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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4천 년 묵은 계획대로 오늘 살기>의 줄거리 :
약속의 땅 가나안은 최소한으로 잡아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의 때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오륙백 년 묵은 하나님의 계획들이 수립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의 삶은 마치 고대 유물을 발굴해 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시대를 대입하여 보면, 아브라함의 때를 기준으로 잡아도 무려 4천 년 된 계획들이 수립된 삶을 삽니다. 이 4천 년 된 유물 발굴 방식은 간단합니다. 세상적 현실감으로 압도되는 나를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현실감이 압도하는 상태를 유지하면 됩니다.
4천 년 묵은 계획대로 오늘 살기
(신명기 2:1~37)
1.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4.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세일 산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셨기에 정복 대상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북쪽 갈릴리 호수로부터 시작하여 사해로 이어지는 요단강 동편에 있는 모압과 압몬과도 싸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일 산 인근의 에돔 땅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셨던 것처럼 롯의 자손인 모압과 암몬에게도 기업으로 주신 땅이 있었기에 이들과 싸우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한편 북쪽으로는 아모리 족속의 헤스본 왕 시혼에 대해서는 싸워 이기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복 전쟁을 수행하였고 이들을 남기지 않고 진멸했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4천 년 묵은 계획대로 오늘 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 시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4천 년 전 사람입니다. 모세의 시대로부터 따지면 600년 전 사람입니다. 주전 1447년에 출애굽이 일어났고, 신명기가 기록된 당시는 이로부터 40년이 흐른 주전 1407년인 가나안 입성 직전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2천여 년 후에 예수님이 태어나셨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다시 2천여 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가 사는 시대인 것입니다.
신명기 1장에서는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이 언급되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이 실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실의 배후이며 진짜 현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정탐으로 가나안이라는 세상적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고, 영적인 현실에 대한 자각은 유리 조각처럼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 뒤에 이스라엘은 출애굽 1세대가 다 죽을 때까지 38년간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다만 모세는 이 38년의 과정을 회상하는 대신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진입해야 되는 출애굽 2세대가 주역이 된 상태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합니다. 신명기가 기록될 당시의 최근의 일을 회상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회상 중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과 허락하지 않으신 땅을 언급합니다. 먼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에게 주신 에돔 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두 딸이 아버지를 취하게 하고 동침하여 얻은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해서도 땅을 빼앗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 아브라함과의 연관성에서 이들의 기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편, 요단강 동편 북쪽에 있는 아모리 족속에 대해서는 이들의 땅을 정복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모세의 설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나열처럼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신명기가 기록될 당시로부터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백성은 없었고, 딱히 성령에 감동된 영적 의미를 담은 설교로 여겨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굳이 이러한 최근의 사건을 언급하며 설교를 이어갑니다. 그렇다면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는 싸우지 말고 아모리 족속의 헤스본 왕 시혼과는 싸워 이기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다는 이 회상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만약 제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늘어놓기만 하는 설교를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복지를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소환하여 기억하게 하십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의 시대로부터 6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 약속이 6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더한 170년이 있고, 이스라엘의 430년 간의 노예 생활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나설 때 조카 롯이 따라 나왔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 나올 때 이미 롯으로부터 모압과 암몬 자손이 나올 것도 계획하셨습니다. 600년 후에 이스라엘이 이들의 땅을 통과하게 되더라도, 그 땅을 한 뼘도 얻지 못할 것도 수립하고 계셨습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실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삭이 낳을 에서와 야곱의 자손들에 대한 일까지도 다 계획하셨습니다. 에서가 호리 족속이 살던 세일 산을 본거지로 살게 될 것도 계획하시고, 야곱 자손에 대해서는 선민으로 계획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과 관련된 자손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모리 족속 헤스본 왕 시혼에 대해서는 싸워 이겨서 땅을 차지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15장 18절을 보면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지는 21절을 보면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이미 아모리 족속과 싸워 이길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을 언급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600년 된 계획을 실행하셨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모세는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전쟁을 하지 않았던 대상과 전쟁을 해서 이긴 대상을 언급합니다. 이를 통해 이제 선민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는 전쟁을 하지 않고, 아모리 족속의 헤스본 왕 시혼과는 전쟁을 해서 이겼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미 600년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진 일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자면 선민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250만으로 추산되는 선민이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의 약속의 복지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것은 창세전에 이미 계획된 일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선민임을 염두에 두자면 조상인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삼아 600년 이상 된 계획으로 수립되어 있었던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선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600년 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대로 살아가는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예를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는 싸우지 않고, 아모리와는 싸워 이긴 것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돔과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600년 전에 아브라함의 손자인 에서가 에돔 땅의 세일 산을 거점으로 살게 될 것을 정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에돔 땅을 지나며 싸우지 않을 것도 계획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모압도 마찬가지고 암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아모리 족속에 대해서는 싸워서 이길 것에 대해서도 이미 창세기 15장 18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거명하신 가나안 족속들과는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것을 600년 전에 이미 수립하셨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전쟁의 리허설 하듯이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 족속과 전쟁을 해서 이겼습니다. 