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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슬아슬한 복지 조건 적응법>의 줄거리 :
여호수아의 마지막 훈계가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음을 준비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호수아를 하늘로 데리고 오시려는 하나님 마음에 가장 걸리는 부분이 이심전심으로 옮겨 왔습니다. 복지의 조건은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이 복지의 조건에 잘 맞추어 살 수 있을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심전심 된 여호수아의 마음까지도 그저 아슬아슬하기만 합니다.
아슬아슬한 복지 조건 적응법
(여호수아 23:1~16)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2.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
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4.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 지는 쪽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아 너희의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우리가 읽은 1~5절 이후에는 하나님의 지시가 담긴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서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며, 다른 민족들에게로 들어가서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 이름으로 맹세하거나 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교제하거나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일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복지를 빼앗기리라는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아슬아슬한 복지 조건 적응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여호수아는 마지막 단락인 16절에서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라고 경고합니다. 여호수아는 죽음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훈계를 남깁니다. 이 훈계를 보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슬아슬한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마음은 여호수아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이심전심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데려가시려는 중에 여호수아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아슬아슬함을 느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여호수아의 마음에 전달되면서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음은 삶을 통해서 늘 증명되어야 합니다. 내가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것이 올바르다면 구원받음은 증명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구원받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늘 아슬아슬합니다. 복지의 삶은 하나님이 조건을 갖추어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조건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있을 때는 여호수아가 가르치고 훈계하면 되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를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며 느끼시는 아슬아슬함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끝마쳤을 때의 나이가 90세이고 이제 110세에 죽습니다. 본문을 기록할 때는 여호수아가 110세가 되었을 무렵으로써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20년 정도가 흐른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의도를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써 아슬아슬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앞서 땅 분배까지 이루어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아브라함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복지로 들어 가 살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600여 년 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의도하신 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언급한 것에는 ‘너희가 앞으로 복지에서 살아갈 때 이 땅의 삶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끌려 질 것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점이 복지의 가장 기본이자 핵심 조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의도가 내 삶을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내 삶에는 한 순간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의도가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의 의도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라시는 바가 들어있고, 그 바라시는 바를 이루어 가실 뜻이 있으며, 그 뜻대로 이루어 가시기 위한 힘이 들어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힘이 들어있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내 삶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힘 이외에 보충해야 할 다른 요소는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의 바람, 그 바람을 이루시려는 뜻, 그 뜻을 성취하시는 힘이 담긴 의도는 24시간 내 삶에 내려옵니다. 이것이 복지의 핵심 조건입니다. 이 조건에 맞추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이심전심이 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볼 때는 너무 아슬아슬합니다. 복지를 살려면 하나님의 의도가 내려오는 조건에 맞추어야만 하는데 여차하면 어긋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입니다. 마치 우주선이 도킹하듯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복지의 조건과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맞추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맞춤이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아슬아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수아는 복지의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600여 년 동안의 우여곡절을 통하여 약속하신 복지를 할당받았습니다. 이제 선민으로서 복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복지의 삶을 위해 정해놓으신 조건에 맞추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도가 이끌어 가실 때 그 의도를 올라타서 충돌하지 않고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나도 아슬아슬한 상태라는 것을 본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내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 의도 안에는 하나님의 바람도 있고, 뜻도 있고, 계획도 있고, 힘도 있기에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지의 조건에 맞추려면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힘은 단 한 방울도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휘발유 차에 물이나 디젤이 섞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엔진이 고장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힘이 한 방울도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복지를 유지하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나 아슬아슬합니다. 우리에게는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힘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체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지에 맞추어질 수 없는 체질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힘이 담긴 의도가 이끌어가시는 삶에서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은 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의도에 충돌하도록 우리를 유혹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이 삶에 투입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체질 때문에 여차하면 내 마음이 튀어나옵니다. 공백의 마음을 채우려는 소원과 바람이 튀어나오고, 그것을 이루려는 뜻이 튀어나오고, 그 뜻을 성취하려는 힘을 쓰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의도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힘든 이유는 하나님과의 충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참새 한 마리에게도 있으시고, 백합화 한 송이에도 있으시며, 내 머리털 한 가닥에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 충돌을 이기고 내 의도대로 삶을 이끌어가려고 하기에 삶은 너무나 힘듭니다.