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출장안마,출장마사지,바나나출장안마이미지출장안마출장마사지

(S) 하나님은 내 편이냐 내 상대냐_태승철

by 태승철 · 25-11-17 08:46 · 307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은 내 편이냐 내 상대냐>의 줄거리 :

호렙산인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선민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 언약의 핵심 내용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언약이 체결되는 순간 이스라엘이 보인 태도입니다. 여러 가지 충격적인 현상을 동반하시면서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이 두려움의 의미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렇게 언약의 순간에 가지는 두려움은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마음으로 상대하던 모든 대상을 포기하고 앞으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상대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냐 내 상대냐

 

(신명기 4:44 ~ 5:33)

 

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444~49절까지는 모세의 세 편의 설교 중 두 번째 설교가 시작되는 서론 부분입니다. 설교의 본 내용은 5장으로부터 시작합니다. 5장에서는 호렙산이라고도 불리는 시내산 언약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십계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22~27절까지를 읽어보았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은 내 편이냐 내 상대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까? 내 상대이십니까? 이 질문은 시내산 언약과 관계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충격적인 현상들을 동반하시며 강림하셔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셨고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언약이 맺어집니다. 모세는 이렇게 언약이 맺어진 상황을 회고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이 두려움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918~19절을 보면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장면을 묘사하기를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충격적인 현상들과 함께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현상들을 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최고조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은 극한 상태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라는 느낌이 이보다 더 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모세는 이 상황을 회고하며 이스라엘이 두려워했음을 언급합니다. 5절을 보면 그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불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닙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은 불이라는 현상을 동반하며 강림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십계명을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다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어지는 26절을 보면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음을 언급하며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이 두려움은 지금 모세가 시내산 언약을 회고하면서 두 번째 설교에서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려움이 이해되십니까? 우리는 시내산의 상황을 떠올리며 그럴만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갑자기 어두워질 정도로 산 위에 구름이 빽빽하게 임하고, 불이 일어나고,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번개와 천둥이 치고, 고막이 터지는 나팔 소리에 온 산이 진동합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현상을 동반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두려움의 이유를 죄인 됨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한 것은 출애굽으로부터 두 달 만이었습니다. 이들은 두 달 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최고조로 느낀 것은 시내산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임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최고조로 느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재앙이 애굽과 바로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열 번이나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이때 느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강도는 시내산에서 느낀 것보다 결코 작지 않았을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는 평균 깊이가 500미터 정도이고 가장 깊은 곳은 무려 3,000미터나 됩니다. 평균으로 잡아도 아파트 200층에 해당하는 깊은 바다입니다. 마천루의 대명사로 불리는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381미터인 것을 염두에 두자면,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롯데타워가 555미터라고 하니 이스라엘이 건너는 양옆으로 롯데타워만큼의 물 벽이 쌓였던 셈입니다. 철골로 만들어진 벽도 아니고 출렁대는 물이 벽을 이루었고 이스라엘은 그 가운데를 지났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 도하나 시내산 강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느낌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때나 홍해 도하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낀 것 자체는 똑같습니다. 어느 때 하나님을 더 강하게 느꼈는가를 따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세는 본문에서 그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강조점을 두고 시내산 언약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덮으셨습니다. 당시의 최강국이었던 애굽은 하나님 앞에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홍해 도하 사건에서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분노한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을 상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애굽을 상대하는 중에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응원하시고, 나의 조력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축구 한일전이 벌어졌습니다. 한국 선수가 일본 선수를 상대할 때, 대한민국 국민은 선수들의 응원자이고 조력자입니다. 한국 선수들이 국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는 다릅니다. 시내산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이 언약은 이제 이스라엘이 상대하는 대상이 하나님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상대한 대상은 애굽이었고 홍해였으나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은 다른 대상을 상대할 때 응원하고 돕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으로부터 하나님은 유일한 상대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상대자로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언약 체결의 의미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상대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두려움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대상을 상대자로 마주할 때 나를 응원하시고 내 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찬양의 대상입니다. 마치 홍해를 건넜을 때 미리암이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하자 이스라엘 전체가 따라 불렀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시내산 언약을 통해 입장은 바뀝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 바뀌신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십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상대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 자신이 되었습니다. 상대가 바뀌자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 하나님을 상대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26절을 보면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육신을 가진 자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마음이 눈에 보이는 대상에 달라붙은 상태를 육체화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육체에 밀착해서 육체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은 대로 따라가는 대상의 존재감과 만족감으로 채우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인 마음이 육체화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우리의 영인 마음이 육체화되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고깃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이렇듯 마음이 육체화된 상태에서 영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최고조로 느끼게 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상대자로 정하시고 십계명을 주십니다. ‘이제 너는 십계명을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나를 상대해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육체화 된 마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두렵게 여깁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나는 그 하나님을 바라봐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상대자로 삼아야 하는 상황에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력자가 되어주시는 상황과 하나님이 상대자가 되시는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다른 대상을 상대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내 소원을 따라 내 편이 되어주시고 내 조력자가 되어주실 때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육체화된 마음에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우리 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마음이 육체화되었습니다. 