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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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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은혜 소화력 강화법_태승철

by 태승철 · 25-11-27 08:58 · 444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택받은 은혜 소화력 강화법>의 줄거리 :

우리는 선민입니다. 우리에게서 튀어나오는 이방인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죽여야 하는 선민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서 이방인이 튀어나옵니까? 선택받은 은혜를 충분히 소화하여 내 것으로 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맛이 없어 먹을 수 없거나, 장애가 생겨 소화력이 제로인데 그 앞에 베풀어진 산해진미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선택받은 은혜에 대한 소화력을 길러야 합니다. 선민의 생애는 새로운 은혜를 받는 여정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소화하는 여정입니다. 쇠도 씹어 먹는 소화력을 길러야 합니다.

 

 

선택받은 은혜 소화력 강화법

 

(신명기 7:6~26)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우리가 읽은 11절 이후에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선민의 삶의 모든 방면을 형통케 하신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이방 민족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이방 민족들을 점령해 나갈 때 우상에 입힌 은과 금을 탐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은과 금을 탐한다면 가나안 정복 전쟁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 사람의 탐욕에 의한 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체 내용을 하나로 묶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주제를 생각하며 <선택받은 은혜 소화력 강화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선택을 받은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리고 선택을 받은 것 이외에도 은혜를 계속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소화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실감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써왔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해야 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실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감이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든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를 소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소화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입맛이 없는 사람에게 산해진미가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선민의 생애는 새로운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소화하는 여정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소화할 때 은혜 위에 은혜가 임합니다. 먼저 받은 은혜를 소화하지 못하면 더 이상의 은혜를 허락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화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말 그대로 공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공짜로 주시는 선물인 은혜를 내 것으로 소화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공짜로 주신 선물을 소화하지 못하면서 다른 은혜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감될 때까지 주신 은혜를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것을 자꾸 구하는 것입니다. 선민의 삶은 대단한 성과를 생각해서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짜로 주시는 선물인 은혜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6절을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선민(選民)을 거룩하다는 의미에서 성민(聖民)이라 구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는 전혀 다르게 구분하신 이유는 숫자가 많거나 잘 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어서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이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주권적 사랑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결정된 일이었습니다. 이유 없이 공짜로 주신 선물이기에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상 하나를 골라봅니다. 예를 들어 돈 100억이 있습니다. 100억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0.001%나 될까요? 그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돈 100억은 사람들이 싫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돈 100억이 생각을 할 수 있고 인격체라고 해봅시다. 나 같은 사람은 100억을 가질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너무 거리가 멀어 가지리라고 마음먹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돈 100억이 제 발로 걸어와서 나는 100억이다. 나를 네가 가지면 좋겠다.’라고 말한다면 너무나 충격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과 인격적으로 관계하실 때 가장 먼저 주장하시는 부분은 전지전능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좋음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공백이기에 채워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내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기에 존재의 근거를 위하여 마음을 다른 대상의 존재감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또 기쁨과 만족을 위해 공백인 마음을 채우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치 돈 100억이 제 발로 걸어오듯이 하나님이 직접 걸어오셔서 당신의 있음과 좋음을 제시하신 것이 하나님의 선택인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아들이 결혼 상대를 데려왔는데 머리도 좋고, 학력도 좋고, 외모도 뛰어나고, 마음씨까지 곱고, 집안까지 훌륭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 아들은 머리도 평범하고, 외모도 평범하고, 집안도 평범합니다. 대체 왜 이렇게 뛰어난 아가씨가 내 아들과 결혼하겠다고 제 발로 걸어왔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심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제 발로 걸어와서 자기를 선택하라고 내놓지 않습니다. 내가 추구해서 획득해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치 뛰어난 며느릿감이 제 발로 찾아오듯이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당신을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 100억이나 나무랄 데 없는 며느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좋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이제까지 좋게 여겼던 모든 것들의 좋음의 자격을 박탈하는 사건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선택이란 당신 자신을 가지라고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좋음을 소화하여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있는 좋음은 더 이상 좋음이 아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 모든 것들에게서 좋음의 자격을 박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여 실감하자마자 이 세상에서 좋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은 이 세상의 모든 좋음을 멸절시키는 원자폭탄과도 같습니다. 다만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영적인 일이라 그런지 세상 사람들은 진짜 좋음을 주려고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좋음 간의 싸움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좋음을 받는다면 이제까지 갖고 있던 가짜 좋음은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처럼 다 날아가고 맙니다. 그런데 가짜 좋음이 너무나도 아깝게 여겨지기에 진짜 좋음을 주려는 사람을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입맛은 죄에 찌들어 있습니다. 진짜 좋음을 좋아할 입맛도 없고, 소화할 소화력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진짜 좋음을 진짜로 안 좋아하는 기괴한 태도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진짜 좋음을 주려는 사람도 제일 싫어합니다. 이것은 인류 최대의 모순이라 부를만한 일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증오의 사건만을 나열한 지표가 있다면, 가장 강력한 증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가장 참혹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데 그 예수님이 모든 인류에게 진짜 좋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짜 좋음을 주시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증오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0절을 보면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를 덜 믿거나 안 믿을 수는 있을지언정 미워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아직도 건강이 좋고, 자녀의 형통이 좋고, 돈이 좋다면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좋아하는 한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선택하셨고 유일한 좋음을 내게 주시려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그 좋음을 소화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한편 죄적인 입맛은 선민의 증거를 확인하는 역할을 해줍니다. 죄적인 입맛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한다면 세상 것들은 좋음의 자격을 박탈당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 좋음을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의 좋음은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선민은 특이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수 없어서 실감을 못하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만은 확신합니다. 죄적 입맛으로 인해 하나님 소화력이 제로인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고 최고의 좋음이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확신합니다.

