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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몸 죽음보단 마음 썩음이 무섭다>의 줄거리 :
인류에게 몸의 죽음은 당사자에겐 두려움이고 주변 사람들에겐 슬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민들이 몸의 죽음에 대하여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내 마음은 도대체 왜 내몸의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그리고 왜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이 상실의 슬픔일까요? 마음과 몸 사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죽음이 두렵고 슬픈 이유는 마음이 몸에 유착된 결과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일은, 마음이 몸에 유착되었기에 벌어지는 마음 썩음입니다. 마음은 반드시 몸에서 분리된 채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몸 죽음보단 마음 썩음이 무섭다
(신명기 14:1~29)
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몸 죽음보단 마음 썩음이 무섭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 마음은 공백의 상태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하는 공백의 마음이 곧 영입니다. 공백의 영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공백의 영인 우리의 마음은 채움이 필요하지만, 단순히 속이 빈 그릇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살아있는 인격체로써 속이 비어있음을 느끼고 그 속을 채우려고 계속해서 빨아들이려는 흡입력이 작용합니다. 다만 아무것이나 빨아들여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마음의 썩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백인 마음은 존재를 느끼는 기능과 좋음을 느끼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백인 마음은 빨아들이는 흡입력으로 존재의 무게를 느끼는 존재감과 좋음의 대상으로 채워질 때의 만족감이 운행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느낌이 썩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절대 평강, 절대 만족, 절대 기쁨, 절대 감사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공백 안에서 운행되고 있는 느낌의 표현들입니다. 그 느낌들이 썩어버리고 부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적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을 봅니다.
모세는 1절에서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가나안 족속들이나 애굽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동시대 사람에 대한 애도법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칼로 자기 몸을 자해하고, 눈썹 사이의 털을 밀어서 누가 보아도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눈에 띄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자해를 하는 이유는 고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마음에서 느끼는 고통의 정도가 살을 베일 때의 고통과 같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몸을 자해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사후 세계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들은 죽은 사람이 가는 음부를 다스리는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해를 통해 음부의 신을 달래서 그 신이 죽은 사람을 보듬어 주고 안식을 누리게 도와주기를 염원했습니다. 그리고 눈썹 사이의 털을 밀었다는 것은 눈썹을 반쯤 밀어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극도로 슬퍼하고 있음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미신은 보편적으로 존재합니다. 비슷한 예로 우리나라에는 조상신의 개념이 있습니다. 사업이 안 되는데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 조상신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양지바른 곳으로 묫자리를 옮깁니다. 이런 모든 것이 사후 세계에서 비롯된 미신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일한 참 신이신 하나님뿐이며 인간이 사후 세계에서 신이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신은 모두 사탄에 속은 결과입니다.
물론 사탄도 있고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도 실재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죽음 이후에 관여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몸이 죽은 후에는 하나님을 심판자로 만나느냐 아버지로 만나느냐의 차이만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믿음은 사탄과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의 거짓된 작용이고 속임수입니다. 예를 들어 무당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접신하여 목소리를 따라 합니다. 이것은 할아버지의 영혼이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자기의 졸개들인 귀신을 통하여 할아버지를 흉내 내며 속이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 사람의 조부모나 부모가 어떻게 죽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당의 접신이란 결국 귀신들이 분장하고 속이는 것을 전할 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성민(聖民)이란 거룩하게 구분된 선민을 가리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호와의 성민이라면 몸의 죽음에 대해서 애도를 표현할 때 절대로 이방인의 방식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이 다른 모든 사람과 구분되기를 바라십니다. 죄와 저주 속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에게 몸의 죽음이란 당사자에게는 궁극적인 두려움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슬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민이라면 몸의 죽음에 대해서도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태어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죽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누가 죽었다고 커다란 상실로 여기며 슬퍼한다는 것은 선민에게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음이 몸의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를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의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영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몸의 죽음입니다. 몸의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비어있는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상태가 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불안과 공허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존재의 존재감으로 마음을 채움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거를 마련합니다. 그렇기에 몸이 죽는다면 이제 어떤 대상으로도 마음을 채울 수 없게 됩니다. 이로부터 마음의 공백이 채워질 수 없다는 궁극적인 불안이 생겨납니다. 마음이 채워질 수 없으면 기쁨과 만족도 없기에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불안과 공허를 느낄 때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자기 멸절이고 소멸입니다. 마음을 더 이상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음이 확실하다면 불안과 공허를 느낄 수밖에 없고, 그러한 상태에서는 자신이 멸절되어 없어지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영은 없어질 수 없기에 익숙해질 수 없는 불안과 공허를 영원히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공백의 마음은 이것을 매우 두렵게 여겨서 쫓기다시피 24시간 무엇인가를 빨아들이고자 합니다. 다만 아무것이나 빨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마음에서 좋다고 확신하는 대상을 빨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빨아들임을 욕구, 소원, 희망, 바람, 기대, 간절함 등등으로 표현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방인과 선민이 몸의 죽음을 마음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비교해 봅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이 몸에 유착된 상태의 죄와 저주 속에서 태어납니다. 따라서 마음에서 좋게 여겨 공백을 채우고자 24시간 작동하는 흡입력의 대상은 전부 몸을 통해서 만나는 것들입니다. 유착이란 경계가 없이 붙어버린 상태입니다. 쉽게 말해 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피부로 느끼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좋음을 선택합니다.
