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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자유롭게 살려면 제발 좀 싸우자>의 줄거리 :
“네 평생에 항상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라.” 즉 선민은 출애굽 사건을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즉 별세와 모세의 출애굽을 같은 단어 ‘Exodus’로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선민은 출세상 한 사람들입니다. 이 출세상이 바로 해방이고 자유입니다. 출애굽이 노예의 삶으로부터 해방하는 사건인 것처럼, 십자가 출세상의 사건은 선민의 마음을 이 세상 예속 상태로부터 해방하는 자유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유를 지키는 싸움 법을 모릅니다.
자유롭게 살려면 제발 좀 싸우자
(신명기 16:1~22)
1.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2.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본문에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에 대한 언급이 되고 마지막에는 공의로 재판하라는 요청이 이어집니다. 절기에 대한 말씀은 질릴 정도로 반복되어 나오고 있지만, 본문에는 그 의미가 새롭게 와닿는 맥락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3절 마지막을 보면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의미와 취지를 기억할 것을 요청하며 칠칠절과 초막절을 언급합니다. 유월절은 물론이거니와 칠칠절과 초막절도 출애굽을 기념하는 연장선상에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자유롭게 살려면 제발 좀 싸우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읽은 대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는 출애굽을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는 자들이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선민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선민은 출애굽을 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해에 처음으로 추수한 보리나 밀을 하나님께 바치는 칠칠절과 모든 곡식과 과일을 거두어서 곳간에 모아두는 초막절 또한 출애굽의 의미와 취지를 온전히 기억하여 지키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마음에 와닿는 여러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모세의 출애굽과 예수님의 별세를 똑같이 헬라어 엑소도스(ἔξοδος)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무척 기쁩니다. 구약 성경에서 제일 큰 사건이 출애굽이라면 신약 성경에서 제일 큰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러한 출애굽 사건과 십자가 사건을 하나의 의미로 통합하는 단어가 엑소도스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출애굽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별세하시는 일을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의논하셨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인 출세상을 뜻하며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감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드러나는 복음의 핵심이자 신앙의 핵심은 출세상과 승천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믿음이란 세상에서 탈출한 자로서 하늘에 올라간 자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자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탈출해서 하늘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출애굽은 구약 시대 선민의 정체성의 기반이었습니다. 이 출애굽은 출세상과 연결됩니다. 선민은 광야로 나갔습니다. 광야는 세상이 없는 곳입니다. 삶이 성립될 수 없는 곳이기에 출애굽도 출세상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았지만, 광야에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한편, 출애굽과 출세상은 노예 생활에서 해방됨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노예 제도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의미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노예 생활이란 예속됨을 의미합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은 자기 있음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대상을 빨아들이고자 합니다. 마음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다는 근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이 지배하게 됩니다. 내가 있음을 든든하게 느끼려면 나 이외의 대상을 존재감으로 가져야만 합니다. 또 공백의 마음인 영은 만족감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만족할 수 없다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불안과 공허를 제일 무서워합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은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워짐으로써 불안을 퇴치하고 공허를 이기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존재감과 만족감을 얻기 위하여 세상에 예속된 상태를 노예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공백의 마음은 영입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이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워져야 할 대상은 본래 영이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여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 예속되었고, 세상이 없다면 존재감과 만족감으로도 채워지지 못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예속된 노예의 상태입니다. 나인성 과부를 예로 들어봅니다. 나인성 과부는 아들에게서 존재감과 만족감의 근거를 찾았습니다. 아들이 건강해야 마음이 평강합니다. 아들이 성인이 되어 잘될 것을 생각하며 만족하고자 합니다. 나인성 과부의 마음은 아들에게 예속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은 이러한 마음의 구조를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에 올라가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낼 때, 일주일 동안의 무교절 기간에는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은 고난의 떡이라고 불렀습니다.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은 익숙한 세상 것에서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워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세상 것을 맛있게 여기는 일은 우리에게 무척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의 근성입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이 물질세계에서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워져서 직성이 풀리는 상태가 세상에 예속된 상태인 것입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을 먹음이란 세상에 있는 것의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워지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유교병도 무교병도 떡입니다. 이는 곧 마음인 영이 먹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유교병이 물질세계에 있는 대상으로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무교병은 세상 것이 아닌 것을 먹음을 의미합니다. 선민은 세상이 성립할 수 없는 광야로 나가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만을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워야 했습니다. 무교병을 먹는 것은 바로 이것을 기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민은 출세상의 의미를 담은 출애굽의 취지를 평생 기억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선민이라면 출애굽의 사람이다. 출세상의 사람이다. 공백의 마음인 영은 더 이상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존재감과 만족감을 찾지 않는다. 세상에 예속되지 않는다.’라는 정체성을 갖는 자가 선민입니다.