모세는 이것을 언급하며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의 매일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600년 묵은 계획들이 다 수립되어 있다. 그 묵은 계획들을 마치 유물을 발견해 내듯이 발굴하여 사는 것이 복지의 삶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경주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신라의 금관 모형을 선물하여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천년의 고도 경주’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등장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신라의 왕들은 바로 이러한 왕관을 썼다는 것에 의미를 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선민입니다. 선민으로 오늘을 산다는 것은 4천 년 묵은 계획들이 수립되어 있는 오늘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금관을 발굴하는 것처럼 우리는 4천 년 묵은 계획을 발굴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선민이란 그렇게 발굴한 계획대로 오늘을 사는 자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은 모세의 시대로부터 6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는 싸우지 않고 아모리 족속과는 싸워서 이길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은 우리에 대해서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의도를 따르자면 우리도 이처럼 4천 년 된 계획을 발굴해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서울에 올라갈 일이 생기면 항상 주차가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차를 한 곳에 세워두고 지하철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서울을 떠난 지 오래되다 보니 지명이나 노선에 밝지 않습니다. 지하철 노선을 들여다보면서 어디서 몇 번을 갈아타야 하는지 공부를 해야 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서울의 지하철 노선이 아무리 복잡해도 결국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갈아타든 결국 연결되지 않는 지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통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은 수행되어 갑니다. 이렇게 연결되는 사람들은 마치 지하철 노선과도 같습니다. 지하철 노선이 복잡해도 모두 이어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과 사건에 대한 계획을 이미 4천 년 전에 수립하셔서 이루어지도록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하철 노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복잡한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4천 년 전에 그 모든 관계를 계산하시고 이루시려는 계획을 수립해 놓으셨습니다. 4천 년 묵은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복지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내고 따를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는 싸우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아모리 족속의 헤스본 왕 시혼과는 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지시를 받아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은 하면 됩니다. 다만 말이 쉽지 실제로 어떻게 하나님의 지시를 받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4천 년 묵은 계획들을 따라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은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이 바로 앞 장에서 언급된 가데스 바네아 사건으로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사실을 현실로 느끼는 것이 영적 현실 자각입니다. 이러한 영적 현실 자각이 세상적 현실 자각에 의해서 유리 조각처럼 깨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사실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고,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살아계시며 나를 보고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모든 나의 미래를 생각하시어 이끌고 계십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들을 지금 내 몸이 만나는 세상의 사실들에 적용해야 합니다.
내게 여러 가지 사실이 존재합니다. 경제 형편이 어렵습니다. 건강이 안 좋습니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몸으로 만나는 사실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관련 사실들 또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만나는 사실보다 하나님 관련 사실을 더 강한 현실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 현실감이 깨지지 않으면 4천 년 묵은 하나님의 계획들이 내게 알려집니다. 하나님 현실감이 크면 클수록, 세상 현실감이 작으면 작을수록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마치 유물을 발굴하듯이 하나님의 4천 년 된 계획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유물을 발굴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원형을 손상하지 않기 위해 붓으로 흙을 살살 털어냅니다. 혹시 깨지고 망가질까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이와 같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오늘을 위한 하나님의 4천 년 묵은 계획을 온전한 형태로 발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현실감이 세상 현실감보다 커야만 합니다. 이 현실감이 크면 클수록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고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짊어짐이란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이어 나가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십자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세상이 들어온 다음에 ‘아이고, 이런 나는 죽어야 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의 어려움을 현실로 느끼고, 몸이 아픈 상황을 현실로 느끼고, 말 안 듣는 자녀들을 현실로 느끼고 난 후에 ‘이건 아니지.’하고서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내가 지금 몸으로 만나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몸을 중심으로 하는 세상 삶에 하나님의 주권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음이 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을 이끌어가시는 것이 보이면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려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이 명확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몸이 만나는 삶의 현장에 대한 죽음이 명확하고 뚜렷할수록, 4천 년 된 하나님의 계획은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서 이 땅에 드러나고 이루어집니다. 세상 현실감이 하나님 현실감에 의해서 쫓겨나고 부서지고 작아지는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은 유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을 기다리던 하나님의 4천 년 묵은 계획이 그대로 땅에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년 고도인 경주에서 발굴된 금관이 대단해도, 나의 오늘을 위해 준비 된 하나님의 4천 년 묵은 계획보다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4천 년 묵은 계획 속에 오늘 내가 점심에 김치찌개를 먹어야 한다는 계획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무척 사소한 일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조금도 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지를 약속하실 때 내가 오늘 김치찌개를 먹는 일조차 그 계획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김치찌개를 먹는 일 자체는 대단한 일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4천 년 묵은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이라는 점이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2장 17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들으며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바라본 별 속에는 제가 있고 여러분도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란 죽는 순간까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늘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약속하시던 4천 년 전에 수립하신 계획이 이루어지는 날인 것입니다.
