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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법>의 줄거리 :
내 삶을 내가 사는 저주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이 내 삶을 사시는 복이 실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이 하나님만을 절대 필요로 느끼면서 실제로 하나님을 상대자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을 실제로 마주하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때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렇게 실제로 응답하시게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특정한 방식이 바로 성전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 방식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법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법
(신명기 12:1~32)
1.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2.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4.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본문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11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라고 했고, 13~14절을 보면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18절에서도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 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라고 했으며, 21절에서도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이름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법이 필요할까요? 그렇습니다. 절대로 법이 필요합니다. 이 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가나안 족속들의 종교와 우상을 완전히 멸절하여 신들의 이름을 삶의 공간에서 완전히 제거하라는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신을 만들어 낸 이유는 스스로 사는 저주 속에 있으면서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삶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고 필요를 따라 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족속들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70년대에 새마을운동을 수행하면서 ‘잘살아 보세’라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기독교는 크게 부흥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내걸었던 목표대로 먹고살 만하게 되자 기독교는 큰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기독교가 침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법을 모른 채 불렀기 때문입니다.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가는 저주 속에 있는 채로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필요에 쫓겨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찾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우선적으로 삶의 필요를 따라서 신을 만들어 내고 신을 찾고자 합니다. 이렇게 부차적이고 상대적인 필요의 대상으로서 등장한 신은 우선적이고 절대적 필요가 충족되면 자연히 소멸합니다. 못먹고 못살던 시절에는 잘 먹고 잘사는 것이야말로 우선적이고 절대적인 필요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부차적이고 상대적인 필요의 대상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목표대로 이제는 웬만큼 먹고살게 되었습니다. 잘 먹고 잘살기라는 우선적이고 절대적 필요가 상실되자 이에 부차적이고 상대적 필요였던 하나님은 저절로 소멸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침체의 원인입니다.
저주 속에 빠져있는 이방인들은 스스로 살면서 신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필요성에 의해 다른 신들을 찾거나 만듭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선민은 그럴 수 없습니다. 종교의 신은 저주의 흔적입니다. 종교의 신이란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살 때 느끼는 필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신입니다. 본문은 그러한 신들을 다 없앨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스스로 살면서 필요를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저주의 흔적이고 저주의 연장입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걱정을 드러냅니다. 모든 우상이나 이방의 신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유지함에 있어서 선민에게 언제나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상대자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마주하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모세는 선민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모세는 제일 먼저 우상을 타파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곧 삶을 스스로 살면서 필요에 따라 신을 찾는 구조를 깨뜨리라는 뜻입니다. 내가 어떤 삶의 환경에 있든지 느껴야 할 필요의 대상은 무조건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돈을 필요로 하고, 건강이 안 좋으면 건강을 필요로 하고, 취직을 필요로 하고 승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는 다 거짓말입니다. 이러한 필요를 느끼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재테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돈의 필요를 느끼고 재테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우상 숭배와 똑같은 유전자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합니다. 이 사람은 건강의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상 숭배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본질적으로 우상을 동원하고 신을 찾는 것과 똑같은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필요한 자가 아닙니다. 건강이 필요한 자가 아닙니다. 취직과 승진이 필요한 자가 아닙니다. 성공과 형통이 필요한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인정이나 인기가 필요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민으로서 하나님만 필요로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광야 사십 년 동안 교육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250만 명이 사십 년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몸이 안 좋다고 해서 건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주머니에 돈이 없다고 해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필요를 느끼는 방식을 따라 신을 찾는 태도야말로 우상 숭배이자 다른 신 섬기기입니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지만 스스로 필요를 채우려는 성향은 그 옛날 바알이나 아세라 신상에 절하며 섬기던 가나안 족속들의 유전자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사시기에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뿐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내 삶을 사시려면 나는 하나님을 상대하고 마주하여 언약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선민들에게 실제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가르셨으며, 사십 년 광야 생활을 가능하게 하시며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형체를 드러내셨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 하나만을 주셨습니다. 이름 하나를 주셨기에 하나님의 이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복과 저주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제냐 허상이냐가 결정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 경고합니다. 우상은 눈에 보이기에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상 숭배는 삶을 스스로 살려는 유전자에서 비롯됩니다. 스스로 사는 삶에서 느낀 필요에 쫓겨서 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불러서 하나님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부를 때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정리해 봅니다. 내 삶을 하나님이 사시기 위해서는 나는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 삶을 사실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가 되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이름을 그냥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그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표현이 들어있는 각 구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5절을 보면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라고 했습니다. 택하신 곳이란 이스라엘이 정착한 뒤에 세워질 성전을 가리킵니다. 사사 시대에는 실로에 성막을 세웠고, 통일왕국이 이루어진 솔로몬 시대에 비로소 성전은 지어졌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앞으로 지어질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라 지칭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내 삶은 하나님이 사셔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하나님을 마주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주함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성립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것은 이름뿐이기에 나는 상대자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만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상대하고 싶습니다. 몸도 여기저기 아프고, 돈도 한 푼도 없고, 앞으로 먹고 살길도 없지만 이런 일은 다 제쳐두고 내가 필요로 하는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삶을 살아가시는 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을 선택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방법이 성전 방식이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이와 관련하여 6절 이하에는 번제는 반드시 성소에서 드려야 하며, 성인 남자는 반드시 일 년에 세 차례 성전을 찾아야 하며, 개인적으로 번제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도 반드시 성소에서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생기는 중앙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도 자원하여 서원제를 드리든지 번제를 드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중앙 성소로 가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 중앙 성소를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이라고 지칭합니다.
