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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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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팔기, 하나님 벌기_태승철

by 태승철 · 25-12-11 09:09 · 338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팔기, 하나님 벌기>의 줄거리 :

선민이 다른 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을 언급하시면서 경계심을 늦추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은 십계명 중 제1계명입니다. 즉 선민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가장 우선적인 염려라는 뜻입니다. 또 제1계명이 사실상 십계명 전체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결국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은, 하나님 팔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 벌기를 중단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팔기와 벌기가 무엇인지를 좀 깊이 들여다봅니다.

 

 

하나님 팔기, 하나님 벌기

 

(신명기 13:1~18)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5.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6절 이후에는 가족이나 지인처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신을 섬기도록 유혹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중이 모인 가운데 당사자가 먼저 손을 대어 치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치라고 하셨습니다. 설령 가족이라도 다른 신을 섬기게 했다면 죽이라는 말씀이 굉장히 잔혹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불량배들이 나타나서 다른 신을 섬기게 할 경우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들은 영적 불량배 행위를 하는 자들로서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흔히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유명인들입니다. 대중적으로 신뢰를 받고 인기가 있는 각 방면의 스타들을 가리킵니다. 세상 스타들을 따라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에서 언급된 다른 신이란 이방인이 섬기는 우상이 아닙니다. 선민 내부에서 다른 신을 섬기도록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 팔기, 하나님 벌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팔게 될까요? 또한 하나님을 팔지 않아야 하나님을 벌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과 하나님 팔기와 벌기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팔거나 하나님을 버는 것은 선민만이 할 수 있습니다. 팔기 위해서는 일단 주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민이란 하나님께서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고자 당신을 허락하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만이 하나님을 팔 수 있고 하나님이 당신을 허락하지 않은 이방인은 팔 수도 없습니다. 또한 선민은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을 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상대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선민은 하나님을 알고 더 많이 벌어서 친해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모세는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됨을 이야기합니다. 다만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단순히 이방인을 따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그 이상의 다른 신이 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를 신으로 믿고, 힌두교에서는 무려 33천이 넘는 신들이 있고 그중에는 다시 주요 신앙의 대상이 되는 3대 신이 있다고 합니다. 불교는 본래 신을 믿는 종교는 아니지만 대중적으로는 석가모니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부처나 보살 등이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무속에서도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단순히 이방인을 따라 개종하여 우상 앞에서 절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민 내부에서 나타나는 다른 신에 대한 유혹을 이겨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다른 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경우, 친한 사람이 다른 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경우, 사회적으로 인기 있는 지도자나 스타가 다른 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경우가 이야기됩니다.

1절을 보면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라고 했습니다.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귀신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거짓 선지자나 귀신들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선민이 하나님보다 이적과 기사를 더 사랑하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성공과 형통을 바랄 때 선민은 하나님보다 이적과 기사를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아무런 소원도 없이 이적과 기사를 바라는 법은 없습니다.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하려 하기에 이적과 기사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시는 경우는 어떠할까요? 성경에 기록된 각종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이적과 기사를 대한다면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아닌 이적과 기사에만 시선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경우에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것은 다른 신을 섬기기 전에 일어나는 부분입니다. , 이적과 기사를 보게 되었다면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서 성공과 형통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친한 사람이나 유명인이 나를 다른 종교의 신으로 이끌어 가는 경우도 내 마음이 하나님보다 그들을 먼저 보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종교로 전향하여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모세는 선민이 다른 신을 섬기고자 하나님을 배반하고 넘어가는 과정을 언급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더 비중을 두고 보아야 할 것은 왜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의 성공을 보기에 이적과 기사를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 대신에 가족이나 친한 지인들을 바라보는 동안 그들에 의해 다른 신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 대신에 신망이 두텁고 인기 있는 사람을 보고 있는 동안 그에 의해 다른 신을 섬기게 됩니다.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왜 마음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보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일인 이유는 마음으로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바라보면 이미 다른 신이 생겨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의 신만 다른 신이 아닙니다. 이슬람의 알라, 힌두교의 브라크마와 비슈느와 시바와 33천의 신들, 일본에는 8백만 신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다른 종교의 신으로 넘어가기 이전에도 마음에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중에 다른 신 섬기기는 진행됩니다. 마음의 다른 신과 종교적 다른 신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다른 신 섬기기가 일어난 후에 다른 종교의 신을 섬기는 일도 발생합니다.

