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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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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 적응법_태승철

by 태승철 · 25-11-10 09:09 · 407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 적응법>의 줄거리 :

나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정말 끊임없이 대적, 문제, 난관, 변수 등등을 만납니다. 그런데 내가 선민이라면 최소한 사천 년 전 아브라함 때에 이미 이런 모든 대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미 계획을 다 수립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제 내가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전에 세워놓으신 당신의 계획들을 친히 차질 없이 이루어 나가시는 일에 적응하는 일입니다. 이 적응이 선민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친히 행하시는 상황에 잘 적응함으로써 하나님께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선민 자신은 삶으로부터 정말 자유로워야 합니다.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 적응법

 

(신명기 3:1~22)

 

21. 그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22.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우리는 앞서 2장에서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시혼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헤스본은 아모리의 남 왕국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아모리의 북 왕국 바산 왕 옥과의 싸움에 대한 말씀과 아모리 남북 왕국을 무찌른 후에 그 지역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21~22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 적응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에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행하실 때, 우리는 어떻게 적응해야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바산은 아모리 북쪽 요단강 동편입니다. 이스라엘은 헤스본 왕 시혼 왕을 이기고 아모리 남쪽을 정복했고, 이어서 바산 왕 옥을 이김으로써 아모리 북쪽도 정복했습니다. 요단강 동편인 아모리 정복은 가나안 정복을 본격적으로 치르기 전에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모리 정복은 본격적으로 치러야 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한 연습이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이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아모리를 통해 앞으로 이루어질 가나안 정복 전쟁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했던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전쟁 연습을 통해서 익혀야 할 것은 단지 싸우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라는 말씀대로 친히 싸우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전쟁에 잘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연습으로 제시된 아모리 정복에 담긴 주된 의미입니다. 또 이것은 전쟁에만 적용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분배받은 땅에서 살 때도 약속의 복지 특징대로 하나님이 친히 사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남북 왕국과의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 적응법을 연습했습니다. 전쟁이란 삶에서 겪는 가장 극한의 상황입니다. 가장 극한 상황인 전쟁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내 삶을 친히 사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연습했던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용감하게 잘 싸울 수 있느냐를 연습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잘 사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는 대적, 원수, 문제, 난관, 변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과제는 이것들과 잘 싸워서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와 난관과 변수는 하나님이 친히 싸워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친히 싸워 나가시는 하나님께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다는 말 자체가 의문이 듭니다. 이스라엘은 헤스본 왕 시혼과의 전쟁이나 바산 왕 옥과의 전쟁에서 자기들의 몸을 움직여서 싸워 이겼습니다. 칼과 창을 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대적들을 물리쳤습니다. 지치도록 몸을 움직여 싸워놓고는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전쟁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과를 마치고 노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 때가 되면 오늘도 온종일 하나님이 친히 행하셨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율법이나 규정 같은 강요가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삶을 살면 오늘도 온종일 하나님이 친히 행하셨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나의 수고를 보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의 다 하셨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은 됐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친히 행하셨다는 사실을 생각으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말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본문은 아모리 남북 왕국과의 전쟁을 통해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께 적응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선민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아갈 때 겪을 각종 문제, 변수, 대적에 대하여 친히 행하실 준비를 이미 4천 년 전에 마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태초부터 존재합니다. 다만 좀 더 구체적이고 피부에 닿도록 선민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기준으로 두고 이야기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발생할 각종 문제, 변수, 대적에 대해 이미 4천 년 전에 계획을 수립해 놓으셨습니다. 그 계획에 의해 발동을 거시고 오늘 친히 행하실 준비를 다 마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실제 삶에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의 삶이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신다는 개념이 여러분의 뼛속까지 들어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전쟁터에 나가 싸워야 했듯이, 우리는 기진맥진하도록 움직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무엇인가를 했다는 생각을 조금도 할 수 없는 의식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4천 년 전에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에는 내가 당면할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을 수립해 놓으시고 친히 행하실 준비를 마치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21절을 보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의아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모세는 너희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직접 경험했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굳이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눈으로 보았다는 표현에는 선민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을 바라보는 구경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움직인 것은 바로 나인데,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 삶이지만 직접 뛰는 선수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구경꾼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몸을 움직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직접 친히 행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선민은 평생 이렇게 구경꾼의 신비한 의식 상태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바로가 분노에 사로잡혀서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추격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3~14절을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가만히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만히는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께 적응하는 법을 익힌 선민에게서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물론 홍해 도하와 가나안 정복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홍해 도하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로 구경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정복을 앞둔 상황에서는 스스로 움직여서 싸웠는데도 눈으로 보았다고 했습니다. 출애굽 때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 영글지 않았습니다. 성숙한 관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38년간 광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숙하지 않았던 때에는 하나님과의 연합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일을 그냥 구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글어서 연합할 수 있게 되었기에, 내 몸을 움직여서 싸우면서도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성경은 영이신 하나님을 바람이라는 뜻의 루아크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받아들일 때 영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은 이루어집니다. 또한 하나님 좋음의 만족감을 받아들일 때 영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가 하루 종일 기진맥진하도록 움직였는데도 하나님이 다 하셨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행여나 순간적으로 오늘도 내가 열심히 살았다라는 생각이 들어도 이것이 거짓말임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동안에 내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삶에 발생한 문제나 난관을 뚫고 나가야 하고, 변수가 발생해서 극복해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십니다. 