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제비뽑기 정신의 생활방식>의 줄거리 :
십자가 생활화 안에는 제비뽑기 정신의 생활방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비뽑기는 단순히 땅 분배 방식이 아닙니다. 제비뽑기는 내 마음이 내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따라가려는 빗나감의 체질을 철저히 막아 줍니다. 그 결과 제비뽑기 정신은 선민들에게 하나의 특정한 생활방식을 익히도록 해줍니다. 살면서 만나는 그 어떤 상황이나, 땅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전혀 아까워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좋아하고 아까워하는 것을 일상의 목표로 삼는 생활방식입니다.
제비뽑기 정신으로 살자
(신명기 3:12~22)
12. 그때에 우리가 이 땅을 얻으매 아르논 골짜기 곁의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 산지 절반과 그 성읍들을 내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주었고
13. 길르앗의 남은 땅과 옥의 나라였던 아르곱 온 지방 곧 온 바산으로는 내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노라
우리는 요단강 동편의 땅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 분배하신 12~13절을 읽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말씀이 이어진 이후에 23절부터는 모세가 가나안 땅을 향한 간절한 열망을 표현하는데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국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제비뽑기 정신으로 살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제비뽑기를 할 때의 자세나 태도가 우리에게 특정한 생활방식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러한 제비뽑기 정신으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생각하는 중에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며,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확인하는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강 동편 땅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민수기에서도 나왔습니다. 이들의 눈에 요단강 동편 땅은 너무나 좋은 목초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모세에게 요단강 동편 땅을 기업으로 요청했고, 모세는 이들에게 동족 이스라엘이 서편의 땅을 다 정복할 때까지 앞서 싸울 것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이들은 모세의 조건을 수락하여 전쟁에 참여하기로 하고 모든 정복 전쟁이 끝난 후에야 기업으로 얻은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요단강 동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안에 들어있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물론 전지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실 때,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편을 요청하여 얻게 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벗어나서 다른 땅을 요청할 것을 아셨으며 당신이 허락하실 것도 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오고 오는 세대의 선민에게 전하시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선민은 절대로 자기 눈으로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때를 기준으로만 봐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4천 년 전에 선민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민이라면 4천 년 전 계획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이 계획 바깥으로 뛰쳐나가게 하는 요인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이라는 느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마음이 따라 움직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과 뜻 바깥으로 튕겨 나가게 됩니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편 땅을 기업으로 요구한 사건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눈으로 보기에 좋은 대로 마음이 따라가는 삶과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는 삶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그 대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요단강 동편의 땅을 얻은 두 지파 반과 요단 서편의 땅을 얻게 될 아홉 지파 반의 차이는 제비뽑기의 유무로부터 시작됩니다. 요단 동편의 땅을 얻은 두 지파 반은 제비뽑기와는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바깥으로 튕겨 나갔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서 이들처럼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는 모습이 나타나서는 안 됨을 가르쳐주십니다. 이제 제비뽑기를 해야 하는 자들은 아홉 지파 반입니다. 이들은 제비뽑기를 상실한 자들과 어떤 점이 다른 것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제비뽑기는 단순히 복불복(福不福)이 아닙니다. 복불복이란 복이 주어지든 주어지지 않든 운명이고 팔자이기에 불평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미에서 제비뽑기를 분배의 방식으로 채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도 이전에 제비뽑기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제비뽑기는 정복 전쟁을 다 끝낸 다음에 해도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제비뽑기를 염두에 두고 땅을 대하는 태도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살 땅을 정하고 대하는 태도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눈에 보이는 좋은 대로 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노아 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고깃덩어리가 된 이유는 자기들의 눈에 좋은 대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낭패를 겪게 된 것도 눈에 보이는 대로 기름진 땅을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 사는 선민은 절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이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제비뽑기가 어떤 상황을 만들어 내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을 시작해서 어떤 족속이 사는 땅을 정복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제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어서라도 그 땅을 평가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땅은 참 좋다고 여겨질 것이고, 어떤 땅은 참 척박하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어떤 땅은 목초지로 쓰기에 합당하고, 어떤 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산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어떤 땅은 교통이 편리하고, 어떤 땅은 구석지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이렇게 자동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의 평가가 이루어질 때, 이들은 제비뽑기로 땅이 분배될 것을 생각합니다. 