마음이 육체와 밀착해서 오감을 따라 움직이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육체화된 상태에서 영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분명하게 느껴지고, 그 하나님을 상대해야 된다고 느낄 때는 아이고, 나는 죽었구나.’라고 본능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육체화되어 살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애초에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관계의 계약입니다. ‘이제 네 상대는 나고, 내 상대는 너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상대해야만 하는데, 육체화된 내 마음 상태로는 두려워서 하나님께 조금도 더 가까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 딜레마의 국면에서 내 편을 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관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관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자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조력자나 응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출애굽 때처럼 믿음이 시작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믿음이 시작되었다면 이제 하나님을 상대자로 관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편이 아닌 상대자로 여기며 계약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시내산 언약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계약은 도저히 육체화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살아계시며 영이신 하나님을 상대할 수가 없는데 상대해야만 합니다. 이때 내 편이 되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상대해야만 하는데 상대할 수 없는 딜레마를 넘어서게 하십니다. 시내산 언약 때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중재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상대자를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육체화된 내 마음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는 자로 우리를 탈바꿈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종교인으로 살던 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이때 믿음은 언제나 육체화된 상태였습니다. 내 마음은 몸에 밀착되어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에 있는 대상을 상대자로 여기는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세상을 상대하는 중에 조력자나 응원단장이 되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내 생각과 바람과 기대 등에 부응해 주시는 내 편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상대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육체화된 상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면 이제 상대자가 바뀌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으로부터 두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상대자는 하나님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서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던 이스라엘과 같은 두려움을 가져본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이 상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을 불러들이고자 하는 상태에서는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시내산 언약에서처럼 아직 하나님을 상대자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세상을 상대자로 여기며 하나님이 내 편이 되기를 바라는 종교인의 상태일 뿐입니다. 혹은 전혀 그 상태를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제 정치에서 중진국 함정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후진국에서 중진국까지 도달한 나라는 많습니다. 그런데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가 힘듭니다. 근현대사에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신앙에도 중진국 함정과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종교심의 단계에서 믿음의 단계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조력자나 응원단장으로 여기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언약의 상대로 관계하는 상태로 진입하지 못한 채 인생이 끝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육체화되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만을 상대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나의 조력자이고 응원단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살다가 죽는다면 육체화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보존한 채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이 함정을 탈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려 하니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생깁니다. 내 마음이 육체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로 만나는 대상을 깊이 받아들이며 상대하고 있어서, 마음은 세상으로 얼룩져서 더럽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영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면 당장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을 느끼는 자가 하는 일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마음이 육체화되어서 이 세상 것을 상대자로 삼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상대자로 여기는 마음가짐으로는 하나님을 상대자로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을 상대자로 여길 때 하나님은 조력자이고 응원단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 편이라고 여기기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상대자를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 때문에 마음이 괴롭다면 몸을 상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을 상대하는 상태를 죽이지 않고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한 하나님은 조력자이고 응원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단계를 거치지 못한다면 아직 하나님을 상대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몸이 아픈 상황에서 몸을 걱정하던 중에 하나님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대자를 하나님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을 상대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상대하는 상태로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모세는 두 번째 설교를 시작하며 시내산 언약을 언급합니다. 가나안 땅에서 선민이 복지를 산다는 것은 항상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상대자로 여기며 사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몸이 아플 때도 마음은 몸을 상대자로 여길 수 없습니다. 상대자를 하나님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상대자로 여길 때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마음이 몸을 상대함으로써 마음 안에 몸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상번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세상을 상대자로 여기던 마음은 어린양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번제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어린양이 바쳐집니다. 그리고 바쳐진 어린양은 몇 시간이고 타오릅니다. 내 마음이 육체로 만나는 대상들을 상대자로 삼아 관계를 하려고 할 때마다 성전에서 어린양이 죽는 것을 떠올리며 같이 죽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는 대상을 마음의 상대자로 느끼는 나는 어린양과 함께 죽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린양의 죽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상대자로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하기 위해서는 육체화된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합니다. ‘육체로 만나는 대상을 상대하고 있는 너의 마음은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상대할 수 있다. 하나님을 마주하여 좋아할 수 있고, 하나님 자신이 기쁨이 되심을 알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 이스라엘은 미리암을 따라 기쁨으로 노래했습니다. 다만 하나님 자신으로 기뻐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바로와 애굽 군대와 홍해를 상대자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주셨다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시내산 언약의 의미는 상대자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나의 언약의 대상이다. 내가 너의 상대자다.’라고 말씀하신 사건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체결한 사람이라면 사업을 하더라도 사업을 마음의 상대자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내산 언약의 의미는 십자가에 집약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제시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의미는 하나님만 상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안 되는 상황에서 마음이 사업을 상대자로 삼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사업을 상대하려고 하는 내 마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세상 것을 상대하지 않는 백옥 같고 흰 눈 같은 마음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내 마음이 육체화된 상태에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흰 눈같이 되었을 때의 특징이란 하나님을 마주할수록 하나님이 좋고 하나님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이 육체화를 벗고 흰 눈처럼 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는 육체화의 길을 자꾸 가려고 하기에 십자가를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공부할 때 결국 십계명은 제1계명 하나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의 첫 번째 내용인 십계명의 제1계명입니다.

