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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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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값의식이 하나님 의도의 천적_태승철

by 태승철 · 26-04-09 08:33 · 394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몸값 의식이 하나님 의도의 천적>의 줄거리 :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고 있을 때와 하차하였을 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도를 하차하자마자 나타나는 일은 내 몸값을 생각하게 됩니다. 몸값 계산은 항상 불평불만으로 나타납니다. 즉 현재 내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나 상황이 내게는 합당하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늘 만나는 사람에 대해 불평하면서 상대가 나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내게 합당한 조건과 대우를 바라며 불평불만에 사로잡혀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의도를 승차하였다면 이루어졌을 일을 모두 낭비하게 됩니다.

 

 

몸값 의식이 하나님 의도의 천적

 

(여호수아 17:7~18)

 

12.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13.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14.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16.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17.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본문 중심으로 <몸값 의식이 하나님 의도의 천적>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내가 내 몸값을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치워버리고 마귀의 의도를 올라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몸값이라고 하면 납치범이나 유괴범이 인질을 풀어줄 때 요구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의 시장 가치를 몸값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드라마 1회 출연에 주연은 일억을 받지만, 엑스트라는 오십만 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몸값을 말합니다. 그런데 몸값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의 월급이나 연봉 혹은 직급도 결국 몸값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직업이나 사회적 직급이 없는 사람도 몸값 의식이 늘 작동하는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몸값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의도를 하차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서 하나님의 의도대로 인생이 진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몸값을 의식하는 동안에 나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내려오고, 십중팔구 사탄의 의도대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어떤 내용이기에 몸값을 생각하게 될까요?

 

12~13절을 보면 므낫세 지파가 자기들에게 분배된 땅과 인접한 곳에서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지 않고 놔둔 채로 살았음이 언급됩니다. 이들은 나중에 가나안 족속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생겼을 때도 물리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종으로 부렸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므낫세 지파에게 내려오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가나안 족속의 의도가 물리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의도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세상의 세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결심했다는 것은 그들의 의도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의도대로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된 땅에서 살았고, 이는 곧 하나님의 의도를 물리쳤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가나안 족속의 의도에 의해서 밀려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므낫세 지파가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이와 같은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회사에서는 사장님의 의도에 복종하듯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정신의 의도에 지배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과 다르게 세상을 지배하는 철칙으로 여겨지는 의도에 이끌려 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도가 밀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인정하며 올라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올라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도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의도가 들어오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몇 살입니까?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의 의도가 여러분을 이끌어 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의도로 살았습니까? 여러분의 의도로 살았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면 세상을 지배하는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의도에 이끌려 온 것입니다. 내가 올라타지 않은 하나님의 의도는 이 세상의 어떤 의도도 밀고 나가지 못합니다. 내가 올라타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운명론이나 숙명론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계획이 있으시고 그 계획을 의도적으로 수행하십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도는 수행될 수 없습니다. 내 의도대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주변의 의도대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회사에 나가면 사장님의 의도대로 8시간을 근무하다 퇴근합니다. 집에 오면 아내와 자녀의 의도를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평생 나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구상하신 내 인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그림 그려놓으신 내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채 주변의 의도로 흔들리기만 하다가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단계로 가나안 정복을 실시하게 하셨습니다. 먼저 중부, 남부, 북부의 거점을 확보한 후 땅을 분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파 별로 분배받은 땅에서 가나안 족속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제비 뽑아서 땅을 분배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땅 분배에 대한 의도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므낫세 지파는 이 의도에서 내려왔기에 결국 가나안 족속의 의도에 밀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지점까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목표에 도달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내막을 보자면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갖고 계신 아버지의 의도가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므낫세 지파처럼 하나님의 의도에서 도중하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중하차한 므낫세 지파의 상태가 에브라임 지파에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결국 요셉 자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여호수아에게 땅을 더 요구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예를 통해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일이 자기 몸값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값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하게 됩니다.