내 눈에 좋아 보여도 내 눈에 나빠 보여도 제비를 뽑은 결과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요단강 동편을 좋게 여겨서 기업으로 받은 자들과는 명백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내 눈에 좋게 보이는 대로 마음이 따라가서 땅을 달라고 말하는 사람과 내 눈에 좋게 보이든 나쁘게 보이든 하나님의 제비뽑기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람의 태도가 같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자기 부인이라는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제비뽑기의 정신을 가지고 땅을 보면 자기 부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땅이 보기에 좋다고 판단될 때는 그 땅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부인하게 됩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는 이 땅은 나와 무관할 수도 있으니 김칫국부터 마시면 되겠는가? 아무리 내 눈에 좋게 보이고 이 땅을 놓치기 아까울지라도, 하나님 뜻 안에 없는 일이라면 어차피 나와 상관없다. 안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제비뽑기 때문에 보기에 좋은 것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비뽑기의 정신을 갖고 생각하면 나를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땅이 자기 눈에 보기에 나쁨으로 판단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땅을 싫어하면서 거부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도 ‘하나님 뜻 안에서는 내가 이 땅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 뜻 안에 내가 이 땅에서 살게 된다면, 이 땅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땅을 싫어하는 마음을 그대로 두어서는 살 수가 없다.’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요단강 서편에서 정복 전쟁을 치르는 아홉 지파 반은 땅을 정복할 때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과정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정복한 땅이 좋아 보여도 나빠 보여도 어차피 제비뽑기 정신 때문에 자기를 부인합니다. 모든 땅을 정복할 때까지 이것을 반복해 나갑니다. 좋은 땅을 만날 때도 그 땅을 좋아하는 나를 부인하고, 나쁜 땅을 만날 때도 그 땅을 싫어하는 나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요단강 동편에서 땅을 얻은 두 지파 반에는 이렇게 자기 부인이 반복되는 과정이 상실되었습니다.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어떤 차이가 생겼을까요? 좋음을 우로 여기고 나쁨을 좌로 여긴다면, 제비뽑기는 좌우로 치우치려는 나를 반복해서 부인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가 아니었으면 자기 부인은 선민의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좋은 땅을 만날 때도 나쁜 땅을 만날 때도 자기를 부인합니다. 이제 남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제비뽑기의 정신을 갖고 있기에 마음에서 좋은 땅도 치워버리고 나쁜 땅도 치워버립니다. 마음에는 내게 땅을 주시려고 계획하시는 하나님만 남습니다. 요단강 서편에서 땅을 분배받을 아홉 지파 반은 정복 전쟁 내내 이 일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존중하게 됩니다. 자기 부인이 반복되면서 하나님 존중이 연습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을 바라는 마음이 부인되고 나쁜 땅을 거부하려는 마음이 부인될수록, 땅 자체의 좋고 나쁨은 점점 작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점점 커집니다. 땅을 정복하면 정복할수록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존중은 점점 커지고 땅에 대한 비중은 점점 줄어듭니다.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으니…”라고 했습니다. 대적을 두려워함이란 마음이 대적에 가서 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대적을 현실로 생각하는 것이기에, 내 마음에서 대적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입니다.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현실인 상태에서 우리가 치러야 하는 전쟁입니다. 전쟁을 치르는 현실에서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함이란 마음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쳐버리고 대적이라는 사실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대적을 현실로 승격시키지 말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현실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이 되시려면 내 마음은 먼저 하나님께 붙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의 현실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현실인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계획과 약속을 땅에서 이루십니다. 그렇게 땅에서 이루실 때 나타나는 일에 대해서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친히 이루십니다. 이제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결과물이 남습니다. 그것이 보기에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보기에 좋다고 해서 아까워하고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요단강 동편에서 땅을 얻은 두 지파 반의 태도입니다. 이들이 보기에 요단강 동편의 땅은 목초지로 좋았습니다. 그렇게 여기자 땅이 아까워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경고를 주십니다. ‘내가 친히 움직여서 땅에서 이룰 결과물을 아까워하지 말아라. 또 내가 친히 움직여서 땅에서 이룰 결과물을 거부하지도 말아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의 현실이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움직이실 때 결과물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내 판단으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다고 아까워해서는 안 되고, 나쁘다고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제비뽑기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제비 뽑아 분배할 것을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원하셨던 것은 땅보다 하나님 더 큰 현실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대적보다 하나님이 더 큰 현실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제 하나님이 친히 땅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보다 하나님을 더 아까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을 아까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까워할 수 있어야 하고, 나쁜 땅을 거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놓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비뽑기의 정신으로 만들어지는 생활방식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내게 어떤 삶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좋아하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않는 태도가 제비뽑기 정신입니다. 