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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목 곧음을 분질러버리기>의 줄거리 :
몸으로 만나는 하나님과 세상과 나 자신의 삼각 구도. 이때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앞에서 나 자신이 감히 세상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주체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그에 앞서 내 마음의 눈이 세상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세상을 향하여 시선이 고정된 채로 목이 굳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목이 곧음을 반드시 꺾고 목을 돌려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목이 곧음은 선택받음을 무효가 되게 합니다. 택함을 받은 효과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보고 있는 동안만 유효합니다.
내 목 곧음을 분질러버리기
(신명기 9:1~29)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8. 호렙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14.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1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두 손에 있었느니라
16.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났기로
17.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
신명기 9장을 전체적으로 함께 생각해 봅니다. 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언급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가나안 족속을 멸하신 것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거역할 때 멸하실 것임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13~17절에서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진 사건을 언급합니다. 언약이 깨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무효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멸절당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멸절당하는 것도 하등의 이상함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전제로 합니다. 나는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멸절될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내 목 곧음을 분질러버리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에는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됩니다. 부모님이 화가 나면 ‘저 녀석! 돌아다니며 온갖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니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놔야 해!’라고 말씀하시던 것이 기억납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분질러버려야 할 것은 다리몽둥이가 아닌 우리의 목이 곧음입니다.
앞 장에서 마음을 낮추시려고 광야 사십 년을 허락하셨다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삼각 구도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과 나 자신이라는 삼각 구도 안에서 마음을 낮춤이란 내가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삶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까지 생각하시며 주권적으로 이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삶에 대한 생각을 한 조각이라도 떠올린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것을 자처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 대해 단 한 조각의 생각도 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더욱 근본적인 차원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갑니다. 생각하기 이전의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이유는 마음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봄이란 의식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볼 때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춤이란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더 높다고 자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몸으로 만나는 세상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마음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생각이 뒤따라오고 높아집니다. 앞 장에서 모세는 삶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말 것을 강조했습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미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기에 마음은 높아집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이유는 마음이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주제를 축약하자면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는 동안 마음 낮춤은 불가능합니다.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인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시건방을 떠는 것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시선이 세상을 향해 고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라고 표현합니다.
선민은 어차피 삼각 구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과 내가 있습니다. 목이 곧음이란 삼각 구도에서 내 마음의 시각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삼각 구도에서는 한 쪽만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면 세상은 들어오지 않게 되고 세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세상을 보면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생각은 반드시 마음의 시각 안에 들어오는 대상에 대해 이루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래서 너희 마음의 시각에 몸으로 마주하는 세상 것들이 들어오지 않게 하라. 그러면 생각하지 않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에는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목이 곧음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만드는 원인임이 언급됩니다. ‘네가 계속 목이 곧게 행동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통해 가나안 족속들을 멸절시키셨던 것과 똑같이 너희도 멸절의 대상으로 삼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공식입니다. “선민 + 목이 곧음 = 비 선민”이며 “이스라엘 + 목이 곧음 = 가나안 족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 이끄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모습을 보인다면 가나안 족속들과 똑같은 입장에 서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목이 곧은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 무효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행 판결이 결정된 것과 똑같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라는 표현이 등장한 맥락을 살펴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였음이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함은 목이 곧음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이스라엘의 어떠한 태도를 목이 곧음이라 표현한 것이고, 우리의 삶에서는 목이 곧음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모세는 이것을 유언처럼 남기며 선민에게 주지시킵니다. 목이 곧으면 선택하심은 무효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는 대로 이기며 멸절시켰습니다. 이들은 ‘우리는 공의롭고 정직하기 때문에 이긴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도 별것 아니다. 그들이 거인일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무찌를 수 있다.’라고 착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의 목이 곧음은 유지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목이 곧음을 순종하지 않음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목이 곧음은 불복종이고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 맞습니다. 다만 우리는 불복종과 거역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내가 삶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버젓이 살아계시며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까지 지켜보시고 주관하고 계시는데 내가 삶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삶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과 나의 삼각 구도를 염두에 두고 목이 곧음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세상을 보고 있을 때 마음의 시각 안에 하나님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시각 안에 들어오지 않은 대상을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생각함으로써 하나님보다 높아졌습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졌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낮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부딪히고 거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 내가 삶을 생각하면서 하나님보다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서 삶을 생각하게 된 근본적 이유는 삼각 구도에서 하나님 대신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목이 곧아서 세상을 향해 고정된 목을 하나님 쪽으로 돌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시각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마음의 목을 돌려야 하는데 정작 목이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목이 곧음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세상과 나의 삼각 구도를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몸으로 만나는 세상이 있고, 내가 있다는 것은 사는 동안 언제나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 삼각 구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볼 수 없느냐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으로 보는 대상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음으로 보지 않는 대상을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으로는 미래를 보면서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봄이란 언제나 삼각 구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을 보면 내 마음의 시각에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면 세상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있으면 세상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만으로 살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17절을 보면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라고 했습니다. “너희의 목전”과 “여호와의 목전”이 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야를 금식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돌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모세가 금방 내려오지 않자 죽었다고 여기며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합니다. 