우리 삶은 다양한 대상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내 배우자가 있고, 내 자녀가 있고, 내 부모가 있고, 내 형제자매가 있고, 내 이웃이 있고, 내 친구가 있고, 내 나라가 있습니다. 내 집, 내 삶, 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내’라는 단어가 붙은 대상들과 만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제가 67살이니 ‘내’라는 단어가 붙는 대상들과의 관계는 아무리 길어도 67년입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났어도 성인으로서 한국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진 시점을 따지자면 기껏해야 50년 정도일 것입니다. 아내를 안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 기껏해야 52년 정도일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이 된 자녀를 둔 분이라도 자녀와 만난 시간은 기껏해야 30~40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몸에 대해서 4천 년 전에 계획을 수립하셨고, 선민인 내가 살 나라에 대한 것도 이미 아브라함 때 계획을 다 갖고 계셨습니다. 배우자나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내 자녀를 안지 기껏해야 30~40년 되었는데, 하나님은 4천 년 동안 내 자녀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내 몸을 안지 기껏해야 67년이 되었는데, 하나님은 4천 년 동안 내 몸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내 몸에 대한 계획을 다 수립하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소유격의 ‘내’라는 표현을 붙여서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요? 그러한 계획들은 기껏해야 몇십 년밖에 되지 않은 너무나 설익은 생짜배기라서 쓸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라는 단어가 붙은 모든 대상에는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나는 자녀에 대해 불과 몇십 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주제에 자녀에 대해서 개입하고자 합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개입하고자 합니다. 나라에 대해서 개입하고자 합니다. 뭘 안다고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삼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4천 년 전에 선민이 살아갈 곳으로써 대한민국의 마지막 날까지 계획을 다 세워두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스스로 계획하거나 뜻한다는 것은 설익었다는 말 정도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설픈 일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다 계획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그저 최근에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회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한 영적 내용을 담고 있는 설교입니다.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는 싸우지 않았고, 아모리 족속과는 싸워서 이겼습니다. 모세는 이것이 이미 아브라함 때 결정된 일이었음을 밝히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간 선민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계획이란 창조 이전에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선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삼는다면, 하나님의 계획이란 이미 아브라함 때에 다 결정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지를 사는 것은 이미 600년 전 아브라함 때 수립된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지를 사는 것 또한 이미 4천 년 전에 수립된 계획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현실감이 세상의 현실감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라는 단어가 붙을 수 있는 대상들에 대해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착각합니다. 가장 친한 존재라도 된다는 듯이 여기고, 가장 잘 아는 존재라도 된다는 듯이 까불고 나대며 계획하고 뜻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섣부른 짓인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력할 일은 유물을 발굴하듯 4천 년 묵은 하나님의 계획을 발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현실감을 살려내야만 합니다.
앞 장에서 가데스 바네아 정탐 사건이 언급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 현실감을 잊은 결과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나안 현실감에 의해 하나님 현실감이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가나안과 같은 현실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감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사실들을 하나님보다 현실로 느끼는 자체에 대해서 죽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인정함으로써 하나님 현실감을 키웁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4천 년 전에 수립하신 계획은 발굴되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4천 년 묵었으니 너무 오래된 계획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4천 년 전에 오늘의 나의 삶을 위해 계획을 수립하신 그 하나님은 지금도 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4천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던 그 하나님은 바로 지금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에 나를 위한 계획을 다 수립해 놓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아브라함을 만날 때처럼 나를 만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상에서 볼 때 4천 년이 지난 것이지 하나님 안에서는 지금의 계획과 똑같습니다. 영적으로 우리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안에 들어가면 지금의 계획이고, 그 지금의 계획은 이 세상에서 보면 4천 년 전에 아브라함 때 이미 세워졌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을 타지 않고 영원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2025년 11월 7일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민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복지를 허락하시겠다는 계획을 말씀하실 때, 이미 2025년 11월 7일에 대한 계획은 다 세워졌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오늘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묵은 계획들이 오늘 분량대로 발굴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몸으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현실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 현실감 때문에 마음에서 느껴야 할 하나님 현실감이 사소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현실감이 유리 조각처럼 깨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현실감을 유리 조각처럼 깨뜨리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마음에서 세상 현실감 자체가 아예 성립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현실감이 시시각각 밀려와서 세상 현실감을 느낄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될 때,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될 4천 년 묵은 계획들은 다 발굴되고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은 모세 시대의 선민에게 있어서 최소한 600년 묵은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4천 년 묵은 계획입니다. 이렇게 수립된 하나님의 계획들이 온전히 발굴되어 삶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복지의 삶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4천 년 묵은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오늘을 살기 위한 자산이요 밑천임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유물을 발굴하듯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발굴하게 하시고, 그러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고 세상 현실감이 마음에 형성될 틈을 주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 현실감으로 충만한 상태가 유지되는 복 중의 복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