돈이 없는 상황은 좋아할 상황이 아니지만 마음으로 거부할 상황도 아닙니다. 돈 없는 상황을 싫어하고 거부하려는 마음 자체를 부인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지금 돈이 없는 상황은 제비뽑기로 주어진 땅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비뽑기의 정신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땅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밀착되어서는 안 되고, 싫어하여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계획은 그다음 상황으로 이어지며 수행될 수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을 좋아하거나 거부한다면 그 상황에서 이어지는 다음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다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으로 보기에 좋거나 눈으로 보기에 싫은 대로 마음이 움직이면 안 됩니다.
제비뽑기의 정신은 자기 부인입니다. 내가 좋아해도 내 땅이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내가 싫어해도 내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주어질 수밖에 없기에 이 땅을 좋아하는 나를 부인하고, 저 땅을 싫어하는 나를 부인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비뽑기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 제비뽑기 정신의 생활방식은 우리에게 십자가 생활화로 적용됩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이 내 눈에 보기에 좋든 나쁘든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기에 좋든 나쁘든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애초에 땅 자체를 아까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든 이미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든 그것은 내가 아까워할 일이 아닙니다. 아까워한다면 요단강 동편에서 땅을 요구한 두 지파 반과 같습니다. 선민이 아까워해야 할 대상은 땅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제비뽑기의 정신으로 임하면 땅이 좋을 때도 자기를 부인하고 땅이 나쁠 때도 자기를 부인합니다. 남는 것은 땅을 결정하시는 하나님뿐입니다. 이처럼 내 마음에서 하나님만을 남기는 것이 제비뽑기 정신의 궁극적인 취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내가 친히 너희의 삶을 이끌어 갈 때 분명히 나타나는 결과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물들에 마음을 붙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적에 마음을 붙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나타난 결과물에 대해서는 제비뽑기의 정신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과물이 좋게 느껴지든 나쁘게 느껴지든 마음이 붙들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러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 자신만을 계속해서 아까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창 연애 중인 커플이 있습니다. 어느 날 남자 친구가 일을 잘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여자 친구도 함께 기뻐하지만 그 일을 마음에 담고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일을 해낸 남자 친구를 더 좋아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가 이와 같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단강 동편에 자리 잡기로 한 두 지파 반은 이제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다 보았습니다.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친히 무찌르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멋짐에 반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이루신 결과물을 탐내며 요단강 동편의 땅이 멋지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일을 해 나가실 때 눈으로 보기에 좋게 나타날 확률은 높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수많은 고난이 이어지며 사역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좋다 나쁘다 말할 수는 없지만 힘들고 괴롭고 역경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실 때 어떤 상황이 주어질지 모릅니다. 이것이 모세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모세는 요단강 동편에서 기업을 받은 두 지파 반과 달리 자기 기업에 대한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세에게도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6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선민의 지도자로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바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기업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볼 수만 있게 해달라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26절에서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딱 잘라서 모세의 간구를 거절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에 모래와 같이 자손이 많아지리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약속을 받은 것은 75세 때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이후로도 본부인인 사라에게서 오랫동안 아이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86세에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나, 집사인 엘리에셀이 후사를 잇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바람을 허락하시지 않으시고, 사라를 통해 낳은 아이가 약속의 후손이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이삭은 단순한 늦둥이가 아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한 필요불가결의 고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로마서 4장 21~22절에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이 마음으로 이삭을 죽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었다는 사도 바울의 해석과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마음에서 죽였음을 합치면 본문에서 제시된 제비뽑기의 정신과 상통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이루어 가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한편, 이와 동시에 이삭을 번제로 바칩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이 약속의 결과물을 완전히 마음에서 지워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이라는 고리를 통해 이루어질 약속의 결과물들을 완전히 마음에서 지워버린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선민의 조상으로 우뚝 섰습니다.
