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열정의 전도체로 부름 받음_태승철

by 태승철 · 17-03-21 09:29 · 7,123
열정(熱情)의 사전전 정의는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입니다. 조금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일을 마음의 핫 이슈로서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핫 이슈로서 지속되기만 하면 추진력과 창의성 등은 자연히 뒤따르게 됩니다. 신앙도 궁극적으로는 열정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지요. 다른 모든 열정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전염성을 띠게 됩니다. 이 전염성을 위하여 열정의 전도체들로 특별히 부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열정의 전도체로 부름 받음

(에스라 8:1~20)

 

 

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열정의 전도체로 부름 받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열정의 전도체로 부름 받음

여러분께서는 열정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전에는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의 에스라와 관련해서 오늘 본문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열정을 정의해보면 어떤 일을 마음에 핫 이슈로서 끊임없이 유지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에서 뜨거운 관심거리를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대상이 없는 맹목적인 열정은 단순한 다혈질입니다.

그러나 열정은 무섭습니다. “바늘로 코끼리 죽이기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정답은 죽을 때까지 코끼리를 바늘로 찌르면 됩니다. 어떠한 일에 대해 열정이 생기면 그 일이 해결이 되어야 중단되는 것이지, 해결이 되지 않는 한 열정은 계속해서 불타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에 막힐 때에 돈이 없거나 지식이 없음을 한탄하고 혹은 연줄이 없거나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탓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정은 곧 코끼리를 죽을 때까지 찌르는 바늘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이 될 때까지 하려는 마음입니다.

흙수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대통령이 될 때까지 그 밖의 다른 모든 일은 버리는 것입니다. 결혼 자녀 건강이 중요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열정을 가진 사람은 실제로 대통령이 못 되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열정을 불태우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떻게 보자면 이러한 모습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동물에게는 먹잇감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은 있지만 그것은 열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열정이 있는데 대단합니다.

 

한국계 미국인 로이 최(Roy Choi)라는 사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아메리칸 셰프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LA의 최고급 레스토랑의 셰프였던 사람이 음식평론가의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자 화가 나서 다투다가 셰프 자리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주인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메뉴 선택권을 빼앗아가자 결국 셰프 자리를 떠나게 되고, 다 낡은 푸드 트럭을 구해서 쿠바샌드위치 장사를 하며 아들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연기를 지도하기 위한 요리전문가가 주연 배우에게 이 샌드위치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잘못 되면 세상 모든 일이 엉망이 된다. 오직 빵이 익는 것과 치즈가 녹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라. 그릴 위의 빵에 집중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지만 산만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 샌드위치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것처럼 몰두해서 연기를 하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고작 샌드위치 하나를 잘못 구우면 온 세상이 엉망이 된다고 여길 정도가 되어야 정말 맛있는 샌드위치가 나온다는 것인데 열정이 놀랍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러시아와 미국이 전쟁을 하더라도 문제가 안 됩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를 구울 것이냐가 핫 이슈인데 이것이 바로 열정입니다. 내 삶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도 핫 이슈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상태가 열정인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샌드위치 빵 하나를 잘못 구우면 온 세상이 망할 것처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온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엉망이 된다고 믿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입니다.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제자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칠 때에 주님께서는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이 깊은 잠에 빠지는 모습이 열정입니다. 하나님께 열정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핫 이슈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정을 가진 자는 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잠을 잡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도 열정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열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우성을 쳤던 제자들의 마음은 엄청난 열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두려움에 쫓기는 움직임을 열정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은 열정이지만 자생적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자생적일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은 전적타락의 존재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신 예수님의 열정에 전염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발열체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그 열정에 전염되는 전도체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 에스라가 2차 귀환자들의 지도자가 되어서 귀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벨론에서의 삶을 등진 자들의 명단이 나왔는데 장정이 1,773명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5인 가족으로 환산하면 약 9,000명이 될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이들 중에서 유력한 가문의 명단이 소개되는데 레위 지파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명망 있는 자들을 보내어 설득을 시켜 사십 명을 데려오게 하고, 다윗 시절부터 성전에서 일하였던 느디님 사람들 이백이십 명을 모아서 함께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포로로 잡혀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자유롭습니다. 오히려 더 문명화된 나라에 가서 잘 살게 되었기 때문인데 잡혀간 것이 아니라 이주한 셈입니다. 마치 요셉이 형들에게 팔렸지만 애굽 땅에서 총리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히브리족속이 모여 사는 부족형태와 애굽은 완벽한 대국의 총리자리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현재의 삶을 버리고 돌아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2차 포로귀환은 1차 포로귀환이 일어나고 80년이나 지난 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남 왕국 유다가 망한 BC 586년으로부터 무려 128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입니다. 1차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으로 돌아오는 자들이 오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80년이 흐르면서 페르시아 지역에 살고 있던 유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찾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면 이 1,773명의 2차 귀환자들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들은 유다 땅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솔로몬 성전을 본 적도 없습니다. 일찍이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그리움이라도 품을 수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겼고 어떠한 의미를 가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같은 페르시아에 있었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식고 여호와 신앙체계가 무너진 것 같았던 사람들 중에서 1,773명이 자신이 태어나서 자라고 삶의 기반을 구축한 페르시아 땅을 떠나서 돌아가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 뜨거운 열정을 지녔던 사람들의 지도자로 에스라가 나타납니다.