십계명이 기록된 언약의 돌판을 받아 내려오던 모세는 이 모습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돌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모세는 이것을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너희의 시선 앞에서 깨뜨렸노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시선은 호렙산에 올라간 모세를 따라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시선은 세상의 삶을 향해 있었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삶을 금송아지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삶을 보고 있는 이스라엘의 눈길 앞에서 언약의 돌판을 깨뜨렸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선민 사이의 언약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라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죄를 지었음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계속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선민 간의 언약을 한 마디로 축약해 보자면 눈길 주고받기입니다. 서로 눈을 떼지 않는 것이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른 곳을 보았기에 언약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깨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 대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돈을 보고, 배우자를 보고, 자녀를 보고, 건강을 보고, 사업을 봅니다.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는 내 시선 앞에서 언약은 깨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죽을 때까지 예배당을 다니며 헌신해도 전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시각에서 하나님을 놓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나안 족속들과 똑같이 멸절당하기에 합당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드러나는 본문의 주제는 마음의 시선에서 하나님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함이란 굉장히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생각함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하나님을 놓치는 이유는 마음의 목이 곧아서 세상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가나안 족속들과 똑같은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사건 뒤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22절을 보면 모세는 이러한 사건들을 떠올리면서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다베라 사건은 출애굽 두 번째 해 2월에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광야 생활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했고, 이에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불을 내리셔서 주동자들을 죽이셨습니다. 또 르비딤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 물이 없어서 불평하며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7절에서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기브롯 핫다아는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으로써 이스라엘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한 곳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한 달 동안 보내셔서 질리도록 먹게 하시고 주동자들을 죽이셨습니다.
이어지는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함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에 넘어가 준동했던 이스라엘 성인 전체가 광야에서 죽는 결과가 빚어졌습니다. 출애굽 1세대였던 60만 장정 중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의 시선이 세상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에서도 삼각 구도는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광야의 불편함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고 광야의 불편함만을 보았고, 광야의 불편함을 보는 마음의 시각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초강대국 애굽을 열 가지 재앙으로 초토화하셨고, 홍해를 가르시며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고 광야의 불편함만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마다 모세는 중재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의 핵심은 삼각 구도에서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목이 곧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발견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몸으로 만나는 세상이 있으며, 내가 있습니다. 이러한 삼각 구도에서 나는 이상하게 세상을 봅니다.
가데스 바네아 정탐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민수기 13장 28절을 보면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심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삼각 구도에서 하나님 대신 가나안의 아낙 자손을 보며 두려워했습니다. 마음의 시각으로 아낙 자손을 보자 하나님은 들어오실 수 없었고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을 보고 있었기에 이들의 마음의 시각에는 아낙 자손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민수기 14장 9절에서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시각에 가나안 족속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육체의 시각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로는 보고 있으되 마음에 그들의 존재감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과 하나님 좋음의 만족감이 느껴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존재감도 느끼지 못하겠고 만족감도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있다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과 하나님 좋음의 만족감이 점증적으로라도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서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를 들을 때는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다. 하나님으로 인한 존재감과 하나님으로 인한 좋음으로 만족해야 한다.’라고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틀림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순간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으면 세상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목이 곧음이 뜻하는 대로 한 쪽을 보면 다른 한쪽을 볼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에 하나님은 포함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보는 시각에 세상은 포함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면 하나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기에 세상은 하나님의 생각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마음에서 하나님을 놓칩니다. 삼각 구도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분명히 하나님도 계시고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는 대상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서는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의 대상들만을 보고자 합니다. 우리 눈은 세상을 보더라도 마음의 시선은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 마음이 눈을 따라 세상만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았기에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아낙 자손의 존재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고 있어도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께로 가 있으면, 육체로 보고 있는 것들에 대한 존재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보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감만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풍랑 속에서도 주무시던 예수님의 상태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보지 않았던 역사를 열거하며 목이 곧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이 곧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이루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목이 곧아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만 바라볼 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늘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인간의 눈에 보이게 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직접 본 사건을 증언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이 증언을 통하여 실제로 본 것처럼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으로서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보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나의 곧은 목을 분질러버리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내 마음은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로 마음의 시선을 고정할 수 있습니다.
