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세상에 구멍 내는 사람들_태승철

by 태승철 · 16-08-25 10:46 · 7,824

불교의 세계관을 함축하는 '인드라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 나가서 삼라만상은 모두가 하나의 그물처럼 연결 되어, 서로 관계하면서도 각자에게 장애가 없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삶의 부조리와 충돌을 가져 오는 죄의 실제를 간과한 나이브한 면이 없지 않지만 연결 됨 자체는 유보 없는 동의가 가능합니다. 복음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세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촘촘히 엮인 그물입니다. 그리고 선민은 바로 이 세상 그물에 구멍을 내는 사람들이고요.

세상에 구멍 내는 사람들

(열왕기상 18:1~15)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8.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세상에 구멍 내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에 구멍 내는 사람들

인도에서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단어로 인드라 망이 있습니다.

인드라는 인도의 베다신화에 나오는 비와 천둥의 신입니다. 하늘의 제왕으로 몸은 갈색이고 팔이 네 개가 달렸으며 두 개의 창을 들고 코끼리를 타는 신입니다. 불교에서는 제속천 또는 십이천의 하나로 동방의 수호신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베다신화에 나오는 인드라 신이 살고 있는 궁전을 장식하고 있는 그물이 인드라 망입니다.

그런데 이 망의 각 그물코마다 보석으로 된 구슬이 달려있어서 한 보석의 그물은 옆으로 돌아가면서 그물코가 넓혀지고 주변의 모든 보석들의 그림자를 머금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드라 망처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의 존재가 관계 그물망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한 사람의 행동은 사방으로 연결된 다른 사람과 더 나아가서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 그 그림자의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인도 불교의 세계관은 삼라만상은 촘촘히 엮여서 모든 존재가 서로 관계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장애가 되는 일이 없음을 비유하여 인드라 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관념적이기 때문에 실제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 부조리한 삶의 측면이나 또 충돌이 일어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세계관인 인드라 망은 연결이라는 인사이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요즘 페이스 북이 있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활발한 활동은 하지 않고 가입만 해놓았는데 며칠 만에 한 번씩 스마트 폰으로 문자가 와서 보면 제가 알고 있는 친밀한 사람, 덜 친밀한 사람, 아주 친밀하지 않은 사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네덜란드에 계시는 목사님, 심지어 외국인 까지도 다 이 사람을 친구로 삼겠습니까? 이 사람을 아십니까? 물어오는데 연결이라는 것이 엄청납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는 세상의 그물이 있습니다. 인드라 망에서 말하는 연결과 관계성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서로 상호 순조로운 관계를 진행하는 관계에서는 복음의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인드라 신이 사는 왕궁의 그물이 인드라 망이고 그 그물코마다 보석이 달려 있는데 그 그물코를 각 사람과 삼라만상 개개의 존재들로 비유를 했습니다. 복음적으로 보자면 이런 연결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물코에 달린 보석은 받아들일 수 없고 기독교가 보는 세계관에서는 죄의 구슬이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물인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항하여 벌이는 촘촘한 그물망으로 하나님이 발을 이 땅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발과 손이 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는 그물망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이 땅에 끼어들 여지를 제거하는 것인데 사탄활동의 전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촘촘한 그물로 세상이 형성되어 있을까요?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들어봅니다. 어느 한 가정에 여섯 명의 가족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아들딸이라고 치면, 여섯 개의 마음이 있고 그 첫 번째 자리에 세상의 대상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가족들이 서로 친족관계의 그물을 형성하고 있고 이들이 밖으로 나가면 각자의 관계망이 뻗어나갑니다.

그런데 이들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이 세상 것이 촘촘하게 들어와 있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끼어드실 여지를 지워버리고 맙니다. 여섯 명이 나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도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이 들어와 있음으로 인드라망의 보석 같은 촘촘한 그물이 형성됩니다. 우리 마음의 첫 번째가 되는 것이 나의 마음의 보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첫 번째 자리에 끌어들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에게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으로 그것은 돈, 건강, 맛있는 음식, 여행 등일 수도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건강일 수 있고 아버지에게는 승진이나 사업의 성공이고, 어머니에게는 자녀들의 형통이며, 자녀들은 또 다른 무엇인가를 첫 번째 자리에 들여놨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드라망처럼 연결된 사람들의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세상 것이 들어와 있음으로 보석이 되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결코 끼어들 수 없는 그물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 여섯 명의 가족의 엄마가 십자가 복음을 들었습니다. 아들딸의 형통이 첫 번째 자리에 들어와 있었는데 십자가에서 아들딸에 대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셔 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과 만족은 이 세상에 없으며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기쁨과 만족의 근원으로 믿고 하나님을 추구하면 이 여섯 명 가정의 그물에 구멍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듯 선민은 내가 머물고 있는 처소에서 세상에 구멍을 내는 자들입니다. 이 구멍을 내라고 선민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이 구멍이 세상을 뚫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구멍을 당신의 살아계심이 통과하여 나타나는 터널로 삼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가기 전에 그릿 시냇가에 있으면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받았던 6개월에 그 이후로 3년이 더 지났고, 하나님께서 드디어 가뭄을 끝내시고 비를 허락하시기 위해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보내십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추구하는 바알 숭배와의 대결을 치룬 뒤에 가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만 가뭄이 하나님의 징계로서 의미가 있고, 내일 보겠습니다마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으로 드러나십니다.