14절을 보면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두 지파인데 왜 한 지파의 분깃만 줍니까? 땅이 비좁으니 더 주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분배된 땅에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인접한 땅을 정복하여 넓힐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분배된 땅에서 더 넓히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내려왔고 이로부터 이미 분배된 땅 안에서 자기들의 몫을 더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자기들은 요셉 자손의 이름으로 한 번의 제비를 뽑았지만, 실상은 두 지파이기에 땅은 비좁고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들의 요구가 타당했는지 실상을 점검해 봅니다. 당시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었고, 므낫세 지파 중에서 요단 동편에 머무는 반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는 26,000명이었습니다. 이 둘을 합해도 60,000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64,000명이었고, 잇사갈 지파는 64,300명이었습니다. 요셉의 자손으로 뽑아서 둘로 분할을 했지만, 이들이 받은 땅은 오히려 인구가 더 많은 단 지파나 잇사갈 지파의 땅보다도 넓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자기들 수에 비해 작은 땅을 받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강력한 피해의식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셉 자손의 유전자적 특성이 나타납니다. 요셉은 너무나 훌륭하게 살았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 때문에 자꾸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후손들은 요셉의 이러한 모습을 잊은 채,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져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성공과 번영만을 보았습니다. 이로부터 나타난 일이 몸값 의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몸값 의식은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요? 현재 내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이 있습니다. 배우자가 나를 대우하는 태도, 자녀가 나를 인정하는 정도, 회사에서 상사가 나를 대하는 태도, 현재 내게 주어진 조건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몸값 의식이 생길 때 이러한 모든 조건과 환경에 불평불만이 생깁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현재 주어진 조건보다는 더 나은 조건이 주어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부터 불평불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값 의식이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현재 내게 주어진 것이 맞는지 모자라는 것인지 과분한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셉 지파의 상황이 이러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실제로 분배받은 땅은 단 지파나 잇사갈 지파에 비해서 엄청나게 넓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몸값 의식이 작동하면서 주어진 것이 합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객관적 판단과 분별을 잃었습니다. 무조건적인 피해의식을 갖고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몸값 의식이 작동할 때 나타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지 않으면 반드시 몸값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몸값 의식이 작동할 때 나타나는 일이 불평불만입니다. 현재 다른 사람들에게 대우받는 상태에 대해서, 현재 주어진 조건에 대해서, 현재 주어진 과제에 대해서, 언제나 불평불만을 갖습니다. 쉽게 말해 나는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뛰어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초에 직장에서 일을 분담할 때 조금이라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은 피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나타나는 근본적 이유를 따져보면 몸값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나? 그따위 일을 하기에는 나는 우월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늘 불평불만입니다. 무슨 과제를 맡기려고 하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기가 일쑤입니다. 가능한 어려운 일은 안 맡으려 애씁니다. 요셉 자손의 지파가 이와 같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탔다면 하나님의 의도가 이끌어가시면서 분명히 더 넓은 지역을 정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내려왔고 이로부터 이미 분배된 땅에서 자기 몫을 더 요구함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낯선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경쟁 심리가 생겨나는 이유도 몸값 의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하차한 사람은 항상 경쟁합니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될 대우를 못 받는 것 아닌가를 생각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불리한 일이나 과제나 업무를 부여받는 것 아닌가 하며 항상 쫓기고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맡아도 마땅히 받아야 될 대우를 못 받고 일의 결과로 저평가를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전부 몸값 의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편, 15절을 보면 이에 대한 여호수아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 땅이 좁다는 생각이 맞다고 하자. 그러면 너희가 넓혀라. 너희의 생각이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고 땅을 넓혀서 가지면 된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들은 곤란함을 호소합니다. 적들이 철 병거를 가지고 있기에 싸워서 이겨 땅을 넓히는 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이제까지 가나안의 중부와 남부와 북부를 정복할 때를 언급합니다. 가나안 땅의 중부와 남부와 북부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철 병거 때문에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이들의 핑계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지 않는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자기 몸값을 생각하지만 거꾸로 강한 문제 앞에서는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요셉 자손의 지파 사람들은 요셉이라는 인물을 조상으로 두었기에 이스라엘 내에서 우월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월감이 몸값 의식에 반영되며 이미 분배받은 땅에서 더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타고 새 땅을 얻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이미 분배받은 땅에서 자기 몫을 늘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땅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타고 싸워 이겨서 더 가지라는 대답을 했고, 이에 요셉 지파는 가나안 족속이 철 병거를 가졌음을 언급하며 이길 수 없음을 호소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에서 내려와 자기 몸값을 계산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철 병거로 비유되는 어려움 앞에서 열등감을 갖습니다. 아주 비겁하고 치사하게 되어버립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어땠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들 또한 므낫세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슬로브핫의 딸들은 남자에게만 상속이 가능하다는 철칙에 맞섰습니다. 온 세상을 지배하는 철칙에 맞서는 것과 가나안 족속의 철 병거에 맞서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웠을까요? 어느 것이 더 강력한 장애물이었을까요?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는 남자만 상속을 할 수 있다는 철칙이 훨씬 더 강력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 철칙은 온 세상의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이미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쳐 왔고, 므낫세 지파는 자기 영내에서 버티는 가나안 족속들의 의도만을 이겨내면 되었을 뿐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온 세상의 의도를 맞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탄 자에게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도만 작동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열등한 존재다혹은 내가 우월한 존재다라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의 지파는 하나님 의도에서 내려와 자기 몸값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월감에서 비롯된 불평불만과 열등감에 젖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에도 불평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불만스러워서 막연하게 지금과는 다르게 더 나아질 때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값 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두드러지게 불평불만을 하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미래에 대한 바람을 갖고, 그 바람이 유지되고 있다면 하나님의 의도에서 내려온 상태입니다. 몸값 의식이 작동하면서 현재 상태는 내 몸값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몸값 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명품 외제차를 보면서 기가 죽습니다. 내가 열등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지 않은 사람에게서 생기는 열등감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내려와 자기 몸값 의식이 작동하며 살고 있는 사람은 늘 쫓깁니다. 인간 세상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늘 쫓기고 불안하다 보니 현재 주어진 상태는 불만스럽습니다. ‘내가 이 상태에 머물면 안 된다. 이 상태는 나에게 안 맞는 것이다. 나는 좀 더 나은 상태가 맞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면 내 몸값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탄 사람은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도에 의한 것임을 압니다. 그렇기에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몸값 의식이 작동한다면 항상 불평불만이 생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많이 가진 사람들 앞에서는 열등감에 찌들고, 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우월감에 불평불만을 합니다. 몸값 의식이 작동하는 동안에는 지옥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면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일을 휴지 조각처럼 버리면서 자기 인생을 낭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생을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나의 몸값입니다. 십자가에서 손발이 못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배는 창에 찔리고, 살갗은 채찍 맞아 너덜너덜한 상태로 죽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세상에서의 나의 몸값입니다. 더는 몸값 의식을 세상 안에서 작동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휴지 조각은 재활용이라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재활용조차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몸값을 왜 이렇게 낮게 책정하신 것일까요? 십자가에서 죽는 자리가 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값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십자가보다 더 낮은 자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몸값을 그렇게 인정할 때 불평이 나올 수가 없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내가 마음대로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몸값 의식이 작동하는 동안에는 지금은 모자란다.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열등감에 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나를 이끌어 가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나를 이끌고 가실 때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삶의 진폭이 너무 크게 보일 것입니다. 요셉처럼 총리가 될 수도 있지만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탄다면 이 진폭 사이를 오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몸값 의식이 작동하는 동안에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도적으로 이끌고 가실 때는 요셉으로부터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자리까지의 진폭을 다 이용하실 텐데, 그럴 때마다 몸값 의식이 작동해서 시험에 든다면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끌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네 몸값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리가 너의 몸값이다.’라고 정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순간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회사에서, 사람들 앞에서 나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다.’라는 몸값을 인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몸값 의식이 작동하면서 이것이 불만이다. 저것이 불만이다. 이것이 억울하다. 저것이 분통이 터진다. 당신은 뭐가 잘났다고 나를 이렇게 대우하느냐?’라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나 때문임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내 몸값으로 정해주신 것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몸값을 책정하셨을까요? 왜 하필이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몸값 중에 가장 낮은 몸값을 정하신 것일까요?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내 마음은 주님의 몸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고, 건강을 좋아하고, 형통을 좋아하고, 승진을 좋아하는 것처럼 그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만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선민인 나의 본래 몸값은 조물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속아서 죄와 저주에 찌든 자들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가지고 자기 몸값을 매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할 사람들이 죄와 저주에 찌든 가치관에서 돈이 좋다고 합니다. 건강 장수가 좋다고 합니다. 형통이 좋고 성공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 몸값을 매기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봐야 휴지 조각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가치들을 가지고 자기 몸값을 계산하는 휴지 조각 같은 인생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조물주이자 유일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가지는 자들로 몸값 책정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을 가질 몸값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져야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휴지 조각 같은 세상 가치들을 가지겠다고 애를 써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만 합니다.