언약의 의미는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상대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대상을 상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제1계명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하고자 한다면 다른 신을 둘 수 없습니다. 이는 곧 마음에 다른 대상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이란 내 마음과의 관계에서 신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오는 대상입니다. 언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내 마음에서는 하나님만 상대자가 되셔야 합니다. 마음으로 건강을 상대한다면 건강이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마음으로 사업을 상대한다면 사업이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마음으로 자녀를 상대한다면 자녀가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같은 이유에서 배우자가 다른 신이 될 수 있고, 직장 일이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제1계명으로부터 제4계명까지 전부 하나님을 상대자로 삼는 일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3계명에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만 내 마음의 상대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으로 상대함이란 그것에 대해 반응하여 생각하고, 감정이 움직이고, 의지가 발동하고, 말과 행동이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상대할 때 하나님은 조력자나 응원단장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한 셈입니다.

4계명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 이어진 후에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먼저 상대자로 삼는 것입니다. 상번제 어린양의 죽음으로 육체화된 마음이 깨끗해질 때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만족감으로 채워짐으로써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럴 때 제5계명부터 이어지는 계명은 다 저절로 지켜지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을 상대자로 하고 나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사업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마음에서 사업을 상대자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사업을 상대하려는 육체화 된 나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로 여깁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아무도 상대하지 않는 백옥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먼저 상대합니다. 백옥 같은 마음으로 흰 눈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상대할 때,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업이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을 만큼 하나님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상대자로 삼을 수 없습니다. 사업을 상대자로 삼으면 사업이 잘 풀려야 좋습니다. 몸을 상대자로 삼으면 건강해야 좋습니다. 자녀를 상대자로 삼으면 자녀가 형통해야 좋습니다. 배우자를 상대자로 삼으면 배우자가 내 말을 잘 들어줘야 좋습니다.

사람은 상대하는 대상으로부터 좋음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상대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좋음을 찾게 됩니다. 다른 일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여 하나님과 연합한 내 마음이 유지되면 내 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상태를 검증하는 것이 율법의 의미입니다. 앞으로 많은 율법과 규정과 규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해야만 한다는 언약의 의미를 알아야만 율법과 규정과 규례의 의미도 제대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같은 편이십니까? 상대자이십니까? 여러분이 세상에 있는 대상을 마음으로 상대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상대자가 아닌 조력자이자 응원단장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좋고 나쁨을 따지기 이전의 문제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시내산 언약의 의미를 모른 채 하나님 자신을 상대조차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고 하면서도 세상을 상대하는 육체화 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조력자이자 응원단장으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상대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아직 시내산 언약의 단계 안으로 진입도 못한 상태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알 때, 십자가에서 죽는 의미도 알 수 있습니다. 언약은 상대하기 시작했다는 뜻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세상을 상대하는 내 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을 상대하는 계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을 부르게 해 주시옵소서. 육체화된 내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는 이 두려운 상황에서 내 편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붙잡음으로써 두려움을 능히 넘어가서 기쁨과 환희 가운데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날마다 마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