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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가까이 하기엔 아직도 먼 하나님_태승철

by 태승철 · 17-12-09 11:51 · 6,258
주홍같이 붉은 죄가 흰 눈처럼 사함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 보좌로 담대히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고 믿고 고백하고 있지만 실상은 아직 조금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움의 증거는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함입니다. 이런 가까움의 증거들이 나타나지 않음은 우리 영성의 구조적인 문제에 이유가 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가까이 할 수 없게끔 굳어져버린 우리 마음의 태도입니다.

가까이 하기엔 아직도 먼 하나님

(시편 75:1~10)

 

 

1.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2.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3.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가까이 하기엔 아직도 먼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가까이 하기엔 아직도 먼 하나님

제게는 얼굴도 모르는 외삼촌이 계셨습니다. 외가의 장남이셨는데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어머니가 계시는 창녕으로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아는 사람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말리다가 한 사람이 휘두른 장작에 머리를 맞고 젊은 날에 돌아가셨습니다. 싸움을 말리려고 했는데 편을 드는 것으로 오해한 사람이 장작으로 내리쳤다고 합니다. 말리다보면 어쩔 수 없이 어느 한 쪽을 강하게 제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지당하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편을 드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외삼촌은 형제들 중에서도 인물과 인품이 뛰어나신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런 장남을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잃게 되자 외할머니가 거의 미치다시피 하셨다고 합니다. 그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런 싸움판을 염두에 두고 오늘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가 흰 눈 같이 사함을 받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가까이 갔다는 증거가 보이질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그 증거는 항상 기쁨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하늘나라에서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을 잠시 보았을 뿐인데 온통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산 아래에서 평생의 과업으로 여겼던 모든 꿈과 비전과 동료들과 가족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변화산 사건에서처럼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뵐 수는 없지만 성령님을 통해서 똑같은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타나는 일은 항상 기쁨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느낄 때에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회사 사장이 쉬지 않고 돈 버는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기 때문에 이 땅의 문제들에 대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는 이러한 일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영성이 잘못된 형태로 굳어져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성의 구조가 잘못 형성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 도와주세요. / 하나님! 이루어주세요. / 하나님! 구해주세요.’라는 기도에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예외 없이 우리는 처해있는 상황이나 사람 혹은 문제나 과제를 가지고 멱살잡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씨름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저의 외삼촌이 싸움을 말리려던 현장처럼 하나님을 부를 때에 우리는 무엇인가와 씨름하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로 씨름하던 중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돈 문제를 때려눕혀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뜯어 말리시는 일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상담을 합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형이 다 차지하려고 하니 예수님께서 개입하셔서 공평하게 법대로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14절에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15절에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탁하러 온 사람의 마음이 유산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을 보시고 뜯어 말리셨던 것입니다. 개입하셔서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공평한 해결을 해주시지 않고 다만 문제로부터 뜯어 말리셨습니다.

암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건강문제와 씨름하는 나를 뜯어 말리십니다. 건강 문제를 끌어안듯이 하나님을 끌어안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을 몰랐던 우리는 싸움을 말리려는 사람을 편드는 것으로 오해해서 때려죽인 사람처럼 하나님을 밀쳐냅니다. 말리시는 하나님은 밀쳐내고 문제를 때려눕혀줄 하나님만을 계속해서 불러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종교의 신들은 그렇게 해준다고 여길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내가 멱살 잡고 있는 문제들을 공격해서 때려눕혀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문제들의 멱살을 잡고 있는 나를 뜯어 말리시고, 멱살 잡던 힘으로 하나님을 끌어안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질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리시는 모습이 구약에서는 성전의 존재로 드러났습니다. 성전은 이 세상의 문제로 씨름하던 선민들을 뜯어말리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십자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문제나 과제와 멱살잡이를 하게 되고, 뜯어 말리시려는 하나님께 장작을 휘두르는 셈이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문제를 끌어안고 싸우는 나를 뜯어 말리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끌어안던 힘으로 하나님을 끌어안을 때에 하나님을 가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하나님의 도움은 끝납니다.

그럴 때에 남은 돈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로 둔갑합니다. 나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을 끌어안으면 우리의 마음은 변화산의 베드로처럼 이 세상에 대한 요구사항이 사라집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습니다. 이 거리를 가깝게 하려면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가까이 해야만 합니다.