 

마음에서 다른 신을 섬김이란 바라봄입니다.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그 대상은 다른 신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이 다른 신을 바라봄으로써 섬기게 된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바라보면 그것이 다른 신입니다. 그 상황 자체가 하나님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마음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가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를 바라보기 위해서 하나님을 팔아먹은 상태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때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셨고, 홍해를 가르셨으며, 광야에서 사십 년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적들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을 상대하는 자들이 선민이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마주 봄이란 마음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선민 됨이란 마음으로 마주 볼 대상이 하나님으로 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공백을 갖고 있기에 마주 보는 대상을 빨아들여서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것은 자동으로 발생하는 일이고, 빨아들이기 싫은 대상은 애초에 마음으로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물론 원수를 마음에 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경우 또한 원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상황을 원하며 마음에서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백의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는 반드시 채움을 위한 빨아들임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24시간 쉬지 않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우리의 영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빨아들여서 채워지기 위해서는 내 마음도 영이어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물질 속에 가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공백의 마음이 내 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이 아닌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 것들을 빨아들인다면 영인 마음의 육체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주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항상 있어야 하고, 쉬지 않고 있어야 하고, 범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 봄이 이루어집니다. 마주 봄으로써 하나님을 벌 수 있기에 항상 기쁘고, 마주 봄으로써 인격적인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하는 기도가 이루어지고, 마주 보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에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사가 나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우에서 하나님과 마주 봄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들어 있어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항상 볼 수 있습니다.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봄은 24시간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사업을 걱정합니다. 내 마음이 나라를 걱정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이미 예수님 안에서 튕겨 나와서 하나님을 등진 것입니다.

마음이 다른 대상을 보는 일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이 자녀를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등져야 합니다. 다만 그냥 등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값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팔아버리고서야 자녀를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를 보려면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팔아버려야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세상의 어떤 대상을 바라보든지 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24시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빨아들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다른 대상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등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값으로 지불하고서야 다른 대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원수를 대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원수를 바라봄이란 결국 원수가 없어지는 상황을 바라는 것이고 마음으로 원수가 없는 상태를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값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은 24시간 봐야 할 분이기에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려야만 원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값을 지불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보든, 나라를 보든, 사업을 보든, 원수를 보든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마음으로 보았다면 그 대상들을 하나님 값으로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녀를 마음으로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은 하나님을 등져야 합니다. 그러나 본래 24시간 하나님을 보는 것이야말로 내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운명입니다. 하나님을 등진다는 것은 내가 지금 마음으로 보고 있는 자녀라는 대상을 하나님 값으로 올려놓고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팔아먹고서만 마음으로 자녀를 볼 수 있고 사업을 볼 수 있고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이 성전을 기억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성전 생활화를 하면서 24시간 마음으로 바라봐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으로 24시간 봐야 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팔아치운 것이고, 그 대상을 하나님 값으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하나님 값이기에 마음으로 보는 대상의 신격화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마음에서 자녀를 보려면 하나님을 팔아먹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24시간 하나님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자녀를 본다면 하나님을 팔아먹은 것입니다. 이제 자녀가 하나님 값이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녀가 하나님 값이기 때문에 내게 신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영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 외에는 다른 대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바라보려면 하나님을 팔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팔고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하나님 값이 됩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그 대상을 신격화하는 것이 됩니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다른 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의 신을 섬기기 이전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마음에서 하나님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바라보는 대상이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하나님 값으로 등극한 상태에서는 굳이 다른 종교로 가지 않더라도 다른 신을 섬기는 상황은 일어납니다. 마음에서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팔아버리게 되고, 그렇게 바라보는 대상이 하나님 값이 되어버리는 무서운 일입니다.