내 몸을 움직이게 되더라도 하나님이 친히 하십니다. 그럴 때 내가 할 일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이 과정을 다 겪은 뒤라면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난관과 변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친히 모든 것을 다 행하시며, 내 몸을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친히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않음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용맹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대적과 싸워 기필코 이기고자 하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불타올라야 한다는 것일까요? 삶의 문제나 상황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반드시 해결하리라는 단호한 결심을 하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심리적 차원의 결심에 대한 요구가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현실을 선택하라는 의미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현실로 선택하고 대적을 현실로 선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민의 삶의 현장에는 언제나 싸워야 할 대적, 해결해야 될 문제, 뚫고 나가야 될 난관과 변수들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대적이나 문제 혹은 난관과 변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 번 반복하여 말씀을 드리지만, 모든 삶의 현장에는 반드시 하나님도 엄연히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엄연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은 이미 최소한 4천 년 전에 내 삶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셨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대적과 문제와 난관과 변수에 대하여 어떻게 친히 행하실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친히 행하실 준비를 마치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언제나 내 몸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고 계시며, 내 몸보다 가까이 계신다는 두 가지 사실이 언제나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픈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다는 사실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다는 사실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아버지께로 내 마음을 이끄시기 위해서 주님이 죽고 부활 승천하셨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항상 같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로부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문제나 난관에 가닿는 사실들이 현실이 됩니다. 문제나 난관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객관적 사실이 나의 주관적인 현실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은 대적들과 맞서야 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느낀다면 대적과 하나님이라는 사실 중에서 대적에 반응하고 현실로 선택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모든 현실이 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실들 중에 내 마음이 가닿는 것만이 현실로 선택됩니다.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관련해서 별일이 다 벌어지더라도, 정작 관심이 없는 사람은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곧 하나님과 문제 중에서 문제를 선택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 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건강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자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모두 사실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닿지 않는다면 나의 현실은 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갈 수 있도록 예수님이 죽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내게 주어진 문제들이 아닌 하나님을 현실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려움이란 마음의 반응입니다. 이는 곧 대적으로 비유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나 난관들에 마음이 가닿아서 현실로 선택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다양한 사실들이 존재합니다. 그중에서 지금 문제로 여겨지는 일이 무엇입니까? 왜 그 문제에 마음을 보내고 있습니까? 왜 마음을 가닿게 해서 걱정하고 근심하고 화내고 분노하고 있습니까? 왜 문제라는 사실을 현실로 선택하고 있습니까? 말씀드렸듯이 모든 사실이 나의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의 현실로 여기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의 현실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 몸이 만나는 일들이라고 해서 꼭 나의 현실로 선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게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 몸보다 내 마음에 더 가까이 계십니다. 미국이나 아프리카가 내 몸에서 멀리 있는 일이라는 이유에서 현실이 아니라면, 내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멀리 있는 몸도 얼마든지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하나님을 제쳐두고 내 몸과 관련된 일들을 현실로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돈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도 그것은 여러분의 현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현실입니다. 몸이 아픈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마음에서 몸보다 가까이 계신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굳이 하나님을 현실로 선택하지 않고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현실로 선택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현실 선택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빗나감의 죄의 체질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엄연히 마음에서 제일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을 희생시킬 만큼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 문제를 다 알고 계시고 모든 계획을 다 수립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친히 행하실 준비까지 다 되어 계십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그 하나님을 마음에서 현실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제쳐둔 채 내 마음 바깥에 있는 몸으로 만나는 문제를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럴 때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몸이 약할까?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괴로울까? 나는 왜 이렇게 자식 복이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인덕이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외모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도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굳이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빗나감의 체질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잠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관련 사실들로부터 자꾸만 빗나가려 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실을 현실로 붙잡고자 합니다.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너희를 알고 계시고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이 너희의 현실이다. 대적은 너희의 현실일 수 없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상황 속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할 일이란 현실 선택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을 통해 가르쳐줍니다. 내게 주어진 사실들 중에 마음에서 무엇을 현실로 선택할지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현실로 선택한다고 해서 나머지 사실들은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밧줄 풀린 거룻배가 망망대해를 떠돌듯이, 내가 현실로 선택하지 않은 사실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가 현실로 택하지 않은 나와 관계된 모든 사실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이미 이것을 위한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문제는 내가 몸으로 만나는 사실들을 현실로 택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두려워하고 염려합니다. 좋은 일이라면 자랑하고 싶거나 기뻐할 것입니다. 두려워하든 기뻐하든 내가 몸으로 만나는 사실들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당신의 일로 삼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실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려면 하나님이 그 일을 손에 쥐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가닿아서 현실로 여긴다면 내 손에 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그 일을 쥐실 수가 없고 친히 행하실 수도 없습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는 각종 사실들이 있습니다. 난관이 사실로 있고, 변수가 사실로 있으며, 나를 싫어하는 대적이나 원수가 사실로 있습니다. 그 모든 사실들 중에서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내게 가장 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실들은 번갈아 가면서 나를 찾아오겠지만 하나님이라는 사실만은 언제나 변함없이 내 곁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나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나를 아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항상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사실을 현실로 선택해야 할지 명백합니다.

