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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각이 하나님과 내가 같으려면>의 줄거리 :
하나님과 내가 생각이 같아야 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주권자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면 삶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피할 길이 없다. 하나님과 내가 생각이 같으려면 길은 일방적이다. 상호조율이나 합의 따위는 없다. 내가 내 생각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생각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내막을 살펴본다.
생각이 하나님과 내가 같으려면
(신명기 10:1~22)
1.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3.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우리는 본문 1~5절만 읽었습니다. 다른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시간 관계상 읽지 않는 나머지 부분들도 중요하기에 가능하다면 오늘의 번제를 하기 전에 본문을 읽어보시면 훨씬 더 유익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본문 말씀 중심으로 <생각이 하나님과 내가 같으려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같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내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십니다. 그 주권자 하나님과 내 생각이 다르다면 삶은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뒤죽박죽이라는 말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내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전적으로 내 삶을 책임지시므로 나는 생각하면 안된다는 내용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내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생각이 내게 받아들여져서 그 생각대로만 말하고 행동하며 살 수 있을까? 내 생각의 자발성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대답이 제시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과 내막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읽은 1~5절은 모세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보고 분노하여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을 깨뜨린 이후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시기 위하여 모세에게 돌판 둘을 다듬어서 산을 오르게 하십니다. 십계명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선민 각자가 관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이제부터 너는 나를 상대하는 사람이다.’라는 언약의 증표가 십계명의 두 돌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십계명 두 돌판을 보며 기록된 내용을 문자적으로 수행할 뿐만 아니라 ‘나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언약을 맺은 자다. 이 언약의 핵심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내 마음이 상대하는 대상이 하나님뿐이어야 한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표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 사이에 금송아지를 숭배하였고, 그 결과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과 함께 언약도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돌판을 만들게 하셔서 십계명을 다시 기록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법궤 안에 안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이 새겨진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올라온 모세 앞에서 일방적으로 기록하여 주신 것입니다. 돌판까지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만드셨기에, 이러한 언약에서 이스라엘은 수동적인 입장이었습니다. 한편, 두 번째 돌판에서는 선민 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기에 모세는 돌판 둘을 다듬어서 산에 올라갔습니다. 첫 번째는 모세가 맨손으로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돌판까지 준비하셔서 십계명을 써주셨으나, 두 번째는 모세가 돌판을 다듬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고 산에 올랐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첫 번째 계약이 깨어진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자발성의 결여입니다. 하나님을 상대자로 관계하는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선민은 어떤 자발성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해서 두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언약이 맺어지기까지 두 달 동안 수동적으로 하나님께 이끌려 왔던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에서 적극성을 띠고 간절히 바란 것은 하루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인이 된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사는 것만을 바랐던 것입니다. 노예 생활에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 땅, 내 집, 내 가족을 마음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자유인으로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 것을 적극적으로 바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상대자인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적극성도 띠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는 상황조차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옆구리를 찌르듯이 언약을 강요하시는 듯한 모습이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해라.’라고 눈치를 주시니까 이스라엘은 ‘그렇고 말고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라고 대답하는 듯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십 일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던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들은 두 달 동안 출애굽의 열 가지 기적을 보았고,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으로 건너고, 만나를 먹는 등등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 이들이 적극성을 띠었던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다는 바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 적극성을 띤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세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이 상대자라는 사실을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모세는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성을 띠는 방식을 가르쳐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기 위한 돌판 둘을 다듬어서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말과 행동이 나와야 하나님과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생각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향하여 자발성과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겠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겠다.’라는 자발성과 적극성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언약 때는 이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받고도 진영 안으로 가져오지도 못한 채 산 위에서 던져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선민의 언약이 깨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모세가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돌판 두 개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야겠다는 적극성을 띠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를 통해 하나님을 상대할 때 제일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상대함에 있어서 우리는 가만히 있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야겠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기 위한 내용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읽지 않은 6~9절을 보면 괄호로 처리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렀을 때 아론이 죽어 장사되어 아들인 엘르아살이 제사장이 되었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라는 시내가 많은 곳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욧바다라는 지역에 와서야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구분하신 것 같지만 실은 레위 지파는 시내산 계약이 이루어진 직후에 구별되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사건을 시대순으로 언급하지 않고 장소와 연결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장소들은 모두 물과 관련이 있습니다. ‘브에롯 브네야아간’이란 야야간의 아들들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라’에서는 아론이 죽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므리바 사건입니다. 므리바에서 모세와 아론은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반석을 두 번 치는 행위를 통해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론은 ‘모세라’라는 지역에서 죽고, 제사장 직분은 그의 아들인 엘르아살이 물려받았습니다. ‘굿고다’는 오아시스로 유명한 가데스 바네아의 근처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불평하여 전멸하는 결과를 맞이했고, 출애굽 2세대 또한 물을 기대하고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을 때 물이 없어서 불평하였습니다. ‘굿고다’는 바로 이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지역입니다. 또 ‘욧바다’에서는 많은 시내가 있었음이 언급됩니다.