목이 곧음이란 마음의 시선이 고정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목이 곧기에 세상만 보고 하나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을 마음으로도 같이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곧은 목을 주님의 십자가로 분질러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선을 끌고 가시는 대로 따라가서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아야만 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몸이 아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단지 고통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67세가 되어 여기저기가 아픕니다. 친구 목사님들 중에는 백 세 이상 살 것처럼 건강해 보이는 분이 있습니다. 심지어 젊었을 때는 탈모가 있었는데 지금은 머리가 다시 나서 제일 무성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최근에 새벽에 배가 아팠다고 합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는데, 두 번째 통증이 왔을 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라 병원에 갔더니 췌장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췌장에 생긴 암이 담도를 막아서 통증이 생겼던 것입니다. 결국 항암치료를 받게 되다고 합니다. 이처럼 몸이 아픈 것이 두려운 이유는 통증 자체보다는 더 큰 질환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암에 걸릴 수 있겠다 싶은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통증도 있지만 하나님도 계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선민입니다. 그렇다면 선민으로서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목이 곧음은 선민에게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예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고 가지라고 제시하신 적이 없다면 하나님을 거역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공중 권세 잡은 마귀에게 순종하며 어둠 속에서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거역은 선민에게만 성립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알려주셔서 삼각 구도가 가능하게 된 자들이 선민이기 때문입니다.
선민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창조주이자 주권자로서 참새 한 마리를 주관하시는 것처럼 나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듯 나도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너를 내 눈에서 놓치지 않겠다. 너도 나를 눈에서 놓치지 말아라.’라는 것이 선민의 언약입니다. 우리는 삼각 구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몸이 아프다고 해서 마음의 시각이 몸을 향한다면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선민 됨은 무효가 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마음의 목이 곧아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만 마음이 바라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당신을 보라고 하셔도 목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셨는데도 이스라엘이 목이 곧아서 하나님을 보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돌아가지 않는 목을 돌리려 하지 말고 아예 목을 분질러버리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신 이유는 우리 목의 곧음 때문입니다. 목이 곧아서 세상밖에는 못 보기에 우리의 시각 안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목이 곧은 상태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을 보고 있는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자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을 향해 목이 곧습니다. 세상을 향해 시각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고정된 시각 안으로 들어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을 바라보던 나의 죽음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나의 곧은 목이 분질러지는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십자가를 꺼려서 치우고 가리려 합니다. 한 번 보고 말아버립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 안에서 계속 볼 수 있도록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는데 가끔 한 번씩 돌이켜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내 마음이 집중하는 대상은 다 세상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는 곧은 목을 분질러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의 시각에 세상이 들어오는 곧은 목의 상태를 부러뜨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에서 내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고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입니다. 세상을 생각하려면 마음으로 세상에 있는 것들을 바라봐야만 합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계십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봅니다. 세상을 보면 세상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제치고 하나님 위로 올라갑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높아졌기에 이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은 내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낮은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선민이라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세상에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눈에 보이도록 일어났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 중에서 십자가에만 집중을 합니다.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며 굳어진 내 마음의 목을 분질러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로 시선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굳어진 모가지를 십자가로 부러뜨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이 말 안 듣는 아이에게 ‘이놈의 자식! 한 번만 더 그러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거야!’라고 혼을 내는 것처럼, 나를 향하여 ‘이놈의 자식! 굳어진 모가지를 분질러 버릴 거야.’라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마음의 곧은 목을 분질러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부활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것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도 커지고, 하나님 좋음으로 인한 만족감도 커집니다.
우리는 자꾸 마음으로 하나님 바라보기를 중단하고 세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도 커지지 않고, 하나님 좋음으로 인한 만족감도 실감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세상에 고정된 시각으로 굳어진 내 마음의 모가지를 분질러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해주셔서 내 시선이 예수님 따라 올라가 아버지께 고정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삶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이끌려지고 내 마음에는 내가 보는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과 하나님 좋음의 만족감이 날마다 더 쌓여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