 실수에서도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거든.”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실패는 안 되는 길을 발견해내는 성공이라는 말이 참 멋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에디슨은 실패에 대한 독특한 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패를 성공의 과정으로 여겼기 때문에 천 번의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고 결국 전구를 발명해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에디슨이 어떻게 말했든지 에디슨은 정작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자신의 배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경험적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에디슨은 실패를 성공의 과정으로 여겼다기보다는 전구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천 번을 실패해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마음은 전구 발명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어떤 장애나 방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는 이유도 에디슨처럼 실패에 대한 독창적 이해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마음이 그 일에 대해서 강렬하게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로잡히다라는 말은 잡히다라는 말의 피동사입니다. 이 피동태의 상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디슨은 이것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자기계발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계발서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적합한 모습으로 변신을 꾀하게 하는 지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사로잡힘이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자기계발서가 주장하는 변함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가져보아야 합니다. 지침대로 행하면 변하기는 합니까?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그 지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자기계발서를 읽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1절에서 자기계발서 무용론의 대원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의 응답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개역개정성경의 의미는 모호합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을 참고로 인용해봅니다. 표준새번역에는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에서는 계획은 사람이 세우고 결정은 야훼께서 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번역들을 참고로 하면 본문 1절의 말씀이 보다 명확해집니다. 마음으로 계획을 세울 수는 있지만 그 성공여부는 여호와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실제상황과 연관된 영적 팩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적 팩트란 영이신 하나님과의 연관성 안에 포함된 사실입니다. 이것을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러한 실상을 중립적으로 짚어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소원하는 대로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해갑니다. 이것을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라고 표현했습니다. 보편적으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계획대로 이루고 훨씬 많은 사람들은 계획이 실패합니다. 그런데 대체 왜 실패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성공하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당연시 되지만 실은 이유가 있습니다.

1절 말씀대로라면 자기계발서를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변화하든지 일의 성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에게 가서 그 비결을 배우고 익힐지라도 소용없습니다. 벤치마킹하고 사회적 흐름을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해도 소용없습니다. 자기계발서 무용론 정도가 아니라 계획의 무용론이 등장할 만합니다. 합리적이고 적절한 계획일지라도 그것이 내가 세운 계획이면 성공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철저한 준비를 할지라도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아니면 뭐라도 해야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든 말든 할 테니 일단 해봐야 할까요? 이 구절만으로는 완성된 교훈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어떨 때에 성공을 주시고 실패를 주시는 것일까요? 내 생애에서 실패가 더 많았다면 왜 그랬는지, 혹은 성공이 있었다면 왜 그랬는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기준이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의 답이 2절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잠언은 산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과 절이 연관성이나 맥락에 의해 묶여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발적으로 나열된 것 같은 구절들의 배후에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다. 개별적인 것 같은 구절들을 깊이 살펴보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절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절에서 나온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계획하든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성패를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 결정의 판단 기준은 내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 행위가 나오게 된 나의 마음의 상태를 보십니다. 특별히 깨끗한지 아닌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라는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여깁니다. 불법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문제되지 않으니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적법성을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깨끗하냐 아니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십니다.

나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는데도 계획이 성공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4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라고 하셨습니다. 26절에서도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라고 하였고 28절에서도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29절을 보면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라는 합당하지 못한 일들인데 성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일들인데 성공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차라리 실패가 나은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라는 2절 말씀을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곧 마음이 하나님만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청결과 더러움은 상대적입니다. 두 가지 물건이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에는 모두 깨끗하지만, 서로의 자리를 벗어나 섞여버린 상태를 더럽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다가 음식이 옷에 묻으면 더러움이 발생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러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믿어져야 되고, 그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 마음입니다. 이것이 깨끗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것들 중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대상을 마음에 담는다면 더러움이 발생합니다.

돈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돈을 붙잡는다면 더러움이 발생합니다. 건강이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더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의 형통을 나의 기쁨과 만족으로 여길 때에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목사님들에게 예배당이 그럴 수 있습니다. 예배당은 더럽지 않지만 예배당을 지어야만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면 마음은 더러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상태에서 계획과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사회적으로는 합법적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마음이 더럽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기준 삼아 실패나 성공을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더러움의 상태에 내버려 두실 때에 세상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히려 실패가 많을수록 하나님께서 내 마음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신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더러운 마음의 상태에서 생겨난 계획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큰 저주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좋은 경우가 확률적으로 많습니다. 이것을 확률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우리의 계획과 소원이 더러움으로부터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는 성공보다 실패가 더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3절에서 그 해답이 나타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계발서 무용론의 완결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 말이 표면적으로는 쉬운 것 같지만 그러나 속을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주석서들조차도 히브리어 원어를 다 설명해 놓고도 완전한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절 말씀은 언뜻 보기에 내가 하려는 일들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그 계획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1절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말씀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립니다.