실제로 지성소에 있었던 것은 십계명 돌판이 담긴 법궤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러한 법궤를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합니다. 십계명 돌판은 새겨진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격체이심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 돌판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출애굽의 기적을 일으키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상징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름이란 실제 존재를 가리킵니다. 태승철이라는 이름이 저를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태승철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십계명 돌판은 인격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십계명 돌판이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기에 모세는 중앙 성소를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이라 지칭한 것입니다.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상징물입니다. 그리고 십계명 돌판이 담긴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냥 불러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성전 방식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은 눈에 보이기에 상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형상이 아닌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불러서 실제로 하나님을 상대해야 하나님께서 내 삶을 도맡아서 이끌어가시는 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하고, 실제로 하나님이 내 마음의 상대자로 오시도록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이 있다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아닐까 합니다. 전쟁이 있는 곳마다 트럼프의 이름이 끼어들고, 무역 전쟁이나 관세와 관련해서도 트럼프의 이름은 항상 언급됩니다. 우리나라에도 부당할 정도로 관세를 높게 부르고 투자를 하라고 생떼를 부렸습니다. 대한민국 사람 중에 트럼프의 이름을 듣거나 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서 전 세계적으로 트럼프의 이름은 하루에도 수억 번, 수십억 번은 불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구에서 트럼프의 이름이 울려 퍼지는 동안에 실제로 트럼프를 만나 관계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매우 엄격한 외교 절차를 거쳐야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에 있어서도 방법은 필요합니다. 중앙 성소에서만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중앙 성소는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입니다. 오늘도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다 마주하고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실제로 마주하여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성전에 두셨을까요? 성전에 두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머리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성전에 두셨다는 것은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나 많이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도 성전 방식이 아니라면 실제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도맡아 이끌어가시는 복도 실제가 되지 못합니다. 성전 방식으로 부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결국 선민이 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북 왕국 남 왕국이 망한 이유도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성전 방식으로 부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성인 남성은 무조건 일 년에 세 번은 중앙 성소를 방문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전 방식을 잊지 않고 뼈에 새기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성전에 가서 성전의 구조에 대해 제사장들에게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을 때도 성전의 구조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선민이라면 마구잡이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이방인들처럼 스스로 살면서 느끼는 필요를 따라 신을 동원하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돈이 있어야 한다. 나는 건강해야 한다. 나는 취직해야 한다. 자식들은 형통해야 한다.’라고 내가 먼저 세상에 대해서 필요를 느끼고 하나님을 부른다면 그것은 저주의 연장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여전히 내가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도맡아 사시는 것이야말로 복입니다. 반대로 스스로 사는 것이야말로 저주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사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신을 부를 때 나타나는 현상이 종교입니다.