한편, 이로부터 선민의 고질적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엑소도스의 의미대로 예수님과 함께 별세하는 자, 다시 말해 출세상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내 마음인 영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 보는 상태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사실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 마음에 주어진 영적인 환경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 환경에 참여하는 상태에서 문제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막상 문제를 만나면 마치 맨땅에 헤딩하듯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주어진 영적 사실들을 다 잊어버리고 세상을 대면합니다. 그러면 또 세상에 예속되는 상태가 됩니다. 기껏 출세상이 정체성의 근거임을 알았다면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상태를 기본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으로 사는 삶에 문제가 생기면 그 기본을 잊어버립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했냐는 듯이 곧바로 마음이 세상 문제에 가닿고 먹혀버립니다. 이로부터 걱정, 근심, 불안, 불만, 부족함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내 마음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영은 물질세계에서 존재감과 만족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영은 영이신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죽고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심으로써, 내 마음이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는 조건을 다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이러한 사실이 없는 것처럼 삶의 문제를 대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예속된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거나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출세상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가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이방인의 상태로 돌아가서 세상 문제를 만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선민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봅니다. 내 마음이 영적인 사실들 안에 머무는 상태에서 몸으로 사는 세상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심각한 건강 문제, 재정 문제, 자녀의 문제가 발생했다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인 영은 엄연한 영적 사실들로 이루어진 환경 속에 들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이란 영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음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루시는 영적 사실들에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삶에 발생한 문제를 그대로 대면할 뿐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절대로 문제에 직접 닿아서는 안 됩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 문제에 내 마음이 닿았다면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이 아닙니다. 건강 문제, 재정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등에 대해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다면 세상 문제에 마음이 가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이유가 없음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자꾸 세상에 예속되는 나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예속되려고 하는 나를 발견했다면 예수님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 예수님의 죽음이 거짓말이 아닌 한은 내가 죽은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자꾸 세상에 가닿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세상에 가닿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출애굽은 곧 출세상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자, 세상의 예속을 떠난 자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몸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휩싸여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올라가 삼위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마음은 몸이 아픈 문제에 직접 가닿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몸의 아픔이 심각하게 다가와서 내 마음을 위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몸의 아픔이 내 마음을 하늘에서 끌어내리려 합니다. 이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마음의 자유를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도로 싸우는 것입니다. 다만 무슨 기도를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내몸에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예수님 덕분에 출세상이 이루어져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픈 몸이 내 마음을 끌어내리려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로 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몸이 아픈 것과 하나님의 크기를 객관적으로 비교해 봅니다. 내몸이 아무리 아파도 내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해야 하는 일은 병든 내몸을 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마주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훨씬 더 큰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내 마음에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감을 크게 갖고, 하나님 자신으로 인한 만족감을 크게 갖게 해 주시옵소서. 내 마음에서 몸이 아픈 상황이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해 주시옵소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때까지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싸움의 기도를 합니다.
내몸이 아픈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또 내 삶을 생각하여 계획하신 일들이 있고 이끌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몸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내가 손댈 필요가 없습니다. 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3~4년 전에 각혈을 할 정도로 호흡기가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갔습니다. CT 촬영을 하고 의사가 하는 말이 70~80%는 심각한 폐암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방송을 해야 하기에 일단 폐렴약을 받아서 2주 정도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 다시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약을 먹은 후에 증세가 나아져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그 이후로 각혈을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간헐적으로 통증을 느꼈습니다. 폐암이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기억하고 있기에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그 말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의학이나 약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몸이 아픈 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또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몸이 있는 세상을 탈출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몸이 아프더라도 이 상황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폐암이 의심될 수도 있는 통증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함을 떠올립니다. 그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내 마음이 세상을 탈출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병원으로 가게 돼도 좋고, 방송을 중단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몸의 아픔이 제 마음에 강하게 압박감을 주고 내 마음을 끌어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저의 마음을 다시 세상에 예속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커져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감으로 커져야 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씨름합니다. 이 씨름을 하다 보면 통증이 없어져서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다시 통증이 오면 또 싸우는 기도를 합니다. ‘폐암에 걸리는 것조차도 사소하게 여겨질 정도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크게 갖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싸우다 보면 통증이 없어집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병원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이 무슨 병원을 가느냐? 약을 왜 쓰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을 쓰거나 병원에 가기에 앞서 기억해야 해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엄연한 영적인 사실들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함으로 세상을 탈출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를 보며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당신의 생각의 기능을 따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전부 아버지의 생각만을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하고 계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만나는 문제들이 사소하게 보일 정도가 되기까지 아버지의 존재감과 만족감을 내 안에 크게 할 수 있기 위해서 싸우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문제가 희미해져서 또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듯이 문제를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만 아프면 병원부터 갑니다. 이것은 병원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영적인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얻게 된 영적인 사실 안에 마음이 들어 있는 상태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사소하게 아무 문제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하나님의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워나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며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이 왜 물질세계에서 존재감과 만족감을 찾아야 합니까? 몸이 건강해야 만족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쓸모가 있습니까?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은 내 마음의 만족에 어떤 쓸모가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녀가 잘 돼야 만족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쓸모가 있습니까? 이러한 이유에서 모세는 절기를 지킬 것을 이야기합니다.