선민은 약속을 받고 약속이 지켜지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동시에 선민은 약속을 통해 이루어질 세상의 결과물들을 마음에서 흔적도 없이 지우며 사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선민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은 자로 끝났던 것이 아닙니다. 받은 약속의 결과물을 마음에서 지운 자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서 드러나는 선민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셔서 이루신 땅 위의 결과물을 마음에서 완전히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제비뽑기의 정신이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비뽑기를 통해 ‘내가 어느 땅을 주든 그 땅을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선민은 땅을 좋아할 자격도 없고 싫어할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비하면 땅은 마음을 붙일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것을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크기를 비교해 본다면 홍해가 갈라진 것도 작은 사건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좋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홍해가 갈라진 것은 기억해도 하나님을 기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멸절당했습니다. 이들은 홍해가 갈라진 것만을 기억하며 광야의 상황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좋아하는 대신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결과물만을 좋아한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기적만을 좋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결과물만을 좋아한다면, 그다음 단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들은 친히 역사하심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할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결과물에 마음을 두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제비뽑기로 땅을 나눌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땅을 정복할 때마다 마음에서 땅을 버려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땅을 친히 정복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결과물을 마음에서 계속 버려야 했습니다. 좋아해서 마음이 밀착하려는 내 마음을 죽입니다. 싫어해서 거부하려는 내 마음을 죽입니다. 아예 마음 자체가 땅에 붙지 않게 만듦으로써 마음에서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결과물을 제거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제시된 선민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수립하신 계획이 땅에서 이루어지려면, 나는 땅의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곧 내 몸과 관계된 사실들이 나의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만 나의 현실이 되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현실이 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현실성 안에서 친히 이루어 나가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나의 현실이 아닌 상태라면 나와 관련된 어떤 일도 친히 이루어 나가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현실이기 위해서는 다른 대상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실에 대해서만 반응할 때 하나님은 나의 현실이 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현실이기에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때 나타나는 결과가 세상 기준으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좋으면 마음이 밀착하려 하고, 싫으면 마음이 거부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지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제비뽑기의 정신입니다.
눈에 좋게 보여도 제비뽑기로 내게 주어지지 않을 수 있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눈에 안 좋게 보여도 제비뽑기로 내게 주어질 수도 있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좋아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거부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좋아할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 있게 지음받았기에 채워지고자 하는 역동성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제비뽑기의 정신을 생각한다면 땅에 대해서는 좋아도 움직일 수 없고, 나빠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움직여야 할 마음이 향할 곳은 하나님뿐입니다. 이것이 제비뽑기 정신에 깃들어 있는 취지입니다.
우리는 이 정신으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기준으로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습니다. 좋으면 밀착하려는 마음, 나쁘면 거부하려는 마음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요지부동이 됩니다. 내 마음이 세상의 좋고 나쁨에 대해 반응하며 움직이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다음 단계로 나가실 수가 없습니다. 좋은 결과물도 아까워하지 않고, 나쁜 결과물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역동성은 해소되어야만 하기에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따라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께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제비뽑기의 정신이 바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아야 될 이유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해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제비뽑기의 정신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십자가를 붙잡아야 될 포인트를 정확히 잡으시고 하나님만 존중하는 하루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 담겨 있는 제비뽑기의 정신을 이스라엘 백성의 땅과 연관된 사건들을 통하여 자세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제비뽑기의 정신을 오늘 하루 종일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 내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