따라서 선민은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나를 상대하시고 언약에 따라 내 삶을 책임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방식으로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나는 너의 상대자가 될 것이고, 네 몸으로 사는 삶을 내가 도맡아 책임질 것이다. 너는 나만을 벌고 나만을 가지는 일에 평생의 시간을 다 바쳐라.’라는 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에 있어서 성전 방식으로 부름이란 성전 생활화를 의미합니다. 성전 생활화는 공간적으로 꼭 성전과 가까운 곳에 살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전에 가라는 말씀은 성전을 머릿속에 담으라는 뜻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성전의 구조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실제로 마주하여 하나님이 내 삶을 사시고 나는 하나님을 가지는 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 생활화의 대표적인 예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는 중에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이때는 이미 바벨론에 의해서 남 왕국 유다가 멸망한 상태였기에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머릿속에는 성전의 구조가 기억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성전의 구조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이역만리 바벨론 땅까지 다니엘을 찾아가십니다. 성전의 구조를 기억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다니엘을 향해 ‘다니엘아, 나 여기 왔다. 왜 부르니?’라고 말씀하시듯이 마주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니엘의 삶을 책임지셨고, 이에 다니엘은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심지어 사자 굴에 던져지는 극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도 다니엘은 세 친구와 함께 하나님의 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전의 구조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전 생활화의 효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저주받은 삶의 상태가 내 속에서 계속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 하고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도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필요를 느낄 것입니다. 저주받은 삶으로 되돌아간 상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상태를 죽여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우상이나 다른 신의 이름들을 다 멸절하라고 했습니다. 애초에 우상이나 다른 신들이 생긴 이유는 스스로 살면서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필요가 다른 신에 대한 요청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방인의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필요성을 죽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세상에 대한 필요에 따르는 부차적 필요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성전 방식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 필요로 부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돈이 없어서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광야를 생각하면서 돈이 없어서 죽는 게 아님을 떠올립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250만 명을 굶주리지 않게 사십 년을 살게 하셨다. 신발과 옷도 해어지지 않았다.’라고 하나님의 의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 몸이 아파 죽겠어도 ‘그래도 필요한 건 하나님이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 필요인 하나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대답이 성전의 구조에 담겨 있습니다.
실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십계명 돌판은 법궤에 들어있었고, 법궤에는 속죄소 뚜껑이 덮여 있었습니다. 이는 곧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고 부르려면 반드시 언제나 속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죄소는 언제나 법궤를 덮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꺼낼 때마다 속죄소 뚜껑을 열어야 하는 셈입니다. 나의 기본은 스스로 살려는 저주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속죄의 과정을 거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저주의 연장선에서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저주가 임했을 때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삶을 살고자 하는 저주의 태도입니다. 내가 판단하지 않는 삶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뜻을 받아서 산다면 하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몸을 이용하시는 것뿐이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주로 인해 하나님이 사시는 삶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속죄의 필요성이 생깁니다.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가 의미하는 대로 우리가 속죄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저주 속에서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속죄의 방법이 번제로 제시되었습니다. 스스로 살려고 하는 저주받은 체질의 나를 상번제 어린양의 죽음과 동일시합니다. 속죄를 위해서는 일단 내가 처한 저주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주 속에 있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이방인이 자기들의 신들을 부르는 것과 똑같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죄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상번제에서 죽어가는 어린양을 나의 모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면서 다양한 필요를 느낍니다.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삶에 대해 필요를 느끼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애초에 삶은 하나님이 도맡아서 사셔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복입니다. 스스로 필요를 느끼는 상태가 저주임을 알았다면 이러한 나를 상번제 어린양과 함께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의 생활화입니다.
저주받은 체질의 나를 죽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소의 분향단과 떡상과 등잔대가 상징하는 바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성전의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릅니다. ‘하나님! 저는 스스로 삶을 살려는 저주받은 존재입니다. 이러한 저는 상번제 어린양과 함께 죽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이제 다시 태어난 사람으로서 분향단의 기도가 상징하는 대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처럼 저주받은 상태가 어린양과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그때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진설병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만이 나의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만족해야지 무엇을 통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만족감으로 충만하게 채워지고 싶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보면서 기도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상대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등잔대는 밝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세상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몸은 등잔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름이 등잔대를 통해서 불이 붙어 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내몸은 등잔대의 심지와도 같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름만이 나와서 불이 붙음으로써, 전부 자기가 살아간다고 하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성전 방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상대하실 수 없고 나는 저주 속에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이방인들이 바알이나 아세라나 몰록 같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똑같은 유전자에서 비롯된 일이 되어버립니다. 스스로 삶을 살며 필요를 느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아무리 예배당을 중심으로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 하려 하고, 돈을 벌려 하고, 성공하려 하고, 형통하려 한다면 스스로 살겠다는 저주받은 유전자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위의 열매는 달라 보이더라도 행위의 유전자가 같은 것입니다.
성전 방식의 하나님 이름 부르기를 위하여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던져 이루신 사건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상번제 어린양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저주의 체질이 발동하는 나를 죽여야 합니다. 스스로 살면서 필요를 느끼는 저주받은 체질의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향단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따라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 보아야 합니다. 또한 진설병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자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땅에 남아있는 내몸은 하나님의 뜻의 불이 밝혀지는 등잔대가 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전체적인 성전 구조의 의미가 새겨지는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고, 하나님과 실제 마주 보는 관계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수록 죄가 커지고 죄의 값만 더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법’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하여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이 부르는 법을 따라서 오늘도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여러분이 골라잡은 복의 길이 실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이름보다 더 귀한 보물은 없습니다. 이 이름을 우리 주님이 몸 던져 이루신 완성된 성전 방식으로 부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실제로 복을 골라잡은 흔적과 결과와 증거들이 우리 삶에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