마음의 바라봄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은 공백이기에 24시간 무엇인가를 빨아들이고자 합니다. 바라보는 대상을 빨아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외제 차를 보고서 잠깐이라도 나도 저런 차를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면 그 순간 마음은 자동차를 바라보고 빨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만 채워져야 할 선민의 마음에 더러움이 발생한 것이고 하나님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셔서 우리의 상대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 종교인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면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값으로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마음으로 24시간 봐야 할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의 대상들을 바라봅니다. 가족을 보고, 사업을 보고, 건강을 보고, 자기 미래를 보고, 현재 상황을 마음으로 봅니다. 마음으로 세상 것들을 보았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팔아버렸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팔아버리면 하나님 값이 된 대상을 신격화하게 됩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의 문제는 마음에서 신격화된 대상들을 상대하면서도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헌금도 하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가족이라면 가족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을 팔아먹은 것입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봐야 합니다. 영인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만을 봐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가족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을 팔아버렸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팔아버리고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르는 하나님은 우상일뿐입니다. 하나님이 우상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으로 취급하며 실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금 마음으로 무엇을 보고 있고, 어떤 대상을 의식하고 있는가를 항상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확인하며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이라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다른 대상을 보고 있으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팔아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팔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벌어야 합니다. 공백인 마음에서는 24시간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작동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고수할수록 내 마음은 세상을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내 마음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천국에 계신 예수님 안에 있는 동안에는 마음의 흡입력은 하나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백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흡입력으로 24시간 하나님을 빨아들이는 것만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벌기는 깊이 벌기와 넓게 벌기의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깊이 벌기는 홀로 기도하거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가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을 내 마음에서 더 크게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있음의 크기이자 하나님 존재의 무게는 무한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있음의 무게를 빨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있음이 티끌같이 여겨질 때까지 하나님의 있음을 무한히 빨아들임을 통해 하나님을 법니다. 또 하나님의 좋음이 무한합니다. 이 세상의 좋음이 티끌과 배설물처럼 여겨질 때까지 하나님의 좋음을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있음의 존재감을 많이 빨아들이고, 하나님 좋음의 만족감으로 충만한 상태가 하나님을 깊게 버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생활하는 환경에는 무수한 미세먼지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얼굴에 달라붙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고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세상의 있음과 좋음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깊이 벌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넓게 벌기는 눈으로 보는 모든 대상을 계기로 삼아 이루어집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기적들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선민이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이적과 기사가 아닌 하나님이시기에, 시내산에서 이제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바라보지 않기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계명과 율법도 지켜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마주 보고 있으면 이 세상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사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세상에 나가 살아갈 때 눈에 보이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상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 대답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셨지만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묶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만을 보고 계셨기에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슨 생각을 하시든, 무슨 판단을 하시든 아버지의 뜻대로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보고 계시는 중에 공중에 나는 새를 보셨고, 그것을 계기로 다시 아버지를 보시며 공중에 나는 새를 아버지가 먹이심을 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마음이 묶여서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계신 상태에서 백합화를 보셨고, 그것을 계기로 삼아 다시 아버지를 보시며 아버지께서 백합화를 아름답게 입히고 계심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바라보시는 중에 재판을 하는 빌라도를 보셨습니다. 그렇기에 재판을 하는 빌라도의 권세가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만났을 때도 아버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늑함과 평강 속에서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된 상태에서 눈으로 보는 모든 대상을 계기로 삼아 하나님을 법니다. 이것이 하나님 넓게 벌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넓게 버는 동안에 내가 육체의 눈으로 마주하는 대상들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게 됩니다.