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과 하나님이 세상에서 바라시는 일이 다르기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바라는 일을 이루기 위해 뜻을 세우고 힘을 씁니다. 이러한 삶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바람을 위해 절대로 마음과 뜻과 힘을 쓰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슬아슬한 상황을 넘어서 복지의 조건에 잘 맞출 수 있을까요? 본문은 그 대답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십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삶에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가 삶을 이끌어가심을 믿습니다. 내가 관계하는 사람들과 삶의 조건과 주변 환경은 모두 하나님의 의도가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소에 대해 나는 마음과 뜻과 힘을 한 방울도 쓰면 안 됩니다. 다만 이 사실을 안다고 할지라도 현실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관계하는 사람에 대해서 죽은 자임을 고백합니다. 내 삶의 조건에 대해서 죽은 자임을 고백합니다. 내 환경에 대해서 죽은 자임을 고백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복지의 조건에 맞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더라도 삶의 현장으로 나가면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책에 기록하신 것을 이루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을 만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책을 하나님의 지시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율법책에 기록된 것 중에 이러한 말씀을 내게 지시하신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은 한 번의 행동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주어진 상황이 그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만난 상태에서 하나님이 지금 지시하시는 것을 받아들여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때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 실시간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지시하시는 바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는 공중에 매단 외줄 타기와도 같습니다. 외줄을 타는 광대들은 긴 장대를 들고 균형을 맞추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에는 마음의 소원이 있으시고, 계획을 세우시는 뜻이 있으시며, 그것을 이루시는 힘이 있으십니다. 여기에 맞추는 것이 복지를 사는 조건입니다. 이때 내가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행동은 하나님의 지시라는 외줄 타기를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로나 좌로나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거듭 말씀드렸습니다만 치우침이란 이 세상에서 눈앞에 나타난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지중에 살인을 범한 자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도피성에 대해 살펴본 바 있습니다. 우로 치우침이 좋아하여 애착함이라면 좌로 치우침이란 싫어하여 밀어냄입니다. 삶에서 어떤 것은 싫어하여 거부하지만 어떤 것은 좋아하고 애착할 수 있습니다. 싫어하고 거부할 때는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로 치우친 것이고, 좋아하고 애착할 때는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우로 치우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로부터 좌로 치우치거나 우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줄 타기에서 균형을 잡듯이 하나님의 지시를 실시간으로 받아서 올라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싫어하여 거부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좋아하여 애착하는 것도 없어야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본문이 가능한 길을 보여주십니다.
7절을 보면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 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신들이란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특정 우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들입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이 계셔야 될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밀쳐내고 들어오는 것들이 다른 신들입니다. 마음은 좋음을 통해 채워지고자 욕구합니다. 돈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은 돈이 다른 신입니다. 자녀의 형통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녀가 다른 신입니다.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은 건강과 장수가 다른 신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지시를 따르라는 말씀에 이어서 다른 민족들 중에 들어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이어지는 이유는 마음 채움 때문입니다. 다른 신들을 섬김이란 하나님 이외에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좋은 것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안 이루어지는 것을 싫어하며 거부한다면 좌로 치우치는 것이고, 그것을 좋아하여 애착한다면 우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말고, 뜻을 두지 말고, 힘을 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쓰게 되는 상황이란 전부 마음 채움을 위하여 좋아하는 것을 향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할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신이란 가지면 내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의식 속에는 다양한 이름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있고, 돈이라는 이름도 있고, 명예라는 이름도 있고, 형통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은 돈이나 명예나 인기나 형통과 같은 것들을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합격, 여유로움, 취미 같은 것들도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내 마음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돈이라는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내 마음은 돈이 있어야 채워질 수 있다!’라고 여길 것이고, 형통이라는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내 마음은 형통이라는 신이 있어야 채워질 수 있다!’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면 복지를 잃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다른 신으로 여기는 사람은 돈을 벌려고 결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형통하겠다고 결심하고, 합격하겠다고 결심하고, 자녀가 형통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이러한 결심이 바로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신들에게 절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돈, 형통, 건강, 인기, 명예, 명품 등등 하나님 이외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른 신들입니다. 이러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없으면 불평불만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들이 있어야만 기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다른 신들에게 절하는 것이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슨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어야만 기쁘다고 여기는 상태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만 기쁘다고 여긴다면 돈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께 어떤 보탬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으로 기쁘다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상태에서는 복지의 조건에 맞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에는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과 소원이 있습니다. 또한 그 소원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과 뜻을 실제로 성취하시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복지의 삶에는 하나님의 의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 마음과 뜻과 힘을 세상에 투여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기 때문에 내 마음과 뜻과 힘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내 행동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관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장 만나지 않더라도 관계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문제나, 내 삶의 조건, 내 주변의 상황, 내 가정 형편, 나라 형편, 전 세계의 형편과 같은 것들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으면 됩니다.