이처럼 모세는 물을 연상하게 하는 지역들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생각을 받기 위해 적극성을 띰이란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격적 본질은 기본적으로 갈증입니다. 마음의 공백 때문에 채움을 향한 갈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본질적인 갈증을 하나님 한 분에게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선민이 보여야 할 자발적인 적극성입니다.
제사장 아론이 죽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제사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나 레위인을 구별하셨다는 말씀이 가리키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이 상대자로서 갈증의 대상이 되시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 때문에만 사는 자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의 인생은 완전히 헛것이 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민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선민이 삶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망각했을 때 깨우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성을 띨 수 있도록 해주는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 세상에 샘솟게 하는 샘물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말씀을 전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장 강력하고 또렷하게 인식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대상을 상대하지 말고 하나님을 상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적극성을 띠되 마치 갈증을 느끼듯이 ‘나는 하나님을 가질 거야. 하나님을 먹을 거야. 하나님 부자가 될 거야.’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갈증을 해결하는 방식을 세분화해서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갈증을 표현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가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 경외입니다. 내 마음이 지금 하나님을 보고 있지 않고,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내가 이 세상 것을 마음으로 바라보며, 이 세상 것을 마주하고, 내 멋대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나를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보관해 두고 내 것으로 확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의 사랑은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잡은 물고기처럼 확보된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건강 문제 생각하고, 자녀 문제 생각하고, 돈 문제 생각하고, 나라 상황 걱정하느라고, 마음에서 하나님을 못 보는 상황을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님 경외입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마음으로 보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를 가장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경외를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성을 띠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적극성을 띠고 자발적이 되어야 하나님의 생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기 위하여 적극적이고 자발성을 띠려면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구체적 방식이 다른 대상을 향하여 갈증을 느끼는 상태를 무서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경외가 내게서 일어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증 표현의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1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명령들이 있습니다. 이 명령들이 마음의 부담으로 느껴진다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경외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면 건강을 경외하는 것이고, 자녀가 형통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다면 자녀의 형통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들이 마음에서 천근만근으로 무겁게 느껴지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이 가뿐하게 느껴진다면 내가 하나님 놓침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경외의 상태에 있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증 표현의 세 번째 단계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섬기기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함이 경외를 통해 이루어졌고, 명령형의 말씀이 가볍게 느껴져서 지키기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이제 실제로 하나님을 먹고 마셔서 벌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재물을 섬김이라면 하나님 섬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의 갈증을 쏟아부으며 하나님을 벌어야 합니다. 하나님 부자가 되기는 하나님 경외와 하나님의 도를 지킴이 충족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앞선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다면 명령형의 말씀은 가볍게 느껴질 것이고, 그러한 상태가 되어야 하나님을 실제로 벌 수 있고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가질 수가 없을까? 왜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좋음을 만족감으로 가질 수가 없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은 이 세상 것들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 기록된 명령형의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성을 띨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돌판을 만든 사건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모세는 물을 연상하는 장소들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갈증 해소를 위한 적극성을 위한 방법으로써 하나님 경외,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 하나님 섬기기의 세 가지 단계를 이야기했습니다. 한편, 13절을 보면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갈증을 위한 네 번째 방식이 제시됩니다.
네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생각 받기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실제 삶의 현장에 나가서 살 때, 기록된 말씀만을 가지고 행동을 결정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우리 마음 판에 기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돌판이 깨진 후에 두 번째 돌판을 직접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세 가지 방식으로써 하나님 경외,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 하나님 섬기기가 제시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 속에서 하나님 벌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이 실시간으로 내 마음에 전달이 됩니다.
행복은 삶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내 생각의 능력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내는 일에만 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대로만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삶을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뒤죽박죽 되는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마음 채워짐이 삶 속에서 계속 발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빛이 광명하게 내리쬐는 가운데 삶 전체가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갑니다. 모세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행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샬롬 혹은 절대 평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으려면 두 돌판을 직접 만든 것처럼 적극성을 띨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주세요.’라고 기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물과 관련된 지명들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 경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놓치는 상태를 제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두 번째 단계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무겁지 않습니다. 하나님 놓치는 일이 가장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 정도 희생으로 하나님을 지켜낼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할 수 있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하나님의 명령은 지켜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주함이 틀림없는 상태에서는 세 번째 단계로 하나님 섬기기를 통한 하나님 벌기가 이루어지고, 네 번째 단계로 하나님의 생각 받기가 이루어집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면 삶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완전히 벗어나는 행복의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들이 내게 속속들이 전달됩니다.