본시는 레위인이자 성가대원으로 성전에서 일하던 아삽 자손이 쓴 시로 히스기야 통치 1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려고 진을 친 위기상황입니다. 결과적으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응답하셨고, 산헤립의 군대에 하나님의 사자가 임해 십팔만 오천 명이 멸절 당하게 됩니다. 또한 산헤립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두 아들에게 살해당합니다.

본문 2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오늘 시는 이러한 결과적인 승리가 주어지기 이전에 쓰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믿음이 더욱 대단합니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재판을 해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삶의 현장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의미의 심판입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의 공격이 아주 교만하여 하나님을 모욕하며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인은 산헤립을 단순히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심판 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은 하나님의 실질적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시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은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주의 이름이 가깝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주석가들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개입하실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굳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한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시는 우리가 서두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이미 앗수르 군대의 잔인함과 광폭함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죽이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십팔만 오천 명이나 됩니다. 마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모여들어서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직전입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모욕적인 내용의 편지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왔습니다. 이 소문이 온 예루살렘에 퍼졌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산헤립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백성 전체가 산헤립이라는 이름과 멱살잡이를 하고 씨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히스기야는 자신과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는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시인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히스기야 왕의 마음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시를 지었던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편지를 펴놓고 기도를 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의 장소가 궁전에서 성전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위기에서도 성전에서는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번제가 드려지는 성전에서 편지를 펴놓고 기도한 내용을 보면 히스기야 왕의 마음이 뒤집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왕에게 이입하고 있었던 시인의 마음도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라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생각하기 위해 반드시 그 이름으로 생각을 합니다. 자녀나 배우자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도 그 이름이나 이미지를 통해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까워졌다라는 것은 산헤립이라는 이름으로 멱살잡이를 하던 히스기야가 성전을 통하여 마음을 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이름이 가까워진 것을 감사하는 이유는 성전이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이 가까워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산헤립을 붙잡고 있을 때에는 산헤립이 가장 가까운 존재입니다. 종합격투기 선수들이 링 위에서 싸움을 할 때에 서로 뒤엉키면서 극도로 가까워집니다. 돈 문제로 인해 씨름을 하고 있다면 돈이라는 이름이 내게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기도를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붙잡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측면이나 후방에서 문제를 공격해서 때려눕히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영성 구조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가 없습니다. 링 위에서 선수들이 엉켜있을 때에는 설령 링 밖에서 애인이 구경하고 있더라도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것은 지금 엉켜있는 상대 선수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돈 문제가 차지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상번제에서 어린 양이 죽듯이 문제와 엉킨 마음을 죽은 것으로 여기자, 마음이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가져야 할 감사하는 마음을 예언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문제로부터 우리를 뜯어 말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첫 번째로 하시는 일은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를 끌어안음이 너무나 강하고 내가 놓을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상번제의 어린양이 죽듯이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름이나 이미지를 통해서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를 붙잡고 뒤엉켜있던 마음이 어린양과 함께 상번제에서 죽자 하나님의 이름만이 남게 됩니다. 문제로 여기며 얽혀있던 모든 이름들이 떨어져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름과 씨름하던 마음을 십자가 번제단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을 때에 땅에 남겨진 문제는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본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니 하나님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던 문제들을 도둑질하여 씨름하며 내 뜻대로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애초에 틀린 기도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기도입니다. 도둑질 한 물건을 가지고 주인에게 가서 고쳐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십자가와 성전은 이렇게 도둑질하는 마음을 뜯어 말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적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와 성전을 생활화하지 않고 사는 것은 오히려 싸움을 말리려는 사람을 장작으로 패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8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제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존재 의미를 파괴시킨 선민들의 나라를 망하게 하시고 성전 자체도 파괴하셨습니다.

성전과 십자가의 존재 의미는 마음에 품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문제나 어떤 사람도 붙잡고 씨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이 가까운 자리에 항상 머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동안에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역사합니다. 앗수르의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룻밤에 멸절 당했던 것처럼, 문제는 하나님의 일이 되어서 해결하시고 이끌어나가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영성적 상태는 오직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만 수정될 수 있고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세상을 붙잡고 씨름하려는 우리를 뜯어 말리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라면서 1절에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언제나 마음을 하나님의 이름에 가까이 둠으로서 이 세상은 하나님이 사시도록 넘겨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제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서 다시는 세상의 문제들과 뒤엉켜 씨름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과 가까운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