이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에 오바댜가 등장합니다. 오바댜의 이름에는 여호와를 섬긴다. / 여호와의 종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이 사람은 아합의 궁내 대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사람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신뢰가 두터워 궁내의 모든 살림을 도맡아 보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등장한 여자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여자,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은 시돈 땅에서 숭배하던 바알과 아세라를 들여와서 선민의 나라인 북 왕국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초토화시켰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뭄을 선포한 가운데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엘리야의 예언대로 가뭄이 일어나자 분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바댜는 바알 숭배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아합의 궁내 대신의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한 것인데 참으로 대단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경외한다.’는 말에는 놀란다. / 두려워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삼상17:11절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하는데 다윗과 골리앗이 대면하는 장면에서 경외한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떡을 들고 형들이 있는 전쟁터에 갔을 때에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도발하고 있었는데 골리앗을 본 온 이스라엘이 놀라고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 놀라움과 두려움이 경외함과 의미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놀라고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그 자리에 분명히 살아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놀라며 두려워했습니다. 양을 칠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셨고, 골리앗이 있는 전쟁터에 왔을 때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골리앗을 보고 놀라기 전에 하나님을 보고 놀라고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조금이라도 그 사람에게 언짢은 말이 나올까 염려하는 것인데 이것이 경외함입니다.

오바댜가 대단한 것은 혈안이 되어 여호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선지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며 바알 숭배를 강요하는 진원지에서 여호와를 경외한 것인데,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아합과 이세벨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궁궐 안에서 보이지도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함으로 경외했던 것입니다.

왕궁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를 잡아 죽이겠다는 아합과 이세벨이 있는데 그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먼저 보고 놀라고 두려워했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바알 숭배의 진원지에 구멍이 뚫린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삶에 나타나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손수 행하시는 삶이 아니라면 내용적으로 모두 다 바알 숭배입니다. 우리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이 세상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려는 소원을 갖게 되는 것이 바알 숭배입니다.

풍요와 다산은 우리들이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세상 가치들의 대표입니다. 그것들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모두 다 바알 숭배를 할 수 밖에 없고, 바알 숭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지금 내 사업이 망하는 상황이더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지금 내 옆에 계심에 깜짝 놀라야 합니다. 사업이 망하는 것이 큰일이지만 그 사업을 좁쌀같이 여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버지로 내 옆에 계심을 경외하는 것인데 이렇게 할 때에 세상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오바댜가 뚫은 구멍을 터널로 이용하셨습니다.

그 옛날에 전적으로 농사에만 의지했는데 가뭄이 36개월이 지속되었던 상황입니다. 아마도 애굽에서 곡물을 수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을 때에 오바댜가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공급했습니다. 아합의 궁에서 백 명분의 떡과 물을 빼내야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아합과 이세벨의 눈에 띄지 않았겠고 귀에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오바댜의 하나님 경외가 있을 때에 세상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에 하나님의 터널이 만들어져서 하나님의 역사가 손수 이 땅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면 36개월 가뭄 동안에 궁내 대신이 바알 숭배를 권장하는 왕과 왕비의 눈을 피해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백 명을 먹일 수가 없었는데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물어다 먹인 것만큼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기적에는 특이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돈 돈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속에 뛰어 들어서 그 사람들이 만든 회사에서 그 사람들 밑에서 살아가면서 어떻게 신앙을 지킬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바알 숭배의 심장부인 아합 궁으로부터 오바댜를 통하여 백 명분의 식량을 빼내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살리셨는데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의 역사에 늘 있어 왔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에 히브리인들의 남자 아이는 모두 나일강에 빠뜨려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모세를 바구니에 담아서 나일강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의 사망의 진원지인 바로의 왕궁에서 모세는 왕자로서 40살까지 살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떻다며 상황과 조건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내 마음이 돈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보고 깜짝 놀라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돈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돈이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돈은 없어도 괜찮지만 하나님을 가지지 못하면 죽는다는 생각이 하나님 경외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바알 숭배의 심장부에서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구멍이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터널은 뚫릴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엘리야를 볼 수 있습니다. 시돈 출신의 이세벨이 바알 숭배로 북 왕국 이스라엘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시돈 지역은 전통적으로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뿌리 깊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3년 가뭄을 피신했던 사르밧이 바로 시돈 지역입니다.

또한 약속의 땅인 복지를 바알 숭배와 아세라 숭배, 가나안 종교로 타락이 극에 달했던 팔레스타인에 정하신 것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오염도 없던 사막을 옥토로 만들어 약속의 땅으로 주시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별별 신들이 다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는 것이 경외의 의미입니다.

주변에 아무 신도 없고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끌어들일 가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가는 것이고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구멍을 낼까요?

구약에서는 날마다 드려지는 상번제의 연기를 보거나, 아침저녁으로 양이 죽는 것을 생각합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