뉴스를 보면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넓게 벌기 위해서는 싫어하거나 좋아함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그 정치인들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 정치인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끌어가시려는 계획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내가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정치인에게 질 수 없습니다. 정치인을 싫어하거나 좋아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반대로 정치인을 싫어하거나 좋아함에서 끝난다면 내가 버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정치인입니다. 좋아한다면 마음에서 그 정치인을 빨아들이게 됩니다. 싫어한다면 그 정치인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상황을 빨아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팔아버려야만 그 정치인을 바라볼 수 있기에 좋아하든 싫어하든 내 안에서 그 정치인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3절 이하를 보면 한 성읍에서 불량배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다른 신에게로 유혹함을 경계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불량배는 다른 곳에서 찾아온 자가 아닌 애초에 그 성읍에 살던 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불량배란 영적인 의미입니다. 당시로서는 다른 신을 믿음이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일이었기에 세상 어느 성읍의 사람도 동네 양아치 말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불량배란 오늘날로 치면 대중적으로 신망과 인기가 있는 스타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 값으로 매겨서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으로 그들을 좋아하고 바라본다는 것은 이들을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으로 여겼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권사님에게서 무척 특이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출석하시던 교회에서 당시 유명한 트로트 가수 두 명을 권사님들이 서로 특정 가수를 지지해서, 공연을 한다고 하면 티켓을 수십 장씩 사서 교인들에게 나눠줍니다. 실로 미친 짓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여 스타로 여기고 지도자로 삼으려는 자들을 나도 같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멸을 당해야 할 상황입니다. 대중적 스타의 말을 듣고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면, 우상을 섬기기에 앞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보았고 다른 신으로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그를 하나님 값으로 매긴 것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져서 성읍이 다른 신을 섬기게 되었다면 진멸하고 폐허로 만들되 물건조차 더럽고 악하게 여겨서 불사르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대중적인 스타들 중에 누구를 좋아하는지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번다는 것은 지도자를 보든, 대중적인 스타를 보든, 원수를 보든, 가족을 보든, 자연을 보든, 동물을 보든, 육체의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계기로 삼아 하나님을 벌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을 지금 보고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하나님을 넓게 벌면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주권적 계획이 막힘없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 것을 보고 하나님을 팔아먹는 상태가 된다면 오직 교정적 주권을 행사하셔서 밖에서부터 나를 강압하고 역사하고 이끌어가실 뿐입니다. 내가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봄으로써 눈으로 보는 모든 대상에서 하나님을 번다면 하나님의 창조적인 주권은 내려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합화를 보시면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시면서, 빌라도를 보시면서, 가룟 유다를 보시면서, 제자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을 보셨습니다. 이들을 보고 하나님을 벌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를 통해서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주권이 내려오면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넓어져 갈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넓게 벌면 벌수록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벌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벌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24시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4시간 하나님을 보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팔아먹어야 합니다. 이는 곧 내가 보는 대상을 하나님 값으로 격상시키는 것이고, 마음에서 다른 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종교의 신으로 옮겨가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다른 신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거짓 선지자가 다른 신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또 가족이나 친구를 비롯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봄으로써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대중적 신뢰를 받는 자들을 마음에서 바라봄으로써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지각색의 다른 신을 내가 마음에서 만들어 내는 동안 나는 반드시 하나님을 팔아먹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하나님을 팔아먹지 않으려면 육체의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노력해야 할 일은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만을 바라봄이 24시간 진행될 수 있고, 눈으로 보는 모든 세상 만물을 계기로 삼아 아버지를 넓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벌어서 하나님의 존재감과 만족감이 점점 커지게 만들고, 그러는 가운데 눈으로 보는 모든 대상을 계기로 삼아 하나님을 넓게 법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도 점점 넓어져 나갑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 팔아먹는 나를 아주 짓이겨서 죽여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게 벌고, 하나님을 넓게 버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른 종교의 신을 믿지는 않아도 이미 마음에서 바라봄을 통하여 모든 대상을 신격화하는 이 악한 체질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영구히 죽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이 십자가를 놓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깊이 벌고 넓게 벌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