9~11절을 보면 칠칠절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칠칠절은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날 보리의 첫 단을 드리는 초실절로부터 49일이 지나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보리나 밀을 추수하는 이 시점에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인 성전에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한 것일까요?
이 시기는 땅에 씨를 뿌린 뒤에 첫 번째로 수확하는 때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한 일의 열매가 맺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결실은 내 마음을 세상으로 강력하게 예속시키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칠칠절에 모여서 축제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축제는 수확한 밭과 집에서 하면 됩니다. 밭이 있는 집과 동네를 떠나 멀리 있는 성전까지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이러한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내가 땅에서 한 일의 수확이 이루어진 현장을 멀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삶의 현장은 멀리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은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은 크게 보고 세상에서 내 일의 결실은 작게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몸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 삶의 문제가 잘 되든 못 되든 사소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작게 보고, 못 되면 못 되는 대로 작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삶의 현장을 떠나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은 크게 보고, 성공과 수확이 이루어진 삶은 멀게 보는 것이야말로 칠칠절의 의미입니다.
출애굽의 해방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예속되지 않음을 관철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일을 사소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이 잘 되면 그 일에 마음이 예속됩니다. 잘 되는 현장에서 마음이 멀리 떠나서 마치 티끌처럼 보이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크게 보라는 것이 칠칠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수장절이라고도 하는 초막절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초막절은 보리와 밀을 수확할 때와는 다르게 일 년 동안의 모든 곡식과 과일 전체를 다 모아서 곳간에 넣어두는 시기로서 가장 부요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성전에 올라가서 일주일 동안 초막을 짓고 살아야 했습니다. 초막을 짓고 산다는 것은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던 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기입니다. 만나가 주어지고 옷과 신발도 해어지지 않았지만, 광야는 기본적으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은 한해 중 가장 소유가 많은 시기입니다. 이때 성전에 올라가서 가장 가난했던 시절을 기념합니다. 칠칠절이 내가 한 일의 결실을 의미한다면, 초막절은 내 소유가 가장 많을 때입니다. 소유란 결국 내 마음을 세상에 예속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는 것에 초막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사소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적게 가진 것을 안 좋은 일이라 여긴다면, 많이 가진 것을 좋은 일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많이 가진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적게 가진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가지려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간다는 것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가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 삶의 일이 잘 되건 못 되건 죽어야 합니다. 선민이 보리와 밀을 수확한 현장을 떠나고, 곡식을 곳간에 모아둔 현장을 떠나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내 삶의 현장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따라 세상에서 멀리멀리 떨어져서 하나님이 가장 크게 보이는 장소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정체성입니다.
세상 삶이 잘 됐어도 우리는 예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는 동안의 성공은 많이 가지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속되지 않는 것이 성공입니다. 세상일이 잘 풀렸다고 잘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예속되지 않아야 잘된 것입니다. 세상일은 마음에서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듯이 마음의 자리를 하나님께로 옮겨서 하나님이 크게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져야 하고,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감이 커져야 합니다. 세상일이라면 잘 돼도 사소하고 못 돼도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싸움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잘 되든 못 되든 사소하게 여기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세상에 예속되고 싶어 하는 기질이 아직도 있습니다. 죄적인 체질, 저주받은 체질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세상 예속성과 싸움으로 자유를 지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영이기에 물질의 세계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몸에 병이 생긴 상황에서도 마음은 하늘로 떠나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아직도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금은 항상 최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나도 모르게 세상에 예속된 부분들을 끊으시려는 계획과 배려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세상 예속성과 나의 끈질긴 죄적 체질을 염두에 두시고 삶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세상 기준에서 잘못된 상황처럼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나를 위한 최선입니다. 영의 세상 예속성을 끊어내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반영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삶이 아무리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여러 문제를 마주합니다. 건강 문제, 돈 문제, 자녀 문제와 같은 삶의 문제를 당할 때 맨땅에 헤딩하듯이 곧장 마음이 가닿아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사실들이 나한테 주어진 적이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은 믿음을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마음이 문제에 가닿은 후에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출세상과 출애굽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 상태에서 몸으로 만나는 세상 문제를 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이 문제에 가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해결하려 하고 씨름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몸이 만나는 문제를 마음으로 대면하는 것과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으로 대면하는 것의 크기를 비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객관적인 크기대로라면 마음은 하나님을 대면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안 움직이기에 싸워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문제보다 하나님이 훨씬 큽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훨씬 큰일입니다. 설령 내가 병에 걸려 죽을 상황이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갖는 것보다 큰일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크기를 비교하자면 사소한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의 체질 때문에 그것을 사소하게 여길 수 없기에 싸워야 합니다. 적어도 당면한 문제를 넘어갈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지고 하나님의 만족감이 커지도록 싸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을 보면 일곱 교회에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신 것입니다. 교인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입니다. 싸워서 지켜야 하는 자유는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을 크게 가짐으로써만 지켜낼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몸 찢기고 피 흘려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허락하신 이 자유를 어떻게 하든지 지켜내기 위하여 제발 싸움박질 잘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