이들은 맨땅에 헤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귀환 길에 올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졌다고 하는데 8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아무도 성전을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귀환 길에 오르는데 정작 무리 중에는 성전의 활성화를 점화시키고 가동시킬 레위인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따로 레위인 사십 명과 성전의 장작패고 물 긷는 느디딤 사람들 이백이십 명이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레위인들이 아무런 열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 봉사를 해야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열정이 다 식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다시 일어나도록 합니다. 평생을 성전에서 살아야 되는 레위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핫 이슈가 되어야만 일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열정이 전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제사장 겸 학사였지만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열정을 나눌 레위 사람들을 골라내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핫 이슈로서 유지될 때에 또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전염될 수 있었습니다.

 

이 열정이 식어버린 레위인들의 모습이 우리의 신앙에 엄청나게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발열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 살다보면 우리 마음은 핫 이슈로 등장하는 세상 문제들의 홍수 속에 파묻히고 맙니다. 세상 문제가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음에 갖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싶어 하고 하나님으로 부자 되고 싶어 하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얼음처럼 냉각되어 버립니다.

에스라가 레위인을 불렀듯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르는 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발열체입니다. 활화산의 분화구 같은 곳으로부터 모든 열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을 향한 열정으로만 살겠다는 결심의 자리입니다. 세상이라는 핫 이슈가 마음을 점령할 때에 그 마음을 죽이는 곳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핫 이슈에 얼음물을 확 부어버리는 것이 십자가의 기본 정신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방향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구세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열정이란 삶의 현장에서 관계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죽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의 열정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신경 쓰지 못하는 다른 모든 방면은 파괴되거나 약화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다릅니다.

앞서 아메리칸 셰프의 뒷이야기에서 빵 하나를 잘못 구우면 온 세상이 잘못된다고 여길 만큼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빵에 비교되실 분이 아니신데 우리는 그만한 열정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해서 열정을 드린다면 다른 모든 삶의 열정과는 다르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물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놀라울 정도로 신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도 삶을 신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되살려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는 세상일들이 핫 이슈로서 생겨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열정을 드릴 수 있을까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죽으심이 세상에 대한 나의 마음이 죽은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열정이 내게로 전염되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내 마음을 차지하고 이슈가 되었던 많은 문제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만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이 전염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부활과 승천을 따라 올라가는 단순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열정을 전염시키는 전도체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물리치셨던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제2의 창조가 일어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세상에 대한 열정은 얼음처럼 냉각되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하여 주셔서 예수님의 열정을 전염시키는 전도체로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