모세는 이러한 내용을 마음의 할례를 통해 총정리합니다.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지고 하나님을 상대자로 마주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몸에 붙어 목이 곧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꾸 몸으로 만나는 대상들에 붙으려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들을 향해 마음의 시선이 고정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마음의 할례를 요청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성과 자발성을 띨 수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상대자로 삼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 경외함,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벌기, 하나님의 생각대로만 사는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마음의 할례를 행함이 상번제 어린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제시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 생활화를 하며 하나님을 상대자로 지켜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상번제 어린양은 십자가 예수님의 예표인 것입니다.
모세는 상번제 어린양을 통해 하나님을 상대자로 지켜냄을 마음의 할례라 표현하며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상번제 어린양은 어떤 때 기억해야 할까요? 목이 곧음이란 하나님을 상대자로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나를 언제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내게서 이러한 생각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나님 생각과 천적이므로 그럴 때마다 상번제 어린양과 함께 죽음으로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무척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이 말씀이 문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모에 치중합니다. 우리 마음이 몸에 밀착되어 있다는 대표적 증거가 외모에 치중함입니다. 내게서 이러한 모습이 발견된다면 어린양 상번제로 죽여야 할 포인트를 분명히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몸에 붙을 때 사람의 외모를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내가 대하는 사람이 눈으로 보기에 잘나 보이든 못나 보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아지려면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을 구하지 않고 마음이 몸에 붙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에 외모를 보며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을 받을 수가 없기에 하나님과의 계약도 깨어지고 맙니다. 타인의 외모를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나를 발견했다면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며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외모에 반응하는 나 때문에 주님이 상번제 어린양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뇌물이 발생하는 내막을 들여다보면 강렬한 소원이 있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자들의 기분을 맞춰주고자 뇌물을 바칩니다. 뇌물에 대한 말씀 또한 우리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그러한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뇌물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을 때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뇌물이 통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한 종교 생활에 열중합니다. 헌금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께 열심인 것 같아도 세상의 소원을 위한 일이라면 뇌물일 뿐입니다. 종교란 기본적으로 뇌물이 핵심인 인간의 생활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적극성을 띠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을 가지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적극성을 띨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죽이는 마음의 할례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소원이 있는 한 하나님 생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대표적 사회의 약자입니다. 요즘은 과부라고 해도 사회생활에 제한을 두지 않지만, 당시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고아에 대해서는 시대를 떠나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에는 세상 가치의 유무로 인간의 존재감을 측정하려는 인류의 보편적인 체질입니다. 사회적 약자는 존재감이 약하여 경멸하고 무시합니다. 세상은 사회적 가치를 많이 가진 자를 무겁게 여기고, 사회적 가치를 적게 가진 자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생각의 천적이 되는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에 대해 세상은 멸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반응하기 앞서 몸과 마음이 분리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적극성을 띨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갈증을 하나님으로 해결하려고 적극성을 띠면,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나사로와 같은 형편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대로 사회적인 약자로 여겨 가볍게 여기거나 경멸하고 무시하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 이유는 약자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약자를 우습게 여기고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에게서 사회적 약자의 존재감을 작게 여기는 모습이 발견된다면 그러한 나의 마음을 잡아채서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사회적으로 존재감이 작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받으려고 할 때, 사회의 통념을 따라서 약자로 여긴다면 하나님의 생각은 단절되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을 먹어버리는 천적입니다.
마지막으로 18~19절을 보면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안정된 토대를 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자들은 나그네를 우습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진 사람은 위대하게 느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못 가진 사람은 우습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그네는 세상에서 안정된 토대를 갖지 못한 자들의 대표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안정된 토대를 갖기 원한다면 나그네가 우습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안정감이나 토대가 없는 나그네를 보며 우습게 여기는 나를 발견한다면 나의 마음을 얼른 잡아채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는 쪽으로 나아가는 나를 붙잡아 죽임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위해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저녁 상번제로 어린양이 드려졌습니다. 이렇게 나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갈증과 적극성을 온전하게 곧추세우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같아질 때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생각과 같은 상태로 마지막 날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선민의 삶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것을 유언처럼 설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모든 곳에서 모든 순간에 같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나를 죽은 자로 여겨야 하는 정확한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짚어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향하여 목말라 죽겠는 사람의 갈증을 다 쏟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