세상 가치들을 가지겠다고 애쓰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복장이 터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가지도록 몸값을 매겨놨더니 사탄에게 속아서 배설물에 불과한 세상의 가치들로 몸값을 매기고 살면서 울고불고 불평불만에 난리가 났습니다. 이 세상에는 내 몸값을 매길 수 있는 가치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의도만 이루어지면 됩니다. 그렇기에 무조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몸값을 매길 수 있기 위해서 주님이 죽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마음은 땅에 남아서 불평불만 할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자녀에게 불평불만이 있다면 나는 더 나은 수준을 가진 아이의 부모가 될 자격이 있다라고 자기 몸값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좀 더 나은 아내를 가질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좀 더 능력 있는 남편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자기 몸값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평불만이 이러한 몸값 의식에서 나옵니다. 몸값 의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주님이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이 세상 것을 하나님과 비교하자면 휴지 조각이나 배설물도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좋은 하나님으로만 책정될 수 있는 몸값의 주인공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이 땅에 오셔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면서까지 회복하신 나의 본래의 몸값을 찾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더 많이 가짐으로써 나의 본래 몸값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좋음 앞에서는 이 세상 것들은 휴지 조각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형되심을 보고 산 아래 모든 좋음을 다 잊어버린 것을 믿는 것입니다. 찬물에 손을 넣으면 차가움을 느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좋음은 믿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좋음을 마주한다면 이 세상의 좋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며 완전히 망각할 것이다. 내가 지금 그런 것들을 못 가졌다고 내 몸값 의식이 작동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몸값을 불려 나가자.’라는 생각으로 사는 자들이 선민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세상 가치들로 몸값을 매기며 지옥을 살았음을 회개합니다. 이제 세상 가치로 몸값을 매기려는 의식이 십자가에서 철저히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조물주요 주권자이신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으로만 내 몸값을 불려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