좋음의 예를 들어봅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있기에 건강과 장수는 기가 막히는 좋음으로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몸에 붙어있기에 가까운 사람에게서 좋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가족 간의 사랑과 우애를 중시하고, 애인과 친구를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또 마음이 몸에 붙어있기에 몸으로 하는 일이 잘 되는 것을 좋음으로 여깁니다. 이로부터 성공과 형통을 소원하고 재물과 권력을 갈구함이 발생합니다. 또 마음이 몸에 붙어있음으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만지고 누릴 수 있는 각종 명품들을 좋음으로 여깁니다. 명품 아파트, 명품 자동차, 명품 시계, 명품 가방, 명품 학교 같은 것들을 마음의 좋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있으니 맛있는 음식이 너무나 좋습니다. 맛있는 음식 먹겠다고 외국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마음이 몸에 붙어있으니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이 좋게 여겨집니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물에 들어갈 때의 안락함이나, 샤워를 하고 포근한 이불속에 들어가서 나른한 몸을 녹이는 기분은 너무 좋게 느껴집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혹은 크리스마스 축제에 대한 기대감 또한 결국 마음이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느끼는 포근함과 여유로움과 넉넉함에 기인합니다. 이것은 모두 마음이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좋음에 대한 바람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몸에 붙음에서 비롯된 좋음은 다방면으로 존재합니다. 눈, 코, 입, 귀, 피부의 오감에서 느껴지는 좋음이 줄줄이 서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듯 공백의 영인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경우에 제일 무서운 일은 몸의 죽음입니다. 몸이 죽을 때 마음으로 좋다고 빨아들여서 채우고 싶어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더 이상 좋음으로 채울 수 없는 게 확실해지는 상태입니다.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발생하는 불안과 공허와 정면으로 부딛히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근원적 불안과 공허를 피하게 해주는 좋음과 채움의 대상이 몸이 있어야 만날 수 있는 세상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몸이 죽으면 좋은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이제 마음은 근원적 불안과 공허를 정면으로 느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은 나의 소멸과 멸절을 가장 큰 복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있는 동안에는 이것을 피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입니다. 이것이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당장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모임을 떠올리게 됩니다.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즐깁니다. 이것은 모두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기에 죽은 놈만 불쌍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본래 공백의 영인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봐서 알지만 마음은 세상에서 바라는 것 백 가지 중에 한두 가지만 이루어져도 기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물거품 같아서 2~3일만 지나면 없어지고 맙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좋게 여겨서 그것으로 채우고자 하는 동안에 마음은 그 대상의 크기만큼 수축하고 긴장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돈 십억을 갖기를 바라는 동안에는 하나님 크기의 마음이 십억만큼 수축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십억을 실제로 갖는 순간 마음의 긴장은 풀립니다. 마음을 수축하게 하던 힘이 사라져서 마음은 다시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본래 크기로 돌아갑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토록 바라던 십억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에서 십억은 티끌만도 못합니다.