이로부터 선민 안에서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확신은 있는데, 실제로 내 마음은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들고 실감할 수 있는 소화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7절에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좋음이라는 확신은 있으나 그것을 소화하지 못하는 선민의 괴로움을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의 증거입니다.

죄적 입맛이 활성화된 상태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선민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선민은 다릅니다. 내 입맛과 소화력은 세상의 좋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머리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선민의 특징은 평생 이 괴리를 좁혀나가는 자들입니다. 선민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드는 자가 아닙니다. 재벌이 되기 위해 돈 버는 길로 나서는 자가 아닙니다. 학자가 되기 위해 박사학위를 받으려는 자들이 아닙니다.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지 선민이라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괴리를 좁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로부터 동떨어진 나의 실존을 문제시 합니다. 이 세상 것만 맛있어하고 좋아하는 내 마음의 실제 상황과 하나님이 실제로 제일 좋다고 하는 객관적 사실의 거리를 평생 좁혀나가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이 거리를 좁혀나가며 살다 죽는 것이 선민의 삶입니다. 여기에는 육체를 벗을 때는 하나님의 좋음을 왕성하게 소화하는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리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내가 죽기만 해봐라. 하나님의 좋음을 100% 소화하며 사는 영원한 삶이 나를 기다린다.’라고 벼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죽은 뒤에만 실현가능한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소화력을 강화해 나갈 수 있고, 하나님 좋음의 실감의 정도를 늘려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민인 우리가 평생 해나가야 할 일입니다. 사업을 할 수도 있고, 정치를 할 수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군인일 수도 있으며, 택배를 할 수도 있고, 택시 기사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에 대한 소화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좋음에 대한 소화력을 강화하여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모든 세상 것들에서 좋음의 자격을 박탈하고, 세상 것에는 좋음이 아무것도 없다고 실감할 정도까지 하나님 좋음을 실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세상 것들에서 좋음을 박탈한다고 해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좋음을 다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는 동안의 목표는 그렇게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이 세상에 있는 좋음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지만, 세상의 어떤 좋음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만큼이라도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을 본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좋음에 대한 소화력을 강화하는 첫 번째 방법은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마음의 실제 상태와 이론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인 하나님의 유일하신 좋음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척도입니다. 이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좋음에 대한 소화력을 강화할 수가 있느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제시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우리에게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에 기록된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내게서 지켜지지 않는다면 나를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좋음을 내 것으로 만든 상태로부터 거리가 떨어져 있다면 이방인입니다. 그러한 나를 알았다면 십자가에서 가차없이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 좋음을 온전히 소화하여 실감한다면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하나도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고 저절로 다 지켜집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등장합니다. 구약의 율법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나 사도 바울이 교인들을 향해 보낸 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는 상태에서는 이러한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하나도 부담감 없이 느껴집니다. 반대로 이러한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부담으로 느껴진다면 그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고 실감할 수 있는 자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거리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떨어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그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하나님의 유일하신 좋음과의 거리는 좁혀집니다.

 

하나님 좋음에 대한 소화력을 강화하는 두 번째 방법은 삶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13~15절을 보면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킬 때 나타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자대로라면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만한 고통스러운 지병을 앓았던 사도 바울은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취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는 여러 방면이 있습니다. 그 옛날로 돌아가자면 밭을 갈아야 했고,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를 키워야 했고, 양과 소를 키워서 새끼를 번성시켜야 했습니다. 또 자녀를 낳아 기르고, 건강한 몸으로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렇듯 삶에 대해서 신경 쓸 일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면 이러한 일들에 대해 하나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민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 자들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일들을 신경 쓰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전혀 마음 쓰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도 잘못됨이 없고, 가축들이 번성할 것이고, 밭은 풍성할 것이며, 악질이 걸리지 않을 것이며, 모든 민족보다 더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때 나타나는 일은 세상 것들에서 좋음의 자격이 박탈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 삶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음이 아니기에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삶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다면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몸이 이래서 몇 살이나 더 살겠는가?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얼마나 버티겠는가?’라고 신경을 씁니다. 이때 선민이라면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에 앞서 내가 지금 하나님 좋음을 전혀 소화를 못 시키고 있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수 있다면 몸이 어떻든, 재정 상황이 어떻든, 자녀나 배우자가 문제든 신경 쓸 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인지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삶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하나님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고 최고의 좋음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비유적으로 돈 100억이 제 발로 나를 찾아와서 가져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 하나님을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면 삶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됩니다. 반대로 삶을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 말고 십자가에서 죽기를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에 대해서 자꾸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쓰인다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찾아오셔서 당신을 가지라고 하셨는데, 나는 하나님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수 있다면 세상일이 신경 쓰일 리가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라고 여기게 됩니다. 10절을 보면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지 못해서 세상에 마음을 쓴다면 세상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당장에 보응이 나타납니다. 당장 마음에 걱정이 더 커지고, 근심이 더 커지고, 일은 점점 더 꼬이게 됩니다.