예를 통해서 3절의 오해를 이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부가 창업을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속에는 경영에 대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둘이서 하지만 5년 내에 직원 10명이 필요한 규모로 사업을 확장시키고자 합니다. 이제 그것을 3절 말씀의 표면적 의미대로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됩니까? 대체 어떻게 맡긴다는 것이고, 맡긴다면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확장시켜 주신다는 것입니까?

은행에 돈 빌리러 갈 때에 하나님 돈 빌리게 해주세요. 대출담당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됩니까? ‘오늘 손님이 많이 오게 해주시고, 우리가 만든 음식을 입에 넣을 때마다 맛있다는 감동이 생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됩니까?

1절과 2절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3절을 바르게 해석해보도록 합니다.

먼저 맡기다라고 번역된 부분의 원문은 히브리어로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굴려서 내던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파른 경사에서 바위를 굴려 떨어뜨리듯이 나의 계획을 버리는 것이 곧 여호와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 나의 마음속에 품은 소원과 계획을 산에서 바위를 굴려버리는 것이 여호와께 맡기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commit(위탁)이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원문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탁은 여전히 내가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이용하여 성취하려는 방법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이 의미하는 것은 완전히 손 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청결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청결은 내 마음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과 창조주이심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맡기라는 것은 곧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는 앞 절의 말씀과 상통합니다. 하나님만으로 기쁘고 만족해야 할 마음을 왜 어울리지도 않는 세상일에 몰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더러워진 마음을 가진 채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드러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이 더럽다면 행위 속에 기도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시지 않습니다. 마음을 깨끗하기 위해서는 기쁨과 만족을 위해 수행하고자 하는 일들을 절벽에서 바위를 굴리듯이 굴려버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연관성 자체가 깨어집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마음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이 하실 일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 일을 실패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를 버리셨다면 그 일을 성공케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에서 실패가 많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실패가 많은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3절 하반부를 보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영이란 생각과 계획입니다. 나의 계획을 절벽에서 바위를 굴려버리듯이 버렸는데, 더 이상 무슨 생각과 계획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앞선 말씀을 상기해봅니다. 마음이 더러운 상태에서 나온 모든 계획은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에게서 나온 모든 계획을 버림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매일 십자가에서 죽어서 더러워진 마음을 주님의 보혈로 씻어내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주님의 보혈로 청결해지면 하나님께서 들어오시는데 이것이 십자가 복음에 걸려 있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오시면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고 이때에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3절 하반부에서 말하는 네가 경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이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을지라도 이론적으로나마 나의 신앙적 고백이 분명히 살아있다면 마음은 이러한 상태로 이끌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과 만족이시다. 그런데 내 마음이 여전히 세상을 원하고 있으니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십자가를 붙들어야만 한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바라지도 않았던 세상에 대한 생각과 계획이 하나님을 통해서 전해져옵니다.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굴러 떨어뜨린다는 표현이었듯이, 마음에서 나의 계획을 버려서 청결하게 만들자 하나님의 계획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어진 계획은 무조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영이 나의 생각과 계획을 점령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이러한 진실이 있기에 오늘 제목을 자기계발서 무용론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계발서를 읽고 싶다면 읽으세요. 그러나 그것을 읽고 나를 변화시킴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 원하는 성공을 똑같이 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잠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어지는 4~9절을 보면 오늘 살펴 본 1~3절을 보충하는 내용들이 나타납니다. 여러분도 이 1~3절 말씀을 기준삼아 묵상하시며 은혜 받은 일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내가 지금 해야 되는 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깨끗한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사람이라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 일에 대해서 죽으셔서 마음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어떤 계획과 소원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나를 사랑하심으로 오직 실패만을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 일에 대해서 죽고 마음에 깨끗함을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실 것이고 더는 내 경영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계획과 소원은 결국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이미 기쁨과 만족을 얻은 자에게 이 세상이 더는 경영의 영역이 아니게 됩니다. 사업은 물론이고 자녀를 키우는 것이나 건강조차도 나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내 주머니에 들어와 있는 돈을 쓰는 것조차 나의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계속해서 붙잡을 때에 하나님으로 만족함은 이루어지고, 그럴 때에 하나님의 경영이 시작될 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와 보면 어떤 자기계발서를 읽고 어떻게 나를 변화시킬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대로 행해서 사회적 기준으로는 범법이 없는 삶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마음이 더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패로 임할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성공하도록 방치하실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내 계획과 소원이 나오게 된 마음 상태를 깨끗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 모든 일을 관계함이 마음에서 굴러 떨어지게 하셔서 하나님의 경영만이 나의 마음의 계획과 소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