물론 십억을 원할 때는 마음이 수축하고 긴장하고 있기에 그것만 가지면 기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대상에도 적용됩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갖고 싶어 할 때마다 마음은 그것의 크기만큼 수축합니다. 외제 차를 갖고 싶다면 그만큼 마음이 수축합니다. 그런데 그 수축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갖는 순간 마음의 수축은 풀리고 별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또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결국 세상에 사는 동안에 바라는 모든 것은 마약과도 같습니다. 마음이 몸에 유착이 된 상태에서 희망하고 기대하고 바라고 소원하지만 실제로 마음 채움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것들을 소원하고 희망하는 동안에는 마음속의 근원적인 불안과 공허를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희망은 마약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지금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는 희망은 참된 소망입니다. 실제로 채워지면 만족할 수 있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상 것을 향한 희망은 다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년에는 좀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내년에는 연봉 일억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품지만 이것은 근원적인 불안과 공허의 무서움을 잠시나마 외면하게 하는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선민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사실로 존재합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에스겔의 환상 등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천국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그렇기에 죽은 자에 대해서는 음부로 갔다고 표현하든지,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든지, 조상에게로 돌아갔다는 등의 표현을 씁니다. 실제로 모든 조상들이 다 죽었기에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관용적이고 습관적인 표현이 사용된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에 대한 개념의 부재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 자신과 마음의 관계를 문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민의 시조인 아브라함의 경우를 떠올려 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2절을 보면 아브라함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대로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아내 사라를 마음에서 버렸으며, 땅에 대해서도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넘겼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미래에 대한 일까지도 마음에서 버렸으며, 약속을 통해 태어난 이삭까지도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 지키려고 했던 것은 영광의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지킴이란 지금 이 시각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언제나 일등이 되시는 상태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조명이 비춰서 내 의식이 보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뿐인 상태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의 일등 되심을 가리려고 하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 아내 사라, 살아야 할 땅,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는 미래, 그 미래의 약속을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는 고리인 이삭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등 하시는 상황을 방해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일등 하시는 상황이 방해받을 때마다 마음에서 그들을 죽였습니다. 이는 곧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 마음을 죽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마음에서 일등을 하시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아브라함의 인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백의 영인 마음과 의식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냈습니다. 하나님이 일등을 하시도록 유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은 몸의 죽음을 어떻게 느꼈을까요? 아브라함에게도 공백의 영인 마음이 채워지고자 무엇인가를 빨아들이려는 힘이 있었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마음의 흡입력을 하나님께만 적용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의미하는 대로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언제나 일등의 자리에 계셨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아브라함의 마음은 다 하나님께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공백의 마음에 생기는 불안과 공허를 제거하는 대상은 영원하신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마음이 쏠리는 상태에서 몸이 죽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애초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몸의 죽음이 마음 채움에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몸을 통해서 마음 채움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일등이었고,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쏟고 있는 중에 몸의 죽음은 마음 채움과는 무관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유일한 대상으로 마주 보며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하여 이제는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선민이 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냄을 평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선민에게는 몸의 죽음은 두려워할 일이 아닌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해서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몸이 죽는다고 해서 마음 채움의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몸을 통해서 좋음을 얻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죽는다고 해서 마음에서 조금의 상실감도 갖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선민에게 몸의 죽음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좋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집 밖에 내놓은 쓰레기를 누가 가져가는 것을 두려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좋다고 느끼는 것을 빼앗긴다고 여기기에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좋음을 추구하고 빨아들여서 채워야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상대한 경우는 어떨까요? 사는 동안에 기를 쓰고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다 드렸습니다. 이러한 선민은 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야 합니다.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유일한 대상으로 빨아들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선민이 몸의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본문은 선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풀어보자면 ‘몸의 죽음이 두렵고 슬프냐? 그렇다면 네 마음이 나를 향해 있는지 확인해 보아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몸이 죽는다고 하나님을 놓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내 마음의 보물이 하나님뿐이라면 몸의 죽음은 두렵고 슬플 일이 아닙니다. 선민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만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나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야곱의 경우는 특별히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몸을 통하여 좋음을 추구하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몸으로 만나는 세상 것들을 좋아하여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말년이 되어서야 뒤집어지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짜 좋음을 깨달았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은 진즉에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살았는데, 하나님을 통해서 세상의 좋음을 얻고자 했던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2절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의 생사(生死)는 하나님께서 살고 죽음을 평가하시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아버지 품에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는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의 자리에서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면 죽어서도 그 마음은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초대교회의 시대를 지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억 명의 선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다 하나님의 품에 개별적으로 안겨 있습니다. 선민이라는 집단으로 한꺼번에 안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안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일대일로 안으십니다.