선민이라면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지 못해서 세상일에 마음을 쓰고 신경을 쓰는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상태를 깨달았다면 즉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나에게서 튀어나오는 이방인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죽여야만 합니다. 당장에 먹고살 돈이 없다면 신경이 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했다면 그러한 상황에서도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신경 쓰시니 너는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지, 하나님도 신경 안 쓰시니 너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겠다 저렇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내가 신경 쓸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신경 쓰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좋음에 대한 소화력을 강화하는 세 번째 방법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17절 이하를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살면서 두려워할 일이 많습니다. 걱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워할 일이 생길까 걱정합니다. 두려움은 이 세상의 상황을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든 상태에서 발생합니다. 세상의 좋음과 나쁨에 대한 소화력이 왕성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쁘다고 여기는 일을 마음에 받아들여 소화하고 실감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 두려움이고 걱정이고 염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풍랑 속에서 주무신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제자들은 풍랑에 대한 소화력이 엄청났습니다. 그렇기에 살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이것은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힌 광란의 몸짓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세상 상황에 대해서 반응하여 행동하지만, 사실은 세상의 좋고 나쁨을 왕성하게 소화하여 실감함에서 나온 광란의 몸짓입니다.

돈이 없는 상황을 너무도 잘 소화합니다. 실핏줄 끝까지 돈이 없다는 상황의 자양분이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로부터 손과 발과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이 하나님이 보실 때 미친 짓이 됩니다.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은 옆에 계신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소화하고 계셨기에 풍랑 속에서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을 소화하지 못했기에 광란의 몸짓을 보였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산해진미를 쌓아놓아도 소화할 수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것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대해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이 생겼다면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당신을 가지라고 내어주셨다. 그런데 나는 이 산해진미를 소화하지 못하기에 세상일로 걱정하고 있다.’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걱정에 빨려 들어가서 걱정하는 것은 선민의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 걱정에 빨려 들어가고 세상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를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선민인 내가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수 있다면 걱정 두려움이 생길 수가 없다.’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선민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체질은 선민이든 아니든 똑같습니다. 다만 선민은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사실로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좋음을 내가 소화할 때 어떤 상태가 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아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하지 못하는 상태의 나를 십자가로 죽이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선민이 되었다고 해서 즉시 하나님의 좋음을 충만하게 느끼고 실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선민의 삶이란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하나님 실감의 거리를 인지하고 좁혀가는 과정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좋음을 완전히 소화하고 완전히 실감했을 때의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온 거리를 인지합니다. 그리고 거리가 멀어졌음을 알았다면 그러한 나를 십자가로 계속 죽여갑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완전히 소화하고 실감하는 자리까지 거리를 좁혀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우리의 인생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과정이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의 여정입니다. 선민이 할 일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 하나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나를 하나님이 장갑으로 끼셔서 무슨 일을 하실지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 있기에 우리가 신경 쓰고 마음 쓸 일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 좋음을 완전히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 실감하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온전히 하나님을 소화하여 가진 상태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거리가 떨어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면 그 상태에서 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오늘 거리를 보며 나를 죽이면 하나님이 내 삶을 사십니다. 또 다음날도 거리를 보며 나를 죽이면 또 하나님이 내 삶을 사십니다. 이러한 순간순간을 모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하나님의 좋음을 온전히 실감함이 이루어집니다. 최소한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겼던 것들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도 좋음으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했습니다. 이 소망을 안고 우리는 오늘도 살아갑니다.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오셔서 당신을 가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하나님의 좋음을 소화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좋음을 소화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증거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못하고, 삶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두려워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보면서 하나님 좋음을 실감함에 거리가 떨어져 있음을 깨닫고 십자가 죽음을 반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에 대한 소화력은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강화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은혜가 더 필요합니까? 이미 주신 은혜를 소화할 소화력을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소화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증상에 민감하게 하시며, 그러한 이방인인 나를 용납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가차없이 죽이는 삶의 여정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