문제는 내가 행동할 때입니다. 행동할 때 어떻게 하나님의 의도가 나를 끌어가시며, 하나님의 의도가 나를 장갑 삼으실 수 있도록 조건을 맞출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신들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은 세상 안에는 없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좋아할 때 그것과 관련하여 불평불만을 합니다. 불평불만을 한다면 좌로 치우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것이 안 이루어졌다고 불평불만을 하고 있다.’라고 여겨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한편 12~13절을 보면 다른 민족들과의 결혼을 금지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다른 민족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마음 채움을 위해서 다른 것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여러분의 배우자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오직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의 좋은 모든 것들에 대해 죽고 하나님만으로 좋음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는 돈이 있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자식들이 형통해야 하고, 이런저런 삶의 조건들이 갖춰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민족입니다. 다른 민족들과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이처럼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람과는 교제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라는 표현이 무척 익숙한 만큼 다른 민족들이라 하니 매우 이질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는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가 다른 민족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과는 마음의 교제와 왕래를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호수아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걱정과 근심을 했다면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라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이때도 역사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아슬아슬한 상황에 대한 염려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이심전심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남편, 돈을 좋아하는 아내, 합격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족들과 마음으로 교제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다면 다른 민족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심전심으로 받아서 이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말과 행동을 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냉혈한을 넘어서 아예 마음이 죽어야 합니다.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다른 민족들이고, 한 직장에 있는 다른 민족들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같은 민족일까요? 지금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겠다고 몸부림치는 여러분이 같은 민족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듣고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마주하는 사람들은 한 집에 살아도 다른 민족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과는 마음의 교제가 이루어지면 안 됩니다. 자식이라도 부모라도 배우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쨌든지 하나님만을 나의 신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만을 나의 좋음으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딱 붙어 있으면 이제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다른 민족들과 관계를 맺게 하시는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과 섞이지 말라고 하신 것은 마음을 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민족들인 남편과 아내에게 마음을 안 주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만 마음을 드립니다. 그러면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내게 주어지는 지시가 있습니다. 나는 다른 민족들인 남편을 대하고, 아내를 대하고, 자식을 대하고, 부모를 대해야 합니다. 이때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으면 하나님의 지시가 외줄처럼 내 앞에 나타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시를 듣는 나의 마음에는 다른 신이 없기 때문에 마주하는 사람이나 주어진 상황에 대해 좋아함도 싫어함도 없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향해서 내가 하는 말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오직 하나님이 지금 실시간으로 지시하시는 외줄을 타고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닿게 됩니다.
냉혈한을 넘어서 아예 마음이 죽음으로써 있다는 사실을 인정 안 하는 것처럼 마음을 안 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아내에 대해, 남편에 대해, 자녀에 대해 죽고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내가 아내에게 마음을 두고 남편에게 마음을 둘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음을 둔 상대에게 채움을 위하여 요구하는 바가 생깁니다. 그런데 마음을 두지 않으니 마음에서 요구하는 바도 없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럴 때 아내를 보고 남편을 보고 자녀를 보면 기존과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 생깁니다. 이들이 측은하고 가엽게 느껴집니다. 굉장히 넓고 큰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들을 끌어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에게서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고 마음의 왕래를 하는 상태에서는 이러한 모습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늘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마음을 준 사람 때문에 생깁니다. 마음을 안 준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과 왕래하듯이 다른 신을 섬기는 배우자와 마음으로 왕래하다 보면 나 또한 마음 채움을 위해 좋아하는 것이 다른 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들과의 왕래를 금지하신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민족들과 왕래하듯 다른 신들을 가진 배우자와 마음으로 왕래한다면 어느덧 내 마음의 만족을 위하여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들로는 마음이 채워질 수 없기에 늘 불평불만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복지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정리합니다. 여호수아의 유언을 요약하자면 ‘내가 죽고 없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의도대로만 살아라. 하나님의 의도가 복지의 조건이다. 그 의도에 맞추어라. 네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네 마음과 뜻과 힘은 한 방울도 네 삶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도와 충돌을 일으킨다. 그런데 너희는 끊임없이 마음과 뜻과 힘을 쓰고자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마음 채움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싫음을 거부하느라 마음과 뜻과 힘을 쓰게 된다. 또한 좋음을 애착하느라고 마음과 뜻과 힘을 쓰게 된다. 그러면 너희는 하나님의 의도에 충돌할 뿐만 아니라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 지시의 외줄 타기로부터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버리고 말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 지시의 외줄 타기를 해나갈 수 있을까요? 오직 상번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과 뜻과 힘은 다 하늘로 올라가서 이 땅에서는 쓰려야 쓸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자유롭게 하나님 지시의 외줄 타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내 마음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이유가 없기에 마치 광대들이 외줄에서 춤을 추듯이 하나님의 지시에서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와 더불어 행동을 할 때 복지는 계속해서 유지됩니다. 아슬아슬한 복지 조건 맞춤법은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지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도 아슬아슬함을 느끼시고, 여호수아도 이심전심으로 아슬아슬함을 느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느낌을 받고 계실 것이오니, 이 아슬아슬함이 우리에게도 이심전심이 되어서 항상 깨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외줄 타기에 능란한 사람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