저나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며 사는 것입니다. 몸이 죽는 것이 하나도 아쉬울 것도 없고, 안타까울 것도 없을 정도로 아버지를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다 죽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안으시듯 내 공백의 영인 마음을 당신으로 채우셔서 편히 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과 더불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영원히 살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품에 안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죽음을 써먹어야 합니다. 몸은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이제 죽는구나’하고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써먹어야 합니다. 지금 죽더라도 마음에서 아쉬움과 슬픔과 두려움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도록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아버지를 가져야 할까요? 지금 죽어도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쉬울 것도 없고, 미련도 슬픔도 두려움도 없을 때까지 아버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죽음을 써먹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하셨을 때 동네 어귀에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눈물을 우리 수준에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사람이 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는 상태에서는 육체가 죽으면 육체로 만나던 세상 것들의 좋음을 잃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눈물의 이유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상번제가 제도적으로 있었지만 이미 그 의미는 퇴색한 시대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만 마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지켜낼 수 있고, 하나님과 친해질 수 있고 하나님을 보물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이루시기 전에 친하게 지내시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슬픔은 나사로의 몸이 죽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했음을 슬퍼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슬픔의 이유를 알았다면 죽음을 이용해야 합니다. 죽기 전까지의 기간은 하나님을 갖는 기간입니다. 살아있을 동안에 몸의 죽음이 전혀 슬프거나 무섭거나 미련이 남거나 아쉬울 것이 없을 만큼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죽음을 써먹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금 죽는다고 해도 아쉬움이 없나?’라고 자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몸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아쉽고, 슬프고, 두렵고, 미련이 남을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아버지를 더 갖습니다. ‘아버지! 지금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가신다고 하시더라도 진심으로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과 무서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이제 아버지를 내 마음에서 지켜내기 위해서 내가 싸울 수고를 하지 않으니 기쁘게 여길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이라는 자들이 육체의 죽음을 극히 슬퍼하거나 무서워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네 마음이 영원한 천국 보좌에 있는 나에게 와 있다면 도대체 몸의 죽음을 무서워하고 아쉬워하고 미련이 남아 있느냐? 아직도 그렇게 세상이 좋으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미련이 남습니다. 엄마라면 ‘아직 아이가 어려서 제가 있어야 해요.’라고 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보다 아버지의 뜻과 계획과 주권이 더 강렬하게 살아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라는 것은 다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우리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슬퍼하지도 말라는 것일까요?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집안은 가난한데 무척 똑똑한 아이가 하버드대학 로스쿨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가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집안 걱정을 하며 떠나기를 주저하는 아이를 보니 눈물이 흐릅니다. 기쁨이 가득한 가운데 함께 있지 못하는 아쉬움에 눈물이 납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천국과 하버드대를 비교하면 천국이 더 좋은 곳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내가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아버지를 많이 가졌다면, 나와 같이 아버지를 많이 가진 사람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이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의 눈물은 날지언정 나와 같은 성도의 죽음이 슬플 이유가 없습니다. 하버드대 로스쿨에 장학금 받고 가는 아이를 보낼 때의 심정으로 눈물이 날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는 나의 죽음을 이용함으로써 더욱 견고해집니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십자가 죽음을 시도하면 세상에 대한 죽음은 점점 마음을 꽉 채워갈 것입니다. 몸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이 몸의 죽음을 그저 찾아올 일로 여기지 말고 수시로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꽉꽉 채운 실속 있는 죽음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로 부자 됨에 박차를 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육체를 입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 태어난 우리에게 육체를 벗어야 하는 죽음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기 전까지 죽음을 이용하게 하시며, 죽음이 전혀 두렵고 아쉽지 않을 만큼 살아있는 동안에 아버지만으로 마음이 충분히 채워질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