하나님을 내 현실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종교인으로서의 삶의 기간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에서는 자동으로 문제를 현실로 느꼈습니다. 죄의 체질이 작동하도록 풀어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빗나가서 문제를 현실로 느끼는 동안 하나님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선택하지 않음이란 마음에서 하나님을 없애버린 것과 같습니다. 현실은 사실들 중에 내 마음이 가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마음이 가닿아서 두려워하고 염려하면서 현실로 채택할 때 하나님은 현실이 아니라 사실에 머무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실들이 버려지듯이 하나님도 버려진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현실이라야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다른 사실들과 함께 있기에 선택해야만 합니다. 내가 하나님 관련 사실들에 마음이 가닿아 선택함으로써 현실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게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현실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찾는 하나님은 실제 하나님이 아닌 종교의 하나님이고, 인간들이 만들어 낸 하나님이고, 개념상의 하나님이고, 교리상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신앙인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난관과 문제와 변수가 생길 때마다 그것들을 현실로 채택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거나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짜증 내거나 분노하거나 원망합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현실로 받아들인 뒤에 하나님을 비현실로 처리해 놓고 나서 개념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몸으로 만나는 사실들과 영이신 하나님 관련 사실들 중에 어느 쪽을 현실로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은 비현실이 되시기도 하고 현실이 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비현실로 처리하고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는 것을 현실로 처리했다면 기독교 종교가 말하는 그 수많은 교리는 무용지물입니다. 성경을 천 독을 하고, 성경 공부를 백 번 하고,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고, 매달 사흘씩 금식 기도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비현실로 처리된 하나님을 개념적으로 생각하며 종교 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행하십니다.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에 적응하기 위해서 내가 주체적인 인격으로서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음이란 내 삶에서 발생하는 난관과 문제와 변수와 대적과 원수와 모든 대상들을 현실로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내 마음은 하나님 관련 사실을 현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요청에는 세상 것을 현실로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을 현실로 선택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만 할 수 있으면 우리는 구경꾼으로 24시간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진맥진할 정도로 움직이고 나서도 하나님이 다 하셨다.’라는 신비한 고백과 의식 상태를 죽을 때까지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요청은 몸으로 만나는 사실들에 대하여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기를 단 한 순간도 중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처럼 사도 베드로처럼 치열한 삶을 살게 해 주시되,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것을 보는 구경꾼의 신비한 의식으로 우리 생애의 마지막 지점까지 살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고, 몸으로 만나는 사실들에 대하여 온전히 죽어서 하나님 관련 사